이재용 삼성전자 회장. 사진 삼성전자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 사진 삼성전자

삼성물산은 우리나라 최대 대기업 집단인 삼성그룹의 ‘사실상’ 지주회사다. 삼성바이오로직스(43.10% 보유), 삼성전자(5.01%), 삼성생명(19.30%) 등 기라성 같은 회사들을 거느리고 있지만, 사실 삼성물산이란 기업에 대한 증권가 평가는 박하다. 삼성전자 등 보유하고 있는 자회사 가치가 40%만 반영돼 있다. 수치만 따지면 삼성물산이 가지고 있는 모든 자회사 주식을 팔아 삼성물산 주주들끼리 나눠 갖는다고 하면, 주주들은 현재 주가의 두 배 이상을 회수할 수 있다. 아파트 브랜드 래미안이나 종합상사, 식자재 업체 웰스토리, 테마파크 에버랜드 등 삼성물산이 영위하는 사업 부문을 번외로 하고도 말이다.

안재만 
조선비즈 증권부장
‘지금 부자들은 배당주에 
투자한다’ ‘포스트 코로나 
경제 트렌드 2021(공저)’ 저자
안재만 조선비즈 증권부장
‘지금 부자들은 배당주에 투자한다’ ‘포스트 코로나 경제 트렌드 2021(공저)’ 저자
삼성그룹이 언젠가는 이재용 회장 중심으로 지배구조를 재편하고, 그 과정에 삼성물산이 주도적 역할을 할 것이라는 전망은 ‘명약관화(明若觀火)’할 것 같았다. 하지만 뼈대 같았던 전제가 요즘은 흔들리고 있다. 그동안 내심 ‘설마⋯곧 하겠지’라고 추측하는 사람이 많았는데, 최근 이 회사는 돌아올 수 없는 다리를 건너버렸다. 오랜 기간 모아온 자사주 전량(보통주 13.2%, 우선주 9.8%)을 소각하겠다고 밝힌 것이다. 자사주가 없다면 삼성물산 및 삼성전자를 인적 분할해 지주회사를 세우는 (증권가에서 가장 확률이 높다고 보고 있는) 지주회사 전환 시나리오는 실행하기 불가능해진다. 삼성물산지주, 삼성물산 사업회사, 삼성전자지주, 삼성전자 사업회사로 나눈 뒤 지주끼리 합병하고 그 과정에 자사주를 자회사 지배력 확보에 쓰면 비교적 저렴하게(일부 증권사 추산으로는 9조원대) 지배구조를 개편할 수 있는데, 이 방법은 자사주 소각으로 인해 막혀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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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배구조 개편, 아예 없을 수도 있다

증권가에서는 삼성그룹이 지배구조 개편을 아예 하지 않을 가능성이 있다고 보는 전문가가 조금씩 나오고 있다.

일단 현재 이재용 회장 중심의 지배구조가 비록 불안하기는 하지만 그럭저럭 유지는 할 수 있다. 이재용 회장은 삼성물산 지분 17.97%를 보유하고 있고, 삼성물산이 삼성전자 지분 5.01%를 들고 있다. 삼성전자 지분이 적기는 하지만, 또 다른 그룹의 중추인 삼성생명이 보유한 삼성전자 지분 8.51%가 있어 최대 주주 지위를 유지할 수 있다.

리스크가 없는 것은 아니다. 특히 정치권에서 추진하는 ‘삼성생명법’이 큰 걸림돌이다. 삼성생명법은 보험사가 보유한 계열사 주식을 시가로 평가하고, 그 한도를 총자산의 3%로 제한하는 보험업법 개정안이다. 삼성생명이 삼성전자 지분을 취득할 당시 가격은 약 1000원(액면분할 등 가정)이었는데, 이를 시가로 반영해 초과분을 팔도록 하는 것이다. 현 주가 기준으로 삼성생명은 20조원의 삼성전자 주식을 매도해야 한다. 동시에 삼성생명이 빠지면 삼성물산이 공정거래법상 지주회사 전환 규정에 걸리기 때문에 삼성물산은 삼성전자 지분 25%를 추가 취득하거나, 지분을 거의 전량 매도해야 한다. 이처럼 파괴력이 있기에 이 내용을 담은 박용진 더불어민주당 의원의 보험업법 개정안은 ‘삼성해체법’으로 불리고 있다.

삼성물산은 어떻게 대응할 생각일까. 사실 이 법이 도입된다면 빠져나갈 방법이 전혀 없다. 즉 삼성물산이 자사주를 전량 소각한다는 것은 ‘정치권이 당장 삼성생명법을 도입하지는 않을 것’이라고 판단했거나, 아니면 정반대로 벼랑 끝 전술처럼 정치권을 압박하기 위한 수단일 수 있다. 삼성물산이 자사주를 전량 소각, 지주회사 전환 가능성을 버리면서 여론의 힘을 얻고자 하는 상황이라는 해석이 나오는 배경이다.

한 금융권 관계자는 “우리나라는 재벌에 대한 인식이 나쁜 편이었는데, 이재용 회장과 이부진 호텔신라 사장 등에 대해선 상대적으로 호의적”이라며 “정치권이 더 강하게 밀어붙이기는 어려운 상황이라고 삼성그룹이 판단했을 수 있다”고 말했다. 또 다른 관계자는 “현재 분위기에서 국민연금 등 기관이 (설령 삼성물산에 대한 행동주의 공격이 들어오더라도) 경영진 편을 들 가능성이 크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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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성물산, 내부적으로는 사업 정비 필요 

물론 삼성그룹이 지배구조 개편을 전혀 안 한다는 의미는 아니다. 앞서 2020년 삼성물산과 삼성전자, 삼성생명 등 3개 회사는 보스턴컨설팅그룹(BCG)에 지배구조 개편 관련 용역을 의뢰한 바 있다. 최종 보고서는 아직 공개되지 않았지만, 삼성이 이사회를 중심으로 지배구조를 개편하는 내용이 주된 것으로 알려졌다. 일부 계열사를 분할 및 합병해 이재용 회장의 지배력을 키우는 방안이 아니라, 그룹을 보다 투명하고 건전하게 경영하는 목적의 개편 방안인 것으로 추정된다.

삼성물산 자체적으로도 사업 구조를 정비할 필요는 있다. 삼성물산이 승계 과정에서 온갖 사업이 다 섞인 ‘짬뽕 회사’가 돼버려 이를 정리하기 위한 개선안은 필요하다는 지적이 나온다. 삼성물산은 건설과 상사, 패션, 레저, 식음, 바이오 등의 사업 부문으로 구성돼 있다. 승계를 위해 제일모직과 삼성물산이 합병하면서 복잡한 사업 구조를 갖추게 됐다.

삼성물산이 이처럼 온갖 사업을 다 품은 바람에 오히려 저평가 요인이 심화했다고 보는 전문가가 적지 않다. 

삼성전자, 삼성바이오로직스 등 자회사만 가진 순수 지주회사였으면 가치 측정이 쉬웠을 텐데, 인기가 그리 많지도 않은 건설과 상사, 패션, 레저 등이 섞여 있으니 애널리스트들도 사업 부문 가치를 계산하기 어려워졌다는 것이다. 이 때문에 이재용 회장 지배구조와 별개로 사업 부문을 부분적으로나마 정리할 가능성이 제기된다.

이외 또 다른 관전 포인트는 그룹 내 시스템통합(SI) 업체 삼성SDS다. 삼성SDS는 이재용 삼 남매가 지분을 가진 회사로, 삼성그룹의 일감 몰아주기 덕에 큰 폭으로 성장했다. 언젠가는 삼성전자와 합병해 이 회장이 삼성전자 지분을 늘리는 데 활용할 것이란 전망이 많았으나, 현재 분위기에서는 진행하지 않을 가능성이 크다.

이부진·이서현 자매는 증여세 마련을 위해 몇 차례에 걸쳐 시간외매매 방식으로 삼성SDS 주식을 처분했다. 경영권 프리미엄을 받을 기회를 포기한 셈인데, 소액주주 이익을 등한시하면 질타받는 최근 분위기에서 이 회장을 비롯한 오너 일가가 또다시 장내 처분을 할 수도 있다는 추측이 나온다.

어쨌든 현재 삼성 분위기는 오너 일가를 위한 무리한 행동은 전혀 하지 않는 상황이다. 이 회장이 지난 2020년 5월 경영권 승계 과정에서 발생한 준법 의무 위반 행위에 대해 사과하면서 ‘4세 경영 포기’를 선언한 만큼, 주주 우선주의는 세간의 예상보다 길게 지속될 가능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