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월 14일(이하 현지시각) 재닛 옐런(Janet Yellen) 미국 재무장관은 ‘월가의 황제’로 불리는 제이미 다이먼(Jamie Dimon) JP모건체이스 회장 겸 최고경영자(CEO)에게 전화를 걸었다. 나흘 전인 3월 10일 실리콘밸리뱅크(이하 SVB)가 파산한 이후, 다음 차례는 퍼스트리퍼블릭뱅크가 될 것이라는 소문이 떠돌던 시점이었다. 퍼스트리퍼블릭뱅크는 자산 건전성이 좋지 않아 오래 버티지 못할 것이라는 시각이 우세했다. 스탠더드앤드푸어스(S&P)는 이 은행의 신용등급을 기존의 ‘A-’에서 투기 등급인 ‘BB+’로 네 단계 낮추기까지 했다.
옐런은 파산 위기에 빠진 퍼스트리퍼블릭뱅크에 최대 채권자인 대형 은행들이 돈을 빌려주면 어떻겠냐고 다이먼을 넌지시 떠 봤다. 다이먼은 이 제안을 흔쾌히 수락했고, 뱅크오브아메리카(BOA), 웰스파코, 시티은행 CEO들에게 전화를 돌렸다. JP모건체이스와 더불어 미국 4대 은행인 이들은 퍼스트리퍼블릭뱅크에 각각 50억달러(약 6조5600억원)씩 투자하기로 결정했다. 사실 이 ‘빅(big) 4’ 은행들은 파산한 SVB를 비롯해 중소 지역은행에서 빠져나온 예금이 신규로 유입된 덕에 이번 사태의 최대 수혜처이기도 했다. 빅 4의 주도하에 골드만삭스와 모건스탠리도 25억달러(약 3조2800억원)씩 투자하기로 결정했고, 다른 은행들도 이에 가세했다. 옐런과 다이먼이 통화한 지 불과 이틀 뒤인 3월 16일 미국 대형 은행 11곳은 퍼스트리퍼블릭뱅크에 총 300억달러(약 39조3600억원)를 투입해 구제하기로 했다는 공동 성명을 발표했다. 블룸버그가 밝힌 퍼스트리퍼블릭뱅크 구제 과정의 전말이다.
SVB 파산에서 시작된 금융위기가 연쇄 도미노 효과까지 번지지 않은 데는 이처럼 다이먼의 공이 컸다. 파이낸셜타임스(FT)는 재닛 옐런 장관, 제롬 파월(Jerome Powell) 연방준비제도(Fed·연준) 의장, 제이미 다이먼 회장의 이름 앞 글자를 따서 “세 명의 J가 퍼스트리퍼블릭뱅크를 구제했다”고 보도했다. 정책 당국 핵심 수장인 옐런, 파월과 함께 나란히 금융위기 확산을 조기에 진압한 소방수로 이름을 올린 것은 그만큼 다이먼의 역할이 컸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SVB 위기 확산 차단 주도한 다이먼
사실 SVB 사태 이후 다이먼은 당국자 이상의 역할을 수행했다. SVB 유동성 위기설이 처음 언급된 것은 3월 8일 무렵이다. 고객의 예금 인출 요구에 대응하고자 SVB는 대부분 미 국채로 구성된 매도가능증권(AFS·만기 전 팔 의도로 매수한 주식과 채권)을 매각했고, 이로 인해 18억달러(약 2조3600억원)의 손실을 입었다. 야후 파이낸스 등에 따르면, 다이먼은 이때부터 위기를 감지하고 최고위 당국자들과 물밑 논의를 시작했다.
뉴욕타임스(NYT)는 “금융 당국이 SVB를 전격 폐쇄한 3월 10일 월리 아데예모 재무부 차관이 다이먼을 찾아왔다”고 보도했다. 아데예모는 이 자리에서 다이먼에게 “지금 막 파산한 SVB 위기가 다른 은행으로 확산돼 금융 시스템에 구조적 위험을 초래할 수 있을까”라고 물었고, 다이먼은 “가능성 있다(There’s potential)”라고 대답했다. 이 한마디로 SVB 예금 전액 보장이 결정됐다.
NYT에 따르면, 애초 백악관과 재무부 일부 관리들은 SVB의 갑작스러운 파산이 경제 위기를 촉발할 가능성은 매우 작다고 봤다. SVB는 규모로 봤을 때 미국 내 16번째 은행에 불과한 데다 정부가 SVB를 다른 금융기관에 매각할 수도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또한 바이든 행정부와 연준은 SVB 사태를 해결하는 데 있어 오바마 행정부가 저지른 과오를 답습하지 않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오바마 행정부는 2008년 발생한 글로벌 금융위기를 해결하기 위해 막대한 구제금융을 펼쳤고, 덕분에 금융 시스템의 연쇄 붕괴는 막았지만, 막대한 혈세를 투입한 정부의 개입으로 은행의 도덕적 해이를 심화시켰다는 비판에 시달려야 했다. 오바마 행정부의 부통령이었던 바이든 대통령은 이 같은 사태가 재현될까 우려했지만, 결국 다이먼의 조언을 따르기로 했다. 다이먼과 아데예모의 회동 이틀 뒤인 3월 12일 미 재무부와 연준, 연방예금보험공사(FDIC)는 공동 성명을 통해 “SVB 예금자들은 3월 13일부터 모든 예금을 인출할 수 있다”고 발표했다.
비운의 황태자에서 살아있는 월가 전설로
최근 일련의 사태들로 인해 금융계에서 자신의 영향력을 다시 한번 입증한 다이먼은 월가의 살아 있는 전설로 통한다. 하버드비즈니스스쿨 졸업 후 쟁쟁한 기업에서 입사 제의를 받은 그는 아버지의 상사였던 샌디 웨일의 제안을 받고 아메리칸 익스프레스에 입사했다. 웨일은 다이먼이 학창 시절 쓴 에세이를 읽고 그를 ‘될성부른 떡잎’이라고 점찍었다고 한다.
1985년 웨일이 아메리칸 익스프레스에서 쫓겨났을 때 다이먼 역시 그를 따라 나와 기업 인수합병(M&A) 분야에서 능력을 발휘했고, 1998년 웨일이 시티그룹 CEO가 되자 다이먼은 자타 공인 그의 뒤를 이을 ‘황태자’로 간주됐다. 하지만 그 무렵 둘 사이엔 서서히 균열이 생기기 시작했고, 마침내 다이먼은 1998년 휴가 도중에 전격 해고되기에 이른다. 전도유망한 황태자에서 비운의 황태자로 전락한 다이먼은 이를 악물었고, 2000년 미국 5위 은행인 뱅크원 CEO로 임명되면서 재기에 성공했다. 이후 2004년 JP모건체이스와 합병을 성사시켰고, 2007년부터는 회장직을 겸하고 있다. ‘평생 멘토’였던 상사에게서 잘린 뒤 더 큰 금융 업체의 수장(首長)으로 화려하게 부활한 것이다.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에도 살아남은 월가의 CEO는 다이먼이 유일하다.
이런 다이먼이지만, 몇 차례 말실수로 구설에 오른 적이 있다. 2020년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 재임 당시 한 행사장에서 “나는 트럼프만큼 터프하고 그보다 똑똑하다. 내가 트럼프를 이길 수 있다고 생각한다”고 말해 대선 출마설을 지폈다가 트럼프로부터 “얼간이”라는 말만 듣고 사태가 일단락된 적도 있고, 2021년엔 “JP모건체이스가 중국 공산당보다 오래갈 것”이라고 했다가 중국에서 사업 철수 위기에 몰리기도 했다.
하지만 몇 번의 위기와 실수에도 불구하고 월가에서 다이먼의 영향력에 대해선 누구도 부인할 수 없다. 제프리 소넨펠드 예일대 경영대학원 교수는 “세계 금융계에선 모두 다이먼의 전화를 받는다”며 “그는 전문성과 권위, 보기 드문 판단력을 지니고 있다”고 평가했다.
1907년에도 금융위기 막은 JP모건
다이먼의 역할은 그가 회장으로 있는 JP모건의 설립자인 존 피어폰트(JP) 모건이 1907년 금융 공황을 해결했던 것과도 비교된다.
1907년 10월, 미국 3위 신탁 회사였던 니커보커신탁이 파산했다. 고객은 자신의 돈을 찾기 위해 장사진을 쳤고, 이 때문에 뱅크런(대규모 예금 인출 사태)이 일어나면서 금융시장은 패닉을 일으켰다. 미국 증시는 1893년 이후 최저치로 떨어졌다. 미국에 중앙은행이 없던 시절이던 이때 JP모건이 구원 투수로 등장했다. 그는 위기에 몰린 은행에 민간 대부자 역할을 해 주기로 하고, 다른 대형 은행들에서도 협의를 이끌어냈다. 당시 JP모건은 다른 금융인들을 자신의 서재에 감금하다시피 해서 자금난이 발생한 은행에 대한 지원을 이끌어냈다.
JP모건이 이러한 ‘1인 연준’ 역할을 한 것은 이때가 처음이 아니다. 1895년에도 유럽의 금 유출로 인해 미국이 채무불이행 위기에 놓였을 때 모건이 자금을 빌려줘 이를 해결한 적이 있다. 연준 의장을 지낸 앨런 그린스펀은 자신의 저서 ‘미국 자본주의의 역사’에서 존 록펠러, 앤드루 카네기, JP모건 등 20세기 초 미국의 3대 부호를 가리켜 “록펠러는 전 세계 정유량의 90%를 통제했고, 카네기는 영국보다 많은 철강을 생산했으며, JP모건은 미국을 두 번의 파산 위기에서 구했다”라고 썼다.
하지만 JP모건의 역할은 오히려 그에게 독으로 작용했다. 1912년 그는 자신과 동업자들의 금융조합이 112개 기업의 341개 이사직을 차지했다는 혐의로 하원 위원회에 불려나와 취조를 받았다. 이듬해 그는 심장 발작으로 사망했는데, 하원 위원회에서 받은 공개 비방이 스트레스로 작용했다는 주장도 있다. 그가 사망한 해 미국에선 연준법이 만들어졌고, 12개 연준 은행이 설립돼 JP모건이 했던 역할을 담당하게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