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씨와 B씨는 30여 년간 금슬 좋은 부부로 살아왔다. 그러던 어느 날, 행복하던 삶에 균열이 생겼다. 남편 B씨가 세 명의 여성과 외도한 사실이 드러난 것이다. 아내 A씨는 남편을 상대로 이혼 소송을 제기하는 한편 세 명의 상간자에게 손해배상 소송을 냈다. 세 여성이 A·B씨 부부의 혼인 관계를 파탄에 이르게 만들었기 때문에 A씨의 정신적 고통에 대해 책임을 져야 한다는 취지였다.

그러나 A씨가 제시한 ‘불륜의 증거’가 문제였다. A씨는 외도 현장이 녹음된 차량 블랙박스를 증거로 제출했으나 상간자들은 녹음이 당사자들의 동의 없이 몰래 이뤄졌다며 통신비밀보호법(통비법)을 위반한 불법 증거라고 주장했다. 따라서 증거 능력이 없으며, 위자료 청구도 기각돼야 한다는 게 피고 측 입장이었다.

법무법인 신세계로의 조인섭(사법연수원 33기)·김규리(변호사시험 9회) 변호사는 차량 블랙박스 녹음 파일이 불법 증거가 아니라는 점을 집중적으로 주장했다. 불륜의 증거가 블랙박스 녹취록뿐이었기에 증거 능력을 인정받는 게 관건이었다. 결국 1, 2심 재판부는 블랙박스 녹취록을 합법적 증거로 받아들여 아내 A씨의 손을 들어줬고, 상간자인 피고들에게 위자료 3000만원 지급을 명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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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랙박스 녹음 파일 ‘불법 감청’ 결과물?… “대화 실시간 녹음 아냐”

이번 사건은 2021년에 발생했다. 유일한 증거는 남편 B씨가 타고 다니던 차량에 설치된 블랙박스였다. 여기엔 남편 B씨의 외도 현장이 생생하게 녹음돼 있었다. B씨와 세 명의 상간자들은 서로를 ‘여보’ ‘자기’ ‘애인’ 등으로 부르는가 하면 ‘보고 싶다’ ‘집에 가서 안마를 해주겠다’ ‘뽀뽀를 해주겠다’는 등의 애정 표현을 했다. 상간자들이 B씨가 기혼자라는 사실을 인지하고 있었던 정황도 그대로 녹음됐다.

결국 A씨에게 손해배상 소송을 당한 상간자들은 “대화를 녹음한 녹음 파일 및 그에 기초한 녹취록은 통비법을 위반하는 불법 수집 증거”라며 증거 능력이 없다고 주장했다. 쟁점이 된 통비법 제4조와 14조에는 이렇게 적시돼 있다. “불법 검열에 의하여 취득한 우편물이나 그 내용 및 불법 감청에 의하여 지득(知得) 또는 채록(採錄)된 전기통신의 내용은 재판 또는 징계 절차에서 증거로 사용할 수 없다. 누구든지 공개되지 아니한 타인 간의 대화를 녹음하거나 전자 장치 또는 기계적 수단을 이용하여 청취할 수 없다.”

변호사는 “통비법을 위반한 증거는 증거로 사용하지 못할 뿐 아니라 징역형의 형사 처벌이 따를 수 있다고 명시(제16조)돼 있기 때문에, 이 사건에서 블랙박스 녹취록이 불법 증거가 된다면 원고의 위자료 청구가 기각될 수 있는 상황이었다”고 설명했다.

법무법인 신세계로는 블랙박스 녹취록의 증거 능력을 인정받기 위해 과거 판례들을 찾아냈다. 2012년 10월 25일에 나온 대법원 판결 내용을 보면 통비법에서 금지하는 ‘불법 감청’은 송수신하는 전기통신 행위를 대상으로 규정할 뿐, 송수신이 완료돼 보관 중인 전기통신 내용은 대상으로 삼지 않는다.

A씨의 경우는 대화를 실시간으로 녹음한 게 아니었다. 이미 대화가 종료된 후 블랙박스에 파일 형태로 보관돼 있던 ‘녹음물’을 청취한 것이었다. 때문에 통비법 위반에 해당하지 않는다는 게 원고 측 주장의 골자였다. 조 변호사는 “통비법에서 말하는 ‘감청’의 경우 ‘현재성’이 중요하다”며 “이미 대화가 종료돼 저장 매체에 파일로 보관 중인 녹음물은 불법 감청 대상이 아니다”라고 말했다.

신세계로는 통비법이 정보통신망법과 다르다는 점도 증명해야 했다. 피고 측에서 통비법과 정보통신망법의 취지상 유사성을 근거로 들며 블랙박스에 저장돼 있는 음성 파일이 불법 증거라고 주장했기 때문이다. 정보통신망법 제49조는 “누구든지 정보통신망에 의하여 처리·보관 또는 전송되는 타인의 정보를 훼손하거나 타인의 비밀을 침해·도용 또는 누설하여서는 안 된다”고 규정하고 있다. 이를 위반해 타인의 비밀을 침해·도용하거나 누설할 경우 5년 이하의 징역 또는 5000만원 이하의 벌금에 처할 수 있다. 이처럼 ‘이미 확보된’ 문자 메시지나 카카오톡 메시지를 취득하고 누설할 경우에도 처벌의 대상이 되는 만큼, ‘이미 저장된’ 블랙박스 음성 파일을 취득하는 것도 위법이라는 게 피고 측 입장이었다.

이에 대해 신세계로는 “정보통신망법은 정보의 저장·송신·수신을 모두 다 보호 대상으로 삼지만 통비법은 통신·대화의 비밀만 보호하고 있어, 정보통신망법의 논리를 그대로 적용할 수 없다”고 주장했다.

블랙박스 누가 설치했는지도 중요

A씨가 불륜 증거를 확보할 목적으로 블랙박스를 설치한 게 아니라는 사실도 중요했다. 블랙박스를 직접 구매해 설치한 당사자는 바로 남편 B씨였다. 블랙박스는 그 이후 줄곧 차에 설치돼 있었으며, B씨와 상간자들의 대화가 우연히 녹음된 것이었다.

이는 과거 판례들과 비교해 확연한 차이가 있다. 2021년 5월, 배우자의 휴대전화에 불법 애플리케이션(앱)을 설치해 통화 내용을 자동 녹음하고 녹음 파일에서 불륜 증거를 찾아낸 원고가 위자료 청구를 기각당한 일이 있었다. 당시 재판부는 원고가 배우자와 상간자의 동의를 받지 않고 통화 내용을 몰래 녹음했기 때문에 통비법 제4조에 의해 재판에서 증거로 사용할 수 없다고 판단했다.

2007년에 나온 또 다른 판례에서도 배우자가 집에 녹음 장치를 설치해 녹취록을 간통죄의 증거로 제출했는데, 이 역시 증거 능력을 인정받지 못한 바 있다. 이런 판례들과 다르게 A씨는 블랙박스를 직접 구매하거나 설치하지 않았으며, 남편과 상간자들의 대화를 의도적으로 녹음한 것도 아니었다. 조 변호사는 “통비법 위반이 되려면 공개되지 않은 타인 간 대화라는 것을 인식하면서도 그 대화를 녹음한 경우여야 한다”며 “그 사실을 인식한 순간 ‘해당 대화를 청취 및 녹음하지 말아야 할 의무’가 생기는 것이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녹음했을 때 고의가 생겨 통비법 위반이 성립하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1, 2심 모두 아내 손 들어줘…상간자 항소 기각

1심 재판부는 신세계로의 주장을 받아들여 A씨의 손을 들어줬다. 피고 중 한 명이 불복해 항소했지만, 서울고등법원 제2 가사부는 지난해 12월 8일 이들의 청구를 기각했다. 항소심 재판부는 “모든 주장과 증거들을 살펴보더라도 원고가 통비법을 위반하는 방법으로 블랙박스를 이용해 대화를 녹음 또는 청취했다는 점을 인정하기 어렵다”고 판단했다. 그러면서 “통비법의 문언이 타인 간 대화를 녹음과 청취의 대상으로 규정하고 있을 뿐, 이미 대화가 종료돼 저장 매체에 파일 형태로 보관 중인 녹음물을 대상으로 규정하지 않는다”고 판시했다. 신세계로의 주장을 인정해준 것이다.

재판부는 녹음이나 청취가 금지되는 대화는 의사소통 행위의 현재성 및 현장성을 전제로 한다는 판단도 덧붙였다. 녹음 기능이 있는 블랙박스에 ‘우연히’ 타인 간 대화 내용이 녹음된 경우 이 녹음 파일을 청취하거나 녹취록을 작성하는 행위는 통비법 위반에 해당되지 않는다고도 판시했다.

조 변호사는 “이번 사건에서는 판단의 대상이 블랙박스에만 국한됐지만, 향후 휴대전화 등 다른 매체의 녹음물로도 범위가 확장될 수 있을 것으로 본다”며 “이번 판결이 일상생활 속 ‘녹음’의 적법성을 가르는 경계선을 그어줬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