술아원의 제품 라인업. 
사진 박순욱 기자
술아원의 제품 라인업. 사진 박순욱 기자
2022년 말에 출시된 ‘복분자 그라빠’는 경기도 여주의 지역특산주 양조장 술아원 강진희 대표가 만든 술이다. 경기미와 전통 누룩 그리고 농촌진흥청이 개발한 국산 토종효모로 술을 빚어 생쌀 발효 후, 여주 홍천면에서 재배한 복분자를 넣고 다시 발효시켜 증류한 제품이다. 알코올 도수는 40도, 복분자의 달곰한 향과 깔끔한 맛을 느낄 수 있다고 한다. 그러나 술이 약한 사람들 사이에선 ‘알코올 도수가 높아 복분자의 달곰한 향을 느끼기 어렵다’는 지적도 있고, 전통주 시장 전체의 반응도 아직은 뜨겁지 않다. 하지만 이 술이 갖는 의미는 따로 있다. 국내 숱한 전통주 중에서 환경을 생각해서 만든 최초의 술이란 사실이다.
박순욱 
조선비즈 선임기자
서울대 독어독문학 학·석사, 전 조선비즈 
성장기업센터장, 
‘한국술열전’ 저자
박순욱 조선비즈 선임기자
서울대 독어독문학 학·석사, 전 조선비즈 성장기업센터장, ‘한국술열전’ 저자

그라빠(Grappa)가 어떤 술인가. 그라빠는 이탈리아어로 ‘와인을 만들고 남은 찌꺼기를 증류해 만든 증류주’라는 뜻이다. 술아원 강진희 대표 역시 ‘술아원의 효자상품’ 복단지를 빚으면서 양조 후에 쌓이는 복분자 찌꺼기를 어떻게 처리할지 고민했다. 복단지는 쌀을 기본원료로 한 약주로, 마지막 담금 때 생복분자를 으깨 넣은 술이다. 

“복분자 지게미에는 알코올 성분이 아직 많이 남아 있어, 가축 사료로도 적합하지 않다. 그래서 재활용 방안을 한참 고민하다가, ‘와인 양조 부산물로 만드는 이탈리아 그라빠처럼 우리도 복분자 지게미로 복분자 그라빠를 만들면 어떨까’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아쉽게도 주세법은 이를 허용하지 않는다. 그래서 ‘복분자 그라빠’는 쌀약주에 생복분자를 함께 넣은 상태로, 다시 말해 약주인 복단지와 다름없는 술을, 증류해서 만든다.”

강진희 술아원 대표. 
사진 박순욱 기자
강진희 술아원 대표. 사진 박순욱 기자

술아원의 ‘복분자 그라빠’는 복분자 지게미만으로 증류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엄밀히 말해서 ‘복분자 그라빠’라고 하기 어렵다. 강 대표는 자신이 만든 복분자 그라빠를 ‘한국형 그라빠’라고 부른다. 환경을 살리자는 취지는 일정 부분 살리면서 법 테두리 내에서 만든 술이라는 뜻이다. 그렇다면 복분자 그라빠의 맛과 향은 어떨까. 

“뚜껑을 열고 처음 한두 잔 마시면, 쌀증류주 향이 도드라진다. 그런데 세 잔, 네 잔, 이렇게 계속 마시면 복분자 특유의 베리 향이 나기 시작한다. 그래서 복분자 그라빠는 마시기 전에 뚜껑을 미리 열어두면 향이 잘 우러나서 좋다. 베리 향이 좀 천천히 올라오기 때문이다.”

술아원은 과하주 전문 양조장으로 잘 알려져 있다. 양조장을 차린 지 아직 10년이 되지 않았지만, 안 만드는 술이 없을 정도로 제품 포트폴리오가 화려하다. 경성과하주를 비롯한 5종의 과하주 그리고 쌀막걸리, 고구마증류주 필 25도, 복분자 약주 복단지까지. 작년 4분기에 새로 내놓은 복분자 그라빠와 비슷한 시기에 나온 신상품은 ‘고구마소주 필 40도’다. 고구마소주 필 25도가 나온 게 2019년이니, 3년 만에 40도 신상품이 나온 셈이다. 증류주 시장이 점점 커지고 있다고는 하나, 일본과 달리 국내 고구마소주 시장 규모는 아직 초라하다. 우선, 국내에서 고구마소주를 만드는 회사가 2곳뿐이다. 

술아원의 고구마소주는 100% 고구마만으로 만들지 않는다. 고구마는 쌀보다 전분 양이 적은 탓에 원활한 발효를 위해 10% 정도 쌀을 첨가한다. 쌀로 밑술을 담근 뒤에, 삶아서 으깬 고구마와 정제 효소를 넣어 발효시킨다. 발효가 끝난 고구마술을 증류하면 알코올 도수가 42도 정도 된다. 그러나 술아원은 물을 첨가해서 알코올 도수를 25도로 크게 낮춘 ‘필 25도’를 내놓았고, 3년 만에 필 40도를 새로 내놓았다. 

“25도 고구마소주를 먼저 내놓은 것은 우리나라에 고구마소주가 아직 대중화되지 않았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고구마소주는 향이 독특하고 진하기 때문에 어느 정도 마니아층이 형성되고 나서야 시장이 제대로 커질 것으로 봤다. 고구마소주가 발달한 일본 역시, 40도 고구마소주도 많지만 25도 고구마소주는 더 많다. 

하지만, 최근 들어 우리 증류주에 대한 관심이 늘어나는 추세를 타고 고구마소주 매출도 점점 불어나고 있어, 이번에 40도 고구마소주를 내놓았다. 작년 11월에 열린 우리술품평회 때 고구마소주 ‘필 40도’를 처음 선보였는데, 예상보다 반응이 좋았다. 처음에는 그냥 구색용으로 만들자는 생각이었는데, ‘잘하면 25도 못지않게 40도 고구마소주도 스테디셀러가 될 수도 있겠다’고 생각하고 있다.”

그렇다면 고구마소주 25도와 40도의 맛 차이는 어디에 있을까.

“고구마소주 ‘필 25도’는 좀 더 맑고 경쾌한, 어떻게 보면 차가운 느낌을 준다. 반면에 ‘필 40도’는 따뜻하면서도 묵직한 느낌을 준다. 고구마 특유의 향도 40도에서 더 도드라진다. 아무래도 증류 원액이 많이 들어갔으니까.”

고구마소주는 그러나 가격이 착하지 않다. 필 25도(375 기준)는 3만원, 40도는 6만원 정도다. 그 이유는 수율(생산성)이 워낙 낮기 때문이다. 고구마는 크기에 비해 술 발효의 핵심 성분인 전분 양이 적어, 만들어지는 술 양 자체가 적다는 것이다. 2015년에 농업회사법인 술아원(지금 위치와 다른 곳의 양조장)을 차린 강 대표는 양조장을 차리기도 전인 2014년에 이미 네 종류의 과하주(춘하추동)를 내놓아, 국내 대표적인 ‘과하주 전문 양조장'으로 자리매김했다. 그리고 고문헌을 참고해, 여주 해찹쌀과 국내산 누룩, 정제수를 사용한 경성과하주를 2019년에 추가로 내놓았다. 

술아원은 2020년에 지금의 자리로 양조장을 확장 이전했다. 2021년 ‘찾아가는 양조장’으로 선정됐을 정도로 양조장이 카페처럼 멋스럽다. 이전 양조장에 비해 규모는 몇 배나 커졌지만, 술 빚는 방식은 변함이 없다. 

“대형 공장에서 하루에도 수만 병씩 찍어내는 소주, 맥주 일변도의 술 시장이 이제 약간씩 변화의 조짐이 일고 있다. 좀 더 다양한 술들을 소비자들이 찾기 시작했다. 

술아원 역시, 이런 거대한 변화의 소용돌이 속에 있다. 술아원은 상업양조장이지만, 가양주 스타일로 전통주를 빚고 있다. 집에서, 가족과 함께 먹을 술을 만든다는 생각으로 술을 빚고 있다. 가양주 스타일의 혼이 속속들이 배어 있는 제품을 만들고 있다. 나와 같은 생각을 가진 양조장들이 더 많이 생겼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