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 셔터스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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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행의 태생적 위험

국제결제은행(BIS) 비율로 유명한 바젤은행감독위원회(BCBS)는 은행업의 본질을 ‘레버리지(leverage)’와 ‘만기 변환’이라고 정의한다. 여기서 ‘레버리지’는 고대 그리스의 아르키메데스가 “나에게 충분한 길이의 지렛대를 준다면 지구를 들어 올려 보겠다”고 말한 그 지렛대를 의미한다. 은행은 타인의 돈(예금)을 빌려서(지렛대) 또 다른 타인에게 빌려주는(대출) 산업이다. 또 ‘만기 변환’이란 은행이 ‘단기’ 자금을 ‘장기’ 자금으로 둔갑시킨다는 의미다. 그러나 실제로 만기를 둔갑시키는 것은 은행이 아니라 법이다. 예금의 경우 채권자(예금자)는 언제든지 예금을 회수할 수 있지만, 대출의 경우 채권자(은행)는 만기 이전 대출금을 회수할 수 없다. 로마 이래로 법이 그렇게 정한 것이다. 바젤이 레버리지, 만기 변환이라고 멋지게 표현하고 있지만, 은행업은 태생적으로 뱅크런(대규모 예금 인출 사태)과 유동성 위험(현금 부족 위험)을 내포하고 있다.

신상준 한국은행 
이코노미스트
연세대 법학 학·석사, 
서울시립대 법학 박사, 
‘중앙은행과 화폐의 헌법적 문제’ ‘돈의 불장난’ 
‘국회란 무엇인가’ 저자
신상준 한국은행 이코노미스트
연세대 법학 학·석사, 서울시립대 법학 박사, ‘중앙은행과 화폐의 헌법적 문제’ ‘돈의 불장난’ ‘국회란 무엇인가’ 저자

‘메리 포핀스’가 웅변하는 뱅크런 공포

세계적인 뮤지컬 영화 ‘메리 포핀스’는 ‘침침체리’ 같은 흥겨운 노래와 춤도 일품이지만, 뱅크런의 속성을 잘 표현하고 있다. 은행에 견학 온 주인공 꼬마의 손에 2펜스짜리 동전이 쥐어져 있는 것을 본 은행장은 그 꼬마를 상대로 저축의 중요성을 역설한다. 이 은행장은 동전부터 모아서 은행가로 성공한 사람이었다. 하지만 주인공 꼬마는 2펜스짜리 동전으로 비둘기 모이를 사기로 이미 마음을 굳힌 상태였다. 설득에 실패한 은행장이 꼬마의 손에서 동전을 빼앗으려 하자, 꼬마가 비명을 질렀고, 대기하던 다른 손님들은 은행에 문제가 생긴 것으로 오해하고 창구에 몰려들어 예금 인출을 요구하는 소동이 벌어진다. 뱅크런이 발생한 것이다. 

알고 보면 미국 은행업의 역사는 뱅크런의 역사다. 대공황이 발생한 1930년대 이전에만 이미 14번의 은행 패닉, 즉 은행의 연쇄도산과 실물경제의 붕괴가 있었다. 이런 14번의 패닉 중에서 1907년 패닉이 가장 처참했다. 1907년 은행 패닉은 은행업을 영위하던 ‘니커보커’라는 회사가 부도나면서 뉴욕시 전역에 공포와 뱅크런을 불러일으켰고, 일주일 만에 대부분 은행을 초토화했다. 대출 시장이 얼어붙었고, 주식시장이 붕괴했다. 이 사태로 4년간 미국 경제가 후퇴했는데, 국내총생산(GDP)이 11% 감소했고, 실업률이 3%에서 8%로 상승했다. 이런 역사적 경험을 바탕으로 1913년 연방준비제도(Fed·연준)와 연방예금보험공사(FDIC)가 탄생했다.

뱅크런으로 무너진 SVB

3월 10일(이하 현지시각) 미국에서 자산 규모 16위인 실리콘밸리뱅크(SVB)가 뱅크런으로 파산했다. 글로벌 금융위기가 발생한 2008년 영국 4위의 노던록은행이 뱅크런으로 무너진 이후 15년 만에 주요 7국(G7), 특히 미국의 중견 은행이 뱅크런으로 무너진 것이다. 왜 그랬을까.

SVB는 기술은 있지만 자금력이 부족한 벤처 스타트업(신기술 창업 기업) 대출에 특화된 은행이다. 벤처 스타트업은 사업 초기에는 수익을 낼 수 없지만, 사업이 성공하면 천문학적 수익을 내는 사업 특성이 있다. SVB는 스타트업의 지분을 담보로 대출을 하고 이들의 영업 자금을 다시 예금으로 유치하는 영업 전략을 구사했다. 스타트업의 지분 담보 비율은 사업 초기에는 50% 정도지만 사업이 정상 궤도에 오르면 7% 정도로 낮춰줬고, 대출금을 갚지 못하면 다른 투자자에게 담보를 팔아 손실을 보전했다. 

통상적으로 BIS 기본자본(Tier 1 Capital)비율이 8%를 넘으면 우량은행으로 평가되는데, 2022년 말 SVB는 15.26%로서 국내 굴지의 OO은행(14.72%)보다 높은 수준이었다. ‘기본자본비율’은 기본자본을 총자산(위험자산)으로 나눈 비율을 말하는데, ‘기본자본’이란 총자산에서 부채를 뺀 순자산(알짜 재산)을 의미한다. 2023년 초 무디스는 이 은행의 대출 포트폴리오가 안정적이면서도 수익성이 높다고 평가했다. 미 증권거래위원회(SEC)의 공시 자료에 따르면, 2022년 말 SVB는 총자산의 35%를 대출, 57%를 채권으로 운용하고 있었다. SVB 대출은 충분한 담보를 받고 있어 손실이 적고 수익성이 높았으며, 채권은 대부분 미국 국채와 정부 기관 발행채로서 세계 최고 안정성과 유동성을 보장했다. 

하지만 연준이 공격적으로 금리를 인상하면서 문제가 발생했다. 세계 최고의 안전자산인 미국 국채가 비수(匕首)가 돼 중견 은행의 등 뒤에 박힌 것이다. 2022년 3월 이후 연준은 11개월 만에 기준금리를 0%에서 4.75%로 끌어올렸고, 이로 인해 유동성이 고갈된 벤처기업들은 은행 예금을 대거 인출했다. SVB는 유동성 보강을 위해 국공채를 매각했지만, 고금리로 국채 가격이 하락함에 따라 큰 손실을 보게 되었다. 기준금리가 인상되면 신규 발행되는 국채 금리가 높아지기 때문에, 과거에 낮은 금리로 발행된 국채 가격이 떨어지게 된다.

SVB는 이후 유상증자를 시도했으나 실패했고, 이로 인해 신용도가 추락하자, 불안에 빠진 고객들이 앞다퉈 예금을 인출, 결국 지급불능에 빠지고 말았다. 3월 9일 하루에만 총예금의 4분의 1이 인출됐다고 한다.

예보와 연준

애초 불개입을 선언했던 미국 재무부는 3월 12일 연준과 예금보험공사를 좌우에 거느리고 기자들 앞에 나타나 SVB 도산이 미 은행 시스템에 광범위한 시스템적 위험을 초래할 수 있다고 말하며 “미국 경제를 보호하기 위한 결정적 행동에 나선다”는 내용의 공동성명을 발표했다.

우선 예금보험공사는 SVB의 모든 예금자에게 예금 전액을 지급하기로 했다. 미 예금보험법에 따르면 은행이 파산할 경우 한 은행 계좌당 최대 25만달러(약 3억3000만원)까지만 보호된다. 하지만 특정 은행 파산이 광범위한 시스템 위험을 초래할 경우 한도를 초과한 예금 보장이 가능하다. 이것을 ‘시스템 위험에 따른 예외 조치’라고 하는데, 재무장관이 이러한 조치를 취하기 위해서는 예금보험공사 이사회 3분의 2, 연준위원회 3분의 2 찬성이 필요하고 대통령의 사전협의를 거쳐야 한다. 재무부, 연준, 예금보험공사가 어깨동무를 하고 기자회견장에 나타난 것은 이 법 때문이다.

다음으로 연준은 긴급대출(BTFP)을 마련해 유동성이 부족한 은행들에 1년짜리 자금을 지원하기로 했다. 유동성이 필요한 은행은 국채, 주택저당채권을 담보로 제공해야 하는데, 시장가가 아닌 액면가로 담보 가치가 평가된다. 연준의 금리 인상으로 국채 가격이 떨어져서 시장가로 평가할 경우 담보 비율이 낮아지기 때문이다. 쉽게 말해 담보 가치를 부풀려주겠다는 것이다. 그리고 미 재무부는 연준의 긴급대출를 보증할 용도로 정부의 환율안정기금에서 최대 250억달러(약 33조원)를 사용하기로 했다.

구제금융인가, 아닌가

부실은행의 구제 방법으로는 베일아웃(bail-out)과 베일인(bail-in)이 있다. 베일아웃은 은행 밖에서(out) 이해관계 없는 제삼자가 은행을 구제하는 것이고, 베일인은 은행 안에서(in) 이해관계자가 은행을 구제하는 것이다. 베일아웃의 경우 정부가 자본 출자, 부실채권 매입 등의 방법으로 부실은행에 국민의 세금을 투입한다. 베일인의 경우 주주는 자본 소각과 추가 출자 의무를 부담하고, 채권자는 출자 전환과 채권 포기 의무를 부담한다. 

미 예금보험공사는 예금보장한도를 초과한 예금지급의무를 부담하지만 그 재원은 은행들이 출연한 예금보험기금이기 때문에 베일인으로 볼 수 있다. 하지만 연준의 긴급대출은 어떻게 볼 것인가. 중앙은행 대출은 통화 증발을 유발하고, 인플레이션을 통해 일론 머스크에게서 노숙자에게까지 균등하게 부담을 전가시킨다. 중앙은행 대출은 베일인인가, 베일아웃인가. 또 연준의 대출이 떼이면 보증을 선 연방정부가 지급 의무를 떠안는다. 정부 보증은 베일인인가 베일아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