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업 드라마였다면 ‘재벌집 막내아들’을 능가하는 설정과 스토리였을 것이다. 기존 드라마의 중심 배경이었던 20세기의 재벌가는 한 명도 등장하지 않았다. 대신 21세기 한국 산업을 상징하는 정보기술(IT)과 엔터테인먼트 그리고 금융 기업이 숨 막히는 일전을 벌였다. ‘딴따라판’이었던 가요계에 대한 인식을 바꾸고, 나아가 가요계를 산업으로 승격시켰으며, 결국 내수용이었던 대중음악을 글로벌 수출 산업으로 바꾼 거인이 있었다. 그의 가족으로 20대부터 고모부 회사에서 일을 시작, 공동 대표까지 올라간 이의 오이디푸스적 전개가 있었다. 아무도 주목하지 않던 후발 엔터테인먼트 회사를 마침내 시총 1위로 키워낸 신흥 최강자가 있었다. 기업 지배구조의 부당함을 폭로하고 약한 연결고리를 쳐내려는 금융 전문가 집단이 있었다. 이 더할 나위 없이 드라마틱한 인물들은 매일 문화면과 산업면, 경제면을 넘나드는 행동과 발표를 이어 나갔다. 두 달이 되지 않는 짧은 시간에 모든 일이 일어났고, ‘삼국지’로 치자면 제갈량의 죽음 정도의 단계까지 진행됐다(강유와 등애의 행보를 기억하는 이가 얼마나 될까). 올 초부터 가요계와 산업계의 이슈를 블랙홀처럼 빨아들였던 SM엔터테인먼트(이하 에스엠) 경영권 분쟁 이야기다.
행동주의 펀드가 시작한 스토리
본격적인 스토리는 행동주의 펀드를 표방한 얼라인파트너스자산운용(이하 얼라인)이 등장하며 시작됐다. 에스엠 지분 0.91%를 확보한 후 게임에 뛰어든 얼라인은 이수만이 라이크기획을 통해 21년간 1400억원의 로열티를 받았다는 등, 그간 잘 알려지지 않았던 에스엠과 이수만의 약한 고리를 공격했다. 여론은 악화됐고 이수만과 에스엠은 궁지로 몰리는 듯했다. 결국 지난 1월 에스엠은 얼라인 측의 요구를 수용했다. 이수만의 처조카이자 A&R파트에서 커리어를 쌓아온 이성수 공동 대표는 얼라인과 함께 지배구조를 개선하겠다는 발표를 했다. 이는 2월 3일 이성수, 탁영준 공동 대표의 ‘에스엠 3.0’ 계획 발표로 이어졌다. 창사 이래 최대 규모의 개혁이자 ‘포스트 이수만’ 시대에 맞는 내용이었다. 그리고 며칠 후 또 하나의 플레이어, 카카오 엔터테인먼트가 등장했다. 얼라인과 에스엠은 신주 발행 및 전환사채를 통해 카카오가 9.05%의 지분을 획득하는 안을 결의했다. 이 결정으로 인해 카카오는 단숨에 에스엠의 2대 주주 자리를 차지하는 흐름이었다.
바로 이 시점, 이수만은 용퇴의 서사를 스스로 무너뜨렸다. 측근을 통해 강력한 유감의 뜻을 표명했다. 김민종 같은 이들이 뜬금없이 나타나 이수만 편을 자처했다. 무슨 미련이 남았던 걸까. 어쨌거나 저쨌거나 그는 여기서 미스터리한 결정을 한다. 2월 10일, 하이브가 판에 뛰어들었다. 이수만으로부터 에스엠의 지분 14.8%를 매입한다고 발표한 것이다. 이수만이 먼저 방시혁 하이브 의장에게 이 딜을 제안했고 방시혁이 이를 받아들였다. 판이 요동치기 시작했다. 에스엠이라는 희대의 매물을 두고 국내 2위 플랫폼 기업 카카오와 1위 엔터테인먼트 기업이 맞붙는 구도가 그려졌다.
이수만 한때 “하이브에는 매각 안 한다”
이 구도가 성사된 게 미스터리한 이유는 2021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는 당시 자신의 지분을 전부 매각하겠다는 의사를 밝혔다. 카카오는 물론이고 네이버, CJ가 유력 인수 후보로 거론되었지만, 하이브도 눈독을 들였다는 게 중론. 하지만 이수만이 하이브에는 절대 매각할 의사가 없음을 밝혔다는 후문 또한 중론이다. 이런 흐름을 알았던 이들에게 이수만과 방시혁의 연대는 따라서, 충격일 수밖에 없었다. 당연히 궁지에 몰린 이수만과 백기사를 자처한 방시혁 간에 보이지 않는 거래가 있는 게 아니냐는 의혹이 제기됐다. 하이브는 발표를 통해 이 의혹을 불식했다. 그렇다면 이수만은 도대체 왜? 두 가지 추측이 가능하다. 한국 엔터테인먼트 산업의 상징과 같은 에스엠을 IT 기업에 넘길 수 없다는 자존심, 아니면 일련의 흐름에서 자신이 배제된 데 대한 몽니. 이유가 무엇이었든, 이로 인해 카카오와 하이브가 에스엠 인수로 취할 이익은 명확해졌다.
우선 카카오의 상황을 보자. 카카오의 산하 레이블은 아이유의 회사인 이담엔터테인먼트를 제외하면 이렇다 할 성과를 내지 못했다. 그나마 스타쉽엔터테인먼트가 아이브를 대성공시켰지만, 회사의 연혁을 생각한다면 성에 찰 만한 규모는 아니다. 이런 상황에서 에스엠을 거느리게 된다면? 상장 시 단숨에 엔터테인먼트 부문 시총 1위를 노릴 수 있게 된다. 에스엠이 대주주인 디어유의 서비스, 버블에 자사의 플랫폼 운용 능력을 결합하여 팬 플랫폼 시장에서도 큰 시너지를 기대할 수 있게 된다. 또한 강호동, 신동엽이 속해있는 에스엠 C&C와 유재석이 있는 안테나와의 협업으로 예능 판에서의 영향력도 극대화할 수 있다.
하이브에도 에스엠은 한없이 달콤한 매물이다. 음원 시장에서 50% 이상의 점유율을 확보하게 되는 건 덤에 가깝다. 20년 이상 축적된 에스엠의 캐스팅, 매니지먼트, 트레이닝 노하우를 활용해 포스트 방탄소년단(BTS)의 자리를 노릴 만한 아티스트 기획에 큰 힘을 얻게 된다. 차세대 주력 사업으로 꼽히는 위버스에 기존의 하이브와 YG 아티스트는 물론, 에스엠과 JYP 아티스트까지 입점시켜 압도적인 팬 플랫폼으로 재편할 수 있다. 에스엠 C&C 또한 신사업 진출 및 콘텐츠 생산의 탄탄한 교두보가 될 것은 물론이다. 무엇보다 K팝 비즈니스의 정점을 찍은 하이브로서는, 이 비즈니스를 탄생시킨 ‘핑크 블러드’를 수혈했다는 상징성까지 획득할 수 있다.
IT와 엔터의 결합으로 종전
엔터테인먼트 역사상 전무후무할, 에스엠이라는 매물 앞에서 양사의 미래를 건 ‘쩐의 전쟁’이 펼쳐지려 하고 있었다. 에스엠 경영진의 반발, 이성수 공동 대표의 폭로 같은 대형 이슈들이 연일 연예와 산업 기사를 장식했다. 여론전 이후, 본격적인 물량전이 예고됐다. 카카오는 1조원 이상을 태울 여력이 있었고, 하이브 또한 총력전을 예고했다. 하지만 현실은 드라마와는 다른 법. 결말은 시시했다. 양사의 주가가 ‘떡상’하며 주주들이 만세를 부르던 때, 하이브가 발을 뺐다. 명분과 이유와 상관없이 마치 산왕공고를 꺾은 북산고처럼 허무했다. 아무리 좋은 패를 들고 있어도 총알이 모자라면 ‘드롭’해야 하는 게 도박판의 생리다. 기업 인수전도 마찬가지일 테고. 하이브 뒤에는 사우디 왕가 같은 막강한 전주가 없었던 것이다.
사실상 게임이 끝난 상황에서 관전평을 남기고 싶다. 이수만의 지분이 누군가에게 인수될 운명이었다면, 최선의 결과로 끝났다. 하이브가 대주주 지위를 얻었던들 피로스의 승리에 그쳤을 것이고, 겹치는 인력과 자원의 내부 정리 또한 만만치 않았을 것이다. 간단히 말하자면 디즈니가 폭스를 인수한 후 일어난 상황이 재현됐을지도 모른다. 반면 카카오는 IT와 엔터테인먼트의 결합으로 새로운 방향성을 모색하게 됐다. 시너지 효과는 하이브보다는 카카오에 알맞은 단어이기 때문이다. 타임워너와 AT&T의 합병과 같다. 한국 엔터테인먼트 산업은 한 기업의 독과점 체제를 피해 새로운 형국의 경쟁 체제를 맞이하게 됐다. 마지막으로 궁금해진다. 4000억원 이상의 현금을 거머쥐게 된 이수만의 기분은 어떨까. 그가 하이브의 에스엠 인수 철회를 끝까지 만류했다는 이야기로 보자면, 마냥 웃고 있지는 못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