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 셔터스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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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경제 전망이 밝아지는가 싶더니 은행권에 문제가 불거졌다. 단 2주 만에 미국 3개 중형 은행이 파산했고, UBS의 크레디트스위스(CS) 인수가 신속 절차로 승인됐다. 2주간 벌어진 사태는 2008년 금융위기 이후 글로벌 은행 시스템상의 최대 위기로 보인다. 과거에도 그러했듯, 금리 인상과 경제 저성장이 겹치면 금융 시스템이 시험대에 오르게 된다. 2008년 금융위기에서 얻을 수 있는 가장 큰 교훈은 은행권 위기가 발생할 경우 당국이 신속하고 과감하게 대응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번 사태에 미국과 스위스 당국은 실제로 과감한 조치에 나섰으나, 아직 시장을 안심시키기에는 역부족이다.

미국 16위 은행이었던 실리콘밸리뱅크(SVB) 파산은 2008년 금융위기 이후 최대 규모 은행 파산 사례로 기록됐다. 첨단기술 스타트업을 주 고객으로 뒀던 SVB는 유동성 위기에 직면하자 보유한 국채와 모기지증권을 내다 팔고, 이것도 모자라서 대규모 신주 발행을 통한 자본 조달 계획까지 발표했다. 이는 고객 신뢰를 높이려는 노력이었지만 역효과를 냈다. 예금을 인출하지 못할 수 있다는 공포가 확산하자, 주요 고객들이 예금을 대거 인출하는 ‘뱅크런’이 발생했고, 결국 예금주의 인출 요구를 들어줄 수 없는 상황이 되자, 정부가 개입해 은행 통제권을 가져갔다. SVB가 파산하기 이틀 전에는 시그니처뱅크의 통제권이 당국에 넘어갔고, 하루 전에는 실버게이트캐피털이 청산을 선언했다. 디지털뱅킹의 시대인 만큼, 위기를 둘러싼 루머는 인터넷에서 들불처럼 퍼졌고 뱅크런 사태가 매우 빠르게 일어났다.

이언 스튜어트
딜로이트 영국 
수석 이코노미스트
런던정경대
이언 스튜어트 딜로이트 영국 수석 이코노미스트
런던정경대

당국의 강력 대응에도 시장은 여전히 위기 모드 

당초 미국 금융 당국은 무너진 3개 은행 모두 은행 시스템 전반의 기능을 와해하기에는 규모와 중요도가 떨어진다고 평가했다. 실제로 2010년 금융위기 재발을 막기 위해 시행된 도드·프랭크 법 수정안이 2018년 통과되면서, SVB와 같은 지방은행과 중형 은행 규제가 완화됐다. 하지만 이번에 SVB 사태로 은행권 위기가 촉발되고 다른 지방은행으로까지 위험이 확산할 위험이 커지자, 미국 재무부와 연방준비제도(Fed·연준), 대형 은행들은 금융 안정을 회복하기 위해 충격과 공포에 해당할 정도의 강력한 대응에 나섰다. 하지만 시장은 여전히 위기 모드다. 중형 지방은행들도 곤두박질치는 주가를 바라보고만 있고, 예금자들은 여전히 중소형 은행으로부터 대형 은행으로 예금을 옮기고 있다.

크레디트스위스는 자본 상황과 규모, 사업모델 등이 SVB와는 전혀 다른 글로벌 은행이다. 하지만 2021년 그린실 파산과 아케고스 마진콜 사태를 겪으며 부실 상황이 온전히 드러나자, 수익성과 주가가 줄곧 내리막길을 걸었다. SVB 사태로 은행권 위기가 촉발되기 전인 올해 2월 말에도 크레디트스위스의 시가총액은 2년 전의 20%에 불과했다.

미국 지방은행들의 연이은 파산으로 투자자들이 은행권 위기에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던 참에, 크레디트스위스가 3월 14일(이하 현지시각) 연례보고서에서 “재무 보고의 ‘중대한 약점’을 발견했고 고객 자금 유출을 막지 못했다”고 인정해 패닉을 초래했다. 크레디트스위스의 주가는 하루 뒤인 3월 15일 30% 가까이 급락했고, 하루에 100억달러(약 12조9500억원) 넘는 예금이 빠져나갔다. 결국 스위스 정부의 압박에 못 이겨 UBS가 30억스위스프랑(약 4조2600억원)을 주고 크레디트스위스를 떠안게 됐다.

금리 인상 리스크 대비 못 한 은행 위기

그렇다면 앞으로 무슨 일이 일어날 것이고, 세계 경제는 어떠한 영향을 받게 될 것인가. 우선 긍정적인 면은 은행권 규제가 15년 전에 비하면 엄격해졌다는 점이다. 은행 자본구조가 더욱 탄탄해지고 유동성 수준도 높아졌으며, ‘가혹 상황 대비 점검(stress test)’ 통과 요건도 강화됐다. 특히 유럽 중형 은행에 대한 규제는 미국과 달리 완화되지 않았다. 금융 당국은 초긴장 상태로 상황을 주시하며, 신속하고 과감한 대응에 나설 태세다. 2008년과는 분위기가 사뭇 다르다.

하지만 부정적인 면도 있는데, 위기 전염 속도가 심상치 않다는 점이다. 단 2주 만에 투자자 심리가 일변했고 예금이 마구 달아났다. 은행 시스템의 한쪽에서 다른 쪽으로 문제가 빠르고 예상치 못하게 전이될 수 있다. 유동성 지원과 예금 보호 등 공격적인 정책 개입이 있어도 조류를 바꾸기 힘들 수 있다. 더구나 크레디트스위스 사례에서 볼 수 있듯이, 더욱 급진적인 변화가 필요할 수 있다. 

경제 저성장이 지속되면 가계와 기업의 재정 스트레스가 가중되고 은행들은 대손충당금이 늘어난다. 금리가 상승하는 시기에는 자산 가치가 빠르게 하락한다. SVB 파산은 바로 이러한 금리 인상 시기의 위험에 대비하지 못해 붕괴한 사례다. 은행 시스템에 중대한 스트레스가 발생하면 기업의 신뢰도가 악화하고 금융 여건이 경색된다. 은행들은 대출을 줄이고 주식과 채권 가격은 하락하며, 이에 따라 자본 조달 비용이 증가한다. 이번 은행 부문의 위기 발생 이전부터 신용 여건은 크게 경색돼 있는 상태였다. 이러한 과정이 더 진행되면 다시 경제성장을 끌어내리는 요인으로 작용한다.

위기 확산과 당국자의 노련함이 경기침체 확률 좌우

위험은 은행권으로부터 여타 금융 시스템으로 전염된다. 이미 최근 사태로 국채 가격이 요동치며 시장 유동성에 타격을 줬고, 주요 자본시장의 ‘스무드오퍼레이션(smoothoperation)’ 우려가 심화됐다. 2008년 금융위기 이후 은행권 규제가 강화되면서, 위험성이 높은 활동이 규제의 손길을 벗어난 부문으로 옮겨갔다. 사모펀드와 헤지펀드, 머니마켓펀드(MMF) 등을 포함하는 ‘그림자금융(shadow banking)’ 부문이 그것이다. 그림자금융은 경제에 시스템적으로 중요하다고 간주되지는 않지만, 금융 활동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만만치 않다. 이번에 몰락한 미국 중형 은행들처럼 손실과 투자자 이탈에 직면하게 되면, 그림자금융이 어떠한 움직임을 보일지 예측하기가 힘들다. 지난해 9월 영국 국채(길트채) 시장 혼란을 야기한 영국 연기금의 부채연계투자(LDI) 전략의 붕괴는 자산 가격이 하락할 때 금융 구조가 무너지는 방식을 보여준 최근 사례다.

금융시장은 최근 은행권 위기를 경제성장을 끌어내리고 중앙은행들의 금리 인상 명분을 약화하는 ‘디플레이션(물가 하락) 충격’으로 보고 있다. 이러한 금융 충격에 대한 중앙은행의 표준적인 대응은 긴축이 아닌 완화 정책이다. 하지만 여전히 물가가 높기 때문에 미국과 유럽 중앙은행은 딜레마에 처했다. 유럽중앙은행(ECB)은 3월 15일 기준금리를 3.0%까지 0.5%포인트 인상했지만, 추가 금리 인상은 신중하게 결정할 것이라는 입장을 내놓았다. 미국 연준은 22일 기준금리를 2007년 이후 최고치인 4.75~5.00%로 0.25%포인트 인상하면서 “인플레이션 위험에 주의를 기울이고 있다”는 점을 강조했다. 연준 정책위원들의 금리 전망을 보여주는 점도표는 올해 연말 연방기금금리를 5.1%로 제시해 한 차례의 추가 금리 인상 가능성을 열어뒀다.

세계 경제는 최근까지 호전되는 양상을 보였다. 에너지 가격 하락과 중국 경제 활동 재개를 감안해, 국제통화기금(IMF)과 경제협력개발기구(OECD)는 세계 경제성장률 전망치를 상향 조정했다. 영국 경제 전망을 발표하는 예산책임청(OBR)도 3월 15일 전망을 수정해, 영국이 올해 경기침체를 피할 것이라고 밝혔다. 

하지만 이러한 경제 전망의 수정은 시기상조일 수 있다. 최근 은행권 위기가 경기침체의 망령을 다시 불러오고 있다. 경기침체 확률이 얼마나 높아질지는 연쇄적 위기 발생 여부와 정책결정자들의 노련함에 달려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