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 셔터스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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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코(Coco)샤넬과 코코(CoCo)본드는 아무런 관련성이 없다. 하지만 두음과 라임이 유사한 관계로 코코본드(CoCo Bond)는 우리에게 코코샤넬 같은 명품 느낌을 준다. 언어의 유희라고나 할까, 아니면 일종의 말장난이라고나 할까.

신상준 한국은행 
이코노미스트
연세대 법학 학·석사, 
서울시립대 법학 박사, 
‘중앙은행과 화폐의 헌법적 문제’ ‘돈의 불장난’ 
‘국회란 무엇인가’ 저자
신상준 한국은행 이코노미스트
연세대 법학 학·석사, 서울시립대 법학 박사, ‘중앙은행과 화폐의 헌법적 문제’ ‘돈의 불장난’ ‘국회란 무엇인가’ 저자

최근 스위스가 낳은 세계적인 투자은행 크레디트스위스(CS)가 도산 위기에 내몰리면서 3월 19일(현지시각) 스위스 동료 은행인 UBS에 매각됐다. 스위스 연방정부는 UBS가 CS를 인수하는 과정에서 1000억스위스프랑(약 147조원) 규모의 유동성 지원을 약속했고, UBS가 인수한 자산에서 발생할 수 있는 잠재 손실 중 90억스위스프랑(약 13조원)에 대한 보증을 섰다. 하지만 스위스 정부의 이번 조치가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하지는 못했다. 왜냐하면 스위스 금융을 지탱하던 철통같은 신용에 금이 갔기 때문이다.

우선, 스위스 금융의 비밀주의가 무너졌다. 올해 2월 CS 내부 직원이 1000억스위스프랑 이상을 보유한 3만 명의 고객에 대한 세부 정보를 언론에 유출했다. 고객 명단에는 인신매매범, 고문기술자, 마약밀매범, 종교지도자 등이 포함돼 있었다. CS는 이 사실을 강력히 부인했지만 이로 인해 스위스 금융의 자랑이던 철통같은 비밀주의에 대한 신뢰에 금이 갔다.

또한 UBS는 CS를 인수한 직후 CS의 주주에게는 22.5 대 1의 비율로 축소된 신주를 배정한 반면, CS가 발행한 코코본드는 전액(160억스위스프랑·약 23조원) 상각(소각) 처리했다. 즉 채권자보다 주주의 이익을 우선한 것이다. 문제가 된 코코본드는 조건부 전환사채(Contingent Convertible Bond)를 의미한다. 여기서 ‘조건’은 은행이 부실해지거나 도산하는 경우를 말하고 ‘전환’이란 채권이 주식으로 바뀌거나(주식전환) 휴지로 바뀐다(채권 소각)는 것을 의미하며 ‘사채’는 은행이 빚을 지면서 발행하는 채무 증서를 말한다.

코코 본드

2007년 미국에서 부동산 거품이 꺼지고 서브프라임 모기지 부실이 현실화하면서 2008년 3월 베어스턴스가 몰락하고 9월 리먼브러더스가 파산했으며 2009년 2월 미국 최대 투자은행(IB)인 시티(Citi)가 보통주 36%를 미 재무부에 넘기면서 사실상 국유화됐다. 문제는 이러한 은행들이 도산 위기에 몰릴 때까지 신용등급과 재무 상태에 아무런 이상이 없었다는 것이다. 이에 주요국 정상들(FSB)은 바젤은행감독위원회(BCBS)에 실효성 있는 은행규제기준을 정립할 것을 주문했고, BCBS는 수년간에 걸친 논의 끝에 2010년 말 새로운 은행건전성 규제기준인 ‘바젤III’를 세상에 내놨다. 바젤III는 은행자본을 자본성(손실흡수력)의 정도에 따라 보통주자본, 기타기본자본(AT1·Additional Tier1) 및 보완자본(Tier2, T2)으로 구분하는데, 코코본드는 발행 조건에 따라 기타기본자본(신종자본증권) 또는 보완자본(후순위채권)으로 분류된다. 사실 신종자본증권과 후순위채는 같은 말이다. 후순위채는 채권자 중에서 변제순위가 후순위라는 의미이고, 신종자본증권이란 자본증권인 주식은 아니지만 변제순위가 낮아서 그 위험성이 자본증권인 주식과 유사하다는 의미이기 때문이다.

기업이 파산하면 이해관계자들은 ‘파산법’이 정한 위계질서에 따라 재산을 돌려받는다. 채권자는 주주에 우선하는데, 그 위계질서는 조세채권자인 국가, 임금채권자인 근로자, 저당권 등을 보유한 담보채권자, 담보가 없는 선순위채권자, 담보가 없는 후순위채권자 등의 순서에 따른다. 그리고 주주는 채권자에 대한 변제가 완료된 다음 잔여재산을 분배받는데, 그 서열은 우선주를 보유한 우선주주, 보통주를 보유한 보통주주, 후배주를 보유한 후배주주의 순서에 따른다. 

바젤III에 따른 변제순위는 조금 복잡해 보이지만, 기본적으로 파산법상 위계질서와 크게 다르지 않다. 국가와 근로자를 제외한 이해관계자들을 기준으로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은행이 파산할 경우 예금보장대상 예금자, 저당권 등을 보유한 담보채권자, 담보가 없는 선순위채권자, 예금보장한도를 초과한 예금자, 담보가 없는 후순위채권자(보완자본, Tier2), 담보가 없는 신종자본증권보유자(기타기본자본, AT1), 보통주주(보통주자본, CET1)의 순서로 변제가 보장된다.

CS 사건에서 문제가 된 코코본드는 채권 중에서도 가장 후순위인 AT1증권이다. 하지만 시장 관행과 파산법의 일반 법리에 따르면 어떤 경우에도 주주는 채권자를 이길 수 없다. CS의 경우 이러한 관행과 법리를 무시하고 주식을 채권보다 우대한 것이다. 스위스 정부는 자신이 바젤협약에 가입하지 않았기 때문에 스위스 은행은 바젤III에 구속되지 않는다는 입장이다. 하지만 이것은 글로벌 스탠더드를 무시한 것으로서 스위스 금융의 신용뿐만 아니라 바젤III의 신뢰도에도 영향을 미칠 수 있다.

밴더빌트

1860년대 후반 미국에서는 기발한 인수합병(M&A) 전쟁이 벌어졌다. 당시 미국의 농산물은 미시시피강을 따라 시카고로 모인 다음 대서양 연안의 뉴욕으로 옮겨지고 나서 유럽으로 수출됐다. 뉴욕주의 모든 철도는 밴드빌트대학 설립자인 코르넬리우스 밴더빌트가 소유하고 있었지만, 뉴욕주 외곽에서 시카고까지의 철도 즉 이리철도(Eerie Railroad)는 다니엘 드루, 제이 굴드, 짐 피스크 등 소위 이리갱(Eerie Gang)이 장악하고 있었다. 철도회사의 대주주들이 갱이라고 불린 이유는 이들이 강도, 사기, 공갈 등 온갖 나쁜 짓은 마다하지 않는 인물들이었기 때문이다.

황금 노선인 이리철도가 탐났던 밴더빌트는 뉴욕 주식거래소를 통해 이리철도 주식을 은밀하게 매집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밴더빌트가 아무리 주식을 사들여도 지분율이 높아지지 않았다. 왜냐하면 이리갱들이 지하실에 윤전기를 설치하고 주식(주권)을 무제한 발행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주식시장에 대한 밴더빌트의 감시가 심해지자 이리갱들은 전략을 바꾸어 전환사채를 대량 발행한 다음 주식으로 전환하는 수법을 썼다.

이 사실을 알게 된 밴더빌트는 경찰력을 동원해 이리갱들을 분쇄하기로 마음먹는다. 하지만 경찰에 첩자를 심어 놓았던 이리갱들은 체포 직전 회사의 모든 현금과 회계장부를 가지고 허드슨강을 건너 뉴저지로 도망친다. 이들은 밴더빌트가 사병을 고용해서 자신들을 공격할지도 모른다는 첩보를 얻고, 강변에 요새를 만든 다음 대포와 기관총으로 중무장한다. 결국 이리갱들이 한 수 위였다. 이들은 이리철도 객차마다 상원의원과 판사들의 초상화를 그려 넣었다. 인간의 허영심을 자극한 것이다. 

검사는 이리갱들을 형법상 사기죄로 기소했지만, 이들은 재판정에서 헌법상 출판의 자유(Freedom of Press)를 주장했다. 결국 정치인들의 중재하에 이리전쟁은 휴전에 들어갔고, 이리갱들은 다시 뉴욕에 입성해 온갖 나쁜 짓을 하면서 살았다고 한다. 전환사채는 회사제도만큼이나 오래된 자본주의의 유산이다. 이러한 전환사채의 본질을 꿰뚫어 보고 가장 효율적으로 사용한 사람들은 밴더빌트 전쟁에서 승리한 이리갱이었다. 글로벌 금융위기 수습 과정에서 바젤은 전환사채를 코코본드로 둔갑시켰지만, 전환사채의 본질은 기존주주의 지배력을 유지하면서 남의 돈을 끌어들이는 레버리지일 뿐 회사의 청산 능력(자본력)을 강화하는 것이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