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끼리물범(elephant seal)은 잠자는 동안 천적을 피하려고 최적의 숙면 장소를 찾았다. 바로 수백 미터 깊은 바다 밑이다. 덕분에 하루 두 시간만 자고도 먹이를 사냥할 수 있다.
미국 UC산타크루스 생태진화생물학과의 대니얼 코스타(Daniel Costa), 테리 윌리엄스(Terrie Williams) 교수 연구진은 4월 21일 국제 학술지 ‘사이언스’에 “바다코끼리가 몇 달씩 바다에서 지내며 먹이를 구할 때 나타나는 뇌 활동을 처음으로 기록해 잠수 동안 나타나는 수면 행동을 확인했다”고 밝혔다.
바다 나가면 하루 두 시간만 수면
아프리카코끼리는 이동기에 하루 2시간만 잔다. 바다에도 불면증이 그에 필적하는 동물이 있다. 북미 해안에 사는 북방코끼리물범은 해변에 나와 번식할 때는 하루에 10시간씩 잠자지만, 바다에서 7개월씩 먹이를 구할 때는 하루 2시간만 잔다. 북방코끼리물범은 잠수의 귀재다. 760m까지 잠수해 물고기나 오징어를 잡는다. 숨도 오래 참아 2시간씩 잠수할 수 있다. 상어나 범고래 같은 천적을 피하려고 1~2분만 물 위로 올라와 숨을 쉬고 계속 잠수한다.
코스타 교수는 “코끼리물범이 언제 잠자는지는 학계의 오랜 의문이었다”며 “물범이 계속 잠수하는 것으로 보아 조류에 몸을 맡기는 이른바 ‘표류 잠수(drift dive)’ 때 잠을 자는 것이 분명해 보였지만 확실한 것은 알 수 없었다”고 말했다.
이번 연구 결과 코끼리물범은 최대 377m깊이까지 잠수하면서 한 번에 20분이 채 되지 않는 시간에 잠자는 것으로 나타났다. 잠든 물범은 나선을 그리며 바다 밑으로 떨어지는데, 가끔 바다 밑바닥에 누워 꼼짝하지 않기도 했다. 논문 제1 저자인 스크립스연구소의 제시카 켄달 바(Jessica Kendall-Bar) 박사는 “코끼리물범은 숨을 오래 참을 수 있어 안전한 깊은 바다에서 잠을 잘 수 있다”고 말했다.
연구진은 코끼리물범의 수면 행동을 알아보려고 8마리의 머리에 뇌파(EEG) 측정 두건을 부착했다. 근전도(EMG), 심전도(ECG) 센서도 따로 달아 운동 상태도 확인했다. 모두 인간의 수면 행동을 연구할 때 쓰는 것과 같은 종류의 센서였다. 잠수 깊이와 이동 방향도 별도의 센서로 측정했다. 코끼리물범은 수심 300m에서 잠이 들고, 나선을 그리며 떨어졌다. 연구진은 마치 나뭇잎이 떨어지는 모습과 같았다고 설명했다. 잠시 선잠이 아니라 온몸이 움직이지 않고 깊은 잠을 잤다.
꿈꾸는 렘수면 상태로 자유낙하
뇌파를 분석할 결과, 코끼리물범은 잠수하면서 숙면 상태인 서파수면(SWS·slow wave sleep) 상태에 들어갔다. 수면이 점점 깊어질 때 뇌파의 주파수는 감소하며 진폭은 커지는데, 뇌 활동과 근육 긴장, 심장박동, 호흡이 감소한다. 코끼리물범은 이 상태에서도 자세를 유지한 채 아래로 떨어진다. 300m에 이르면 안구(眼球)가 빨리 움직이는 이른바 ‘렘(REM·급속 안구 운동)’수면 상태에 들어간다. 렘수면은 뇌의 활성, 근육 무긴장, 급속 안구 운동이 특징이다. 쉽게 말하면 몸은 마비됐지만 뇌는 활발하게 작동하는 것이다. 사람은 이때 꿈을 꾼다. 코끼리물범은 렘수면부터 몸이 뒤집히고 조류에 따라 흔들리며 나선형으로 아래로 떨어졌다.
연구진은 이 상태를 ‘나선형 수면(sleep spiral)’이라고 불렀다. 타래송곳이나 잎이 떨어지는 것처럼 나선을 그리며 잠에 든 채 바다 밑으로 추락하는 것이다. 추락이 끝난 뒤 다시 숙면 상태인 서파수면에 들어갔다. 대륙붕의 얕은 바다에서는 이때 바다 밑바닥에서 잠자기도 했다. 테리 윌리엄스 교수는 “수백 미터 아래 바다에서 조류에 몸을 맡긴 채 잠을 자는 동물을 처음 발견한 것”이라며 “결코 얕은 잠이 아니라 몸이 움직이지 않는 깊은 잠으로, 사람이라면 코를 골았을 것”이라고 말했다. 코끼리물범은 뇌에 산소가 떨어지면 서파수면에서 깨어나 각성 상태로 들어가면서 급히 물 위로 올라갔다. 연구진은 수영장 바닥에서 깨어나 온몸에 오한을 느끼는 것과 같다고 추정했다.
한 눈 뜨고 자지 않아도 천적 피해
바다에 사는 동물은 천적을 피하려고 독특한 수면 형태로 진화했다. 바로 잠을 자는 동안 한쪽 뇌는 깨어있는 것이다. 고래와 돌고래 같은 고래류, 물개, 바다사자가 그렇다. 이를테면 잠을 자면서 한쪽 눈은 뜬 채 천적이 오는지 감시할 수 있다. 자면서 헤엄도 치고 호흡도 한다. 반면 코끼리물범은 사람처럼 양쪽 뇌가 모두 잠든다. 잠이 들면 천적에 무방비 상태로 노출될 수밖에 없다. 연구진은 코끼리물범은 천적이 오지 못하는 심해에서 숙면하는 방법으로 문제를 해결했다고 설명했다.
잠버릇이 독특하기로는 향고래(sperm whale)도 코끼리물범 못지않다. 향고래는 몸길이 15m에 고래 중 가장 큰 뇌를 갖고 있다. 최근 TV 드라마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에서 미국 소설가 허먼 멜빌이 1851년에 발표한 소설 ‘모비딕’에 나오는 고래로 소개돼 일반인에게도 친숙해졌다.
역시 코끼리물범처럼 잠을 잘 때 뇌 전체가 완전히 휴식 상태에 빠져 어떤 움직임도 보이지 않는다. 게다가 똑바로 선 채로 잠잔다. 향고래가 서서 잔다는 사실은 2008년 영국과 일본 과학자들이 국제 학술지 ‘커런트 바이올로지’에 처음 발표했다. 영국 세인트 앤드루대 연구진은 고래의 피부에 센서를 부착하고 생활상을 연구하고 있었는데, 우연한 기회에 수면에 코를 내민 채 서 있는 향고래들이 보트가 다가가도 반응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잠을 잔 것이다. 고래는 보트와 부딪치자, 순식간에 흩어졌지만 15분 만에 다시 이전 자세로 돌아왔다고 한다. 향고래는 수면에서 바닷속으로 수직으로 내려가다가 방향을 180도 바꾸었다. 이 상태로 온몸에 힘을 빼고 떠오르면서 잠에 빠졌다. 수면 시간을 재보니 전체 관측 시간 중 단 7.1%에 그쳤다. 짧게는 6분에서 길어야 24분이었다.
연구진은 뇌 전체가 온전히 쉬는 숙면을 해 짧은 시간에도 원기를 회복할 수 있을 것으로 추정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