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6년 미국 우주 왕복선 챌린저호가 발사 1분여 만에 폭발한 이유는 겨우 1㎝ 정도의 불량 고무링(오링·O-ring) 때문이었다. 이 이야기는 향후 ‘아주 조그만 공정 결함 하나로 생산 과정 전체가 파괴되는 결과를 초래한다’는 개발경제학 이론, 즉 ‘오링 이론’으로 발전했다. 마이클 크레이머(Michael Kremer) 시카고대 교수는 2019년 이 이론을 바탕으로 빈곤 해결을 모색해 노벨경제학상을 받았다.
크레이머 교수는 5월 2일 인천 송도에서 열린 제56차 아시아개발은행(ADB) 연차총회의 ‘한국 세미나의 날’ 행사에 기조 대담자로 참석했다. 그는 대한민국 경제의 약한 고리, 이른바 ‘오링’으로 저출산·고령화 그리고 낮은 여성의 경제활동 참여율을 지적했다.
그러면서 해결책으로 ‘이민 정책’을 꼽았다. 특히 가사·양육 분야에 특화한 이민 인구를 수용하는 전략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여성의 경제활동을 촉진해 사회 불평등을 해소하고, 국내 저숙련 근로자에 대한 임금을 올려 임금 불평등을 해결할 수 있다는 주장도 했다. 이렇게 되면 세수가 늘어 국가 재정에도 보탬이 될 수 있어 여러모로 경제적 장점이 많다는 것이 그의 설명이다. 다음은 크레이머 교수와 일문일답.
한국 경제성장에 있어 약한 고리는 무엇이라고 생각하는가.
“세계 경제도 마찬가지지만 한국도 급격한 성장을 이룩한 과거와 조금 다른 경제적 상황에 놓여 있다. 다만 낮은 출산율과 여성의 경제활동 참여율 그리고 고령화 문제가 합쳐져 한국 경제에 광범위하고 중요한 문제가 되고 있다고 생각한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 어떤 고민이 필요한가.
“이민 정책이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해줄 것이라고 생각한다. 여러 많은 정책 연구에서도 이는 긍정적 역할을 한다는 것이 입증됐다. 다만 한국은 단일한 인종으로 이뤄진 곳이어서 사회·문화·정치적 갈등이 발생할 수 있는 게 문제다.”
그런 문제가 사회의 분열로 이어질 것이라는 우려가 있다.
“한국어를 할 줄 아는 중국 교포를 받는 방법이나 범죄 우려가 덜한 집단, 예를 들면 10~20대가 아닌 고령 여성 근로자를 받는 방법 등을 생각해 볼 수 있다. 근로자 가족이 아니라 근로자 본인에 대해서만 비자를 제공하는 것도 문화적 반발을 낮추는 방법이다. 무엇보다 ‘노인·아이 돌봄’ 서비스처럼 특정 분야에 대해서만 이민자를 유입하는 전략적인 방법도 있다.”
특정 취업 분야에 제한된 이민 허용 말인가.
“그렇다. 홍콩과 싱가포르의 ‘외국인 가사도우미 대상 특별 비자 프로그램’을 참고할 만하다. 특히 한국의 저출산·고령화, 여성 문제를 고려할 때도 이 방법이 유용하다. 고학력이지만 아이나 노인을 돌보는 일 때문에 경력 단절된 주부들이 경제적 기여를 할 수 있도록 유도하는 것이다.”
이민자 유입에 따른 각종 경제적 비용이 발생하지 않을까.
“오히려 재정 수입이 확대되는 결과를 낳을 것이다. 여성들의 경제 참여를 끌어내면 세수가 늘어날 수 있다. 또 저숙련 이민자들이 늘면서, 국내 저숙련 근로자에 대한 임금 역시 덩달아 인상될 것이다. 이처럼 세수 확대, 임금 불평등 문제 해결 등 긍정적 파급 효과를 기대할 수 있다.”
노동 착취 문제도 불거질 텐데.
“이민 근로자들이 착취당하지 않도록 보호하는 조치도 물론 필요하다. 한 고용주에게만 비자를 발급하는 것이 아니라 다양한 고용 기관에 취업할 수 있게 하면 근로자들과 정부에도 도움 될 수 있다.”
저출산·고령화 외에도 한국엔 심한 빈부 격차가 큰 문제로 꼽히는데, 기본소득이 대안이 될 수 있나.
“기본소득과 관련해선 전 세계적으로 무작위 통제 실험(RCT·크레이머 교수팀이 개발한 사회과학적 실험 기법으로 공공 정책을 펴기 전 그 효과를 측정하는 방법)이 진행 중이다. 여러 증거가 나오고 있지만, 여기에 더해 한국만의 것을 보완해야 한다. ‘서울시 기본소득 실험’이 다른 국가들의 기본소득과 다른 방식으로 설계됐다고 들었다. 기본소득이라는 정책의 타당성, 충격 등을 볼 수 있다는 점에서 미래 정책에 도움이 될 것으로 예상한다.
이 밖에 어린이집 등 인생 초기 단계에 있어 교육 투자, 경제활동을 이어가도록 고령 인구의 건강을 유지하는 것과 관련한 여러 정책을 시도해 볼 수 있겠다. 다만 이 대답은 내가 전문적으로 연구한 분야가 아님을 감안해 달라.”
코로나19 팬데믹(pandemic·감염병 대유행) 3년에 대해 평가한다면.
“코로나19는 큰 비용을 초래했다. 많은 사람이 목숨을 잃었고, 일상의 경제활동을 할 수 없어 발생한 경제적 비용도 막대했다. 국제통화기금(IMF)이 추산하기론 코로나19 때문에 전 세계적으로 매달 5000억달러(약 660조4500억원)의 손실이 발생했다고 한다. 엄청난 규모다.”
코로나19를 계기로 자국 우선주의와 공급망 교란 등 문제가 심화했다.
“백신 부족 사태가 나타났을 때 일부 국가에선 국내외적 정치 압박이 있었다. 나는 그런 현상이 특정 극단적 민족주의 세력이 부추긴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원료 가격 상승에 따른 백신 부족 사태 속에서 수출을 통제하고 국내 수요에 먼저 대응하자는 국민의 요구가 있었을 것이다. 선출직 공무원들은 어쩔 수 없이 그 여론을 따랐을 것이다. 코로나19 백신 부족 사태처럼 국제사회에 도덕적인 요구가 있을 때 국가가 어떤 선택을 할지 생각하지 않을 수 없게 됐다.”
어떻게 해야 하나.
“이번 팬데믹이 마지막은 아닐 것이다. 지금은 다음 팬데믹이 오기 전 잠깐 평화가 찾아온 시기다. 지금 해야 할 일은 백신 개발 시설을 미리 확충해두는 등 예비 역량을 사전 결집해 두는 것이다.”
코로나19처럼 팬데믹 피해가 본격화하지 않은 상황에서 다음 팬데믹을 위해 준비를 해둔다는 게 일견 비현실적인 구상인 것 같다.
“그래서 ‘선구매 약속(AMC·Advance Market Commitments)’ 방식을 제안하고 싶다. 새로운 기술이 개발됐을 경우 정부 차원의 구매를 우선 약속하는 방식으로 민간 부문의 혁신을 장려하는 것이다. 일종의 금융 인센티브를 민간에 주는 것이다. 예를 들자면 2009년 저·중소득 국가에서 아동 사망의 주요 원인인 폐렴구균에 대한 백신 개발을 위해 AMC를 활용해 12억달러(약 1조5851억원) 규모의 재원이 마련됐으며, 단시간에 두 가지 폐렴구균 백신이 개발·승인됐다. 이를 통해 백신은 수억 명의 사람에게 보급됐고, 70만 명에 달하는 목숨을 구했다. AMC는 백신 개발을 가속하기 위해 처음 도입됐지만, 기후 기술 등 사회적 필요성이 높으나 상업적 인센티브가 크지 않은 다른 기술의 개발에도 적용될 수 있다.”
이렇게 되면 선제적 설비 투자에 적극적일 수밖에 없는 선진국이 더욱 장벽을 세워 공급망 교란 문제가 심화하는 것 아닌가.
“지구상 모든 사람에게 신속히 백신을 제공할 수 있는 생산 능력을 갖추게 된다면 각국 정부가 백신에 대한 무역 장벽을 세울 필요성이 줄어들 게 분명하다.”
미국과 중국의 대립 구도로 대표되는 ‘신냉전 시대’에서 아시아 국가들은 어떻게 대처하는 것이 좋겠는가.
“나는 정치과학자는 아니다. 다만 경제학자 관점에서 보면, 과거 미국과 소련이 정치적 라이벌이던 냉전 시기에도 협력이 있었다. 경제학이 가르쳐주는 건 우리가 제로섬 세계에 살고 있지 않다는 것이다. 무역 등 공동행동을 통해서 협력하면 모두가 혜택을 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