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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전은 무슨⋯, 숨어있는 저평가주에 힘을 좀 실어주자는 거지.”

2009년 개봉한 영화 ‘작전’에 나오는 대사다. 영화에는 조직폭력배 출신 주가조작 설계자가 등장한다. 그가 만든 시나리오는 이렇다. 증시에 상장된 부실한 건설 회사 주식을 미리 사들인다. 건설사가 유망한 기술을 가진 벤처기업을 인수한다는 소식을 시장에 퍼뜨린다. 건설사 주가가 오르면 그동안 사들인 물량을 되파는, 이른바 ‘개미 털기’로 한탕 먹고 나오겠다는 것이다.

2023년 주가조작 세력으로 지목된 투자 컨설팅 업체 라덕연씨의 수법은 영화와 비슷하지만 달랐다. 그의 주장에 따르면, 주식 매매 방법은 이렇다. 시장에서 저평가됐다는 기업을 골라 2~3년간에 걸쳐 여러 투자자의 계좌를 이용해 꾸준히 사들인다. 투자자들은 본인이 입금한 돈으로 본인이 주식을 샀기 때문에(비록 불법 일임을 받았지만) 주가조작이 아니다. 기업 가치 대비 가격이 싼 주식을 분할 매수하고, 시장에서 제 가치를 인정받을 때까지 보유한다. 흔히 말하는 주식투자의 정석이다. 

라씨는 투자자들에게 “절대 걸리지 않는다”고 자부해 왔다고 한다. 그간 적발된 수많은 주가조작 사례를 오답 노트 삼아 수사망을 교묘하게 피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의 비법은 무엇이었을까. 최근 증시 일각에서 사용되는 주가조작 기법을 취재했다.

차명 휴대폰 이용해 수사 허점 노려…통정매매로 주가 올렸다

라씨 일당은 통정매매를 활용했다. 우선 고액 자산가를 투자자로 모집한 뒤 투자자에게서 휴대폰과 신분증을 넘겨받아 증권사 계좌를 개설했다. 라씨는 차명 휴대폰을 이용해 고객 계좌를 직접 손쉽게 관리했다. 

자급제 단말기를 구입한 뒤 몇 단계 본인 인증을 거친 후 신분증만 있으면 차명 계좌를 개설할 수 있다. 경찰이 압수한 휴대폰만 200여 대였다. 미등록 투자 컨설팅 업체인 호안에는 영업팀과 매매팀이 있었고, 팀원이 투자자 계좌를 대신 매매했다는 의혹을 받고 있다. 

게다가 라씨는 거래 흔적을 ‘일부러’ 남겼다. 금융 당국은 수상한 거래로 인지하면 인터넷프로토콜(IP)을 추적하는데, 이를 거꾸로 이용해 발자취를 남기는 식으로 수사망을 피했다. 발자국이 진하게 남아 있어 오히려 눈에 띄지 않았던 셈이다. 

VIP 고객에게는 차명 휴대폰이나 주식 매매 프로그램이 깔린 노트북을 퀵 서비스로 보냈다. 퀵 서비스를 이용하면 누가 보냈는지 알 수 없는 물건도 안전하게 전달할 수 있다. 우리나라의 발전한 물류 시스템도 이들에게는 득이 된 셈이다. 금융 수사에 정통한 한 관계자도 “각각의 전화로 거래하면 ‘계좌 동일인’ 여부를 파악하기 어렵다”고 귀띔했다.

잡주를 끌어올린다고? 다 옛말

SG(소시에테제네랄)증권발 주가 폭락 사태에 얽힌 기업들의 공통점은 시장에서 거래되는 주식 수가 적고, 오너 일가의 승계 문제가 얽혀 주가가 오르지 않았다는 점이다. 재무적으로 우량하고, 건실한 기업이었다. 이런 기업이 작전에 얽혔을 것이라고 누가 의심할 수 있었을까. 

예로 다우데이타는 기업 가치 대비 주가가 낮다는 평가가 뒤따랐고, 삼천리는 가치 투자 전문 운용사에서 점찍은 종목으로 거론되기도 했다.

승계 문제가 얽혀 있다는 건 상속 이슈가 해결될 때까지 최대 주주 지분 변동이 어렵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주가가 오르면 상속세, 증여세가 덩달아 늘어나 주가 상승을 달가워하지 않는 오너 일가가 많다. 대성홀딩스는 최대 주주 지분율이 72.74%에 달하고, 서울가스는 최대 주주와 자사주 지분이 75.86%다. 이어 선광(61.69%), 삼천리(54.67%), 세방(50.56%), 다우데이타(66.91%), 다올투자증권(28.38%), 하림지주(64.93%) 등도 최대 주주 관련 지분율이 높아 시중에 풀린 주식 수가 한정적이다. 시장에서 주식을 계속 사들이면 주가가 오르는 게 가능했던 이유다.

미지의 존재였던 ‘검머외(검은 머리 외국인)’, 지금은 꾸미기 쉬워

계속 주식을 사야 하는 굴레에 빠진 이들은 ‘빚투’를 활용했다. 고액 자산가들을 끌어모으고, 이들 계좌로 신용거래, 차액결제거래(CFD) 등을 활용해 최대한 빚을 내 계속 투자하게 했다. 어마어마하게 커진 자금으로 특정 주식을 계속 사들였고, 주가가 천천히 올랐다. 

주가조작 일당에게 CFD는 레버리지 활용처이자 정체를 숨길 수 있는 최고 수단이었다. CFD 계좌로 주식을 거래하면 외국인이 매매한 걸로 찍힌다. 실제 주식을 산 건 라씨 일당이지만, 외국계 증권사가 저평가 우량주를 매집하는 것처럼 보이도록 만들 수 있는 셈이다. 

매도 물량을 쏟아낸 SG증권은 주문 처리 창구에 불과하다. 현재 CFD 거래는 두 단계를 거친다. CFD 이용 고객이 국내 증권사에 주문을 넣으면, 국내 증권사와 계약한 외국계 증권사가 여러 주문을 모아 거래소에 접수하는 구조다. 어떤 주체가 거래했는지 알 수 없어 ‘깜깜이 거래’라는 지적을 수급 세탁에 이용한 것이다. 

SG증권이 국내 증권사와 계약을 맺은 CFD 계좌 창구라는 게 알려지기 전까지 ‘SG증권이 특정 주식을 매입한다’는 말이 나오기도 했다. 국내 증시에서는 ‘외국인 수급이 유입됐다’라는 걸 긍정적 신호로 해석하는데, 여기에 꼬인 개미도 있을 것이다.

수수료 수취 방식도 진화…룸살롱 대신 골프연습장, 마라탕집 등 활용

자금 세탁 방식도 양지로 올라왔다. 라씨 일당은 차명으로 마라탕집, 골프연습장 등을 직접 차려 운영한 것으로 전해진다. 고객들은 이들이 운영하는 가게에서 골프 레슨비로 수천만원을 결제하거나 마라탕과 술값으로 수백만원을 결제하며 수수료를 납부했다. 감독 당국이 알아차릴 수 없었던 이유도 버젓이 영업 중인 마라탕집, 골프연습장에서 결제 대금이 오갔기 때문이다.

과거에는 주가조작에 동원된 계좌 간 자금 이체가 잦았고, 이를 토대로 적발하는 사례도 많았다. 하지만 지금은 주가를 올리는 데 동원된 계좌와 수수료 수취 계좌(신용카드 결제 대금이 출금되는 계좌)가 단절돼 있다. 이 때문에 현실적으로 금융 당국이 적발하기 불가능할 것이란 분석이 나온다.

물론 이들은 고전적인 방식도 활용했다. 화려한 인맥으로 묶인 이들은 고객과 함께 해외 골프장에 투자하거나 갤러리, 연예기획사를 세우기도 했다.

유튜브, 텔레그램 통해 확산하는 미확인 정보들…당국은 늦을 수밖에

이번에 라씨 일당이 활용하지는 않았지만, 주식 정보가 다양한 채널에서 유통되는 점도 주가조작을 손쉽게 한 요인 중 하나다. 과거에는 ‘미스리 메신저’를 통한 허위 사실 유포, 혹은 언론 기사 홍보 정도에 그쳤다. 당국의 감시 시스템도 일부 채널의 ‘찌라시(지라시)’ 유통과 언론사 뉴스 체크를 기반으로 만들어졌다.

하지만 지금은 너무나 많은 채널이 활용되고, 실시간으로 감시하는 것은 아예 불가능하다. 유튜브, 텔레그램 등에서 잘못된 정보가 퍼지더라도 진원지를 찾지 못하는 경우가 허다하다. 

주주 인증을 받아야 들어갈 수 있는 토론방이나 텔레그램 채널은 아예 감시가 불가능하다. 하지만 이 분야의 허위 정보 유통이 심각하다는 것이 관계자들의 설명이다.

최근 상장폐지 실질 심사를 받게 된 한 바이오 기업은 대표이사 A씨가 주주 인증을 받아야 볼 수 있는 게시판에 ‘곧 대형 호재가 나온다. 기대하라’는 식의 글을 올리면서 주가를 컨트롤했다고 한다. 한 관계자는 “주주들만 보라 하고 허위 정보를 올리면, 이 정보가 곧바로 여러 곳으로 퍼지며 주가에도 당장 반응이 나타난다”면서 “이런 곳들은 파악조차 어렵기 때문에 당국의 조치가 늦을 수밖에 없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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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액결제거래(CFD) CFD란 실제 기초자산을 보유하지 않은 상황에서 가격 변동을 이용해 차익만 결제하는 장외 파생상품을 의미한다. 증권사가 고객에게 대출해 주고, 고객은 매매에 따른 손익만 가져가는 방식이다. 자격을 갖춘 전문 투자자만 거래가 가능하며, 최소 증거금률은 40%로, 최대 2.5배까지 대출을 일으켜 매수·매도 주문을 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