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지아 소설가
중앙대 문예창작학 박사, 
‘아버지의 해방일지’ 
‘자본주의의 적’ 저자, 
김유정 문학상 수상 사진 강민구 사진가
정지아 소설가
중앙대 문예창작학 박사, ‘아버지의 해방일지’ ‘자본주의의 적’ 저자, 김유정 문학상 수상 사진 강민구 사진가

“태어나 보니 가난한 빨갱이의 딸이었을 뿐이다. 선택할 수 있다면 누군들 빨갱이의 딸을 선택하겠는가. 할 수만 있었다면 나는 당연히 이부진이나 김태희의 삶을 선택했을 것이다.” -정지아 소설 ‘아버지의 해방일지’ 中 

“아버지가 죽었다. 전봇대에 머리를 박고”로 시작하는 정지아의 소설 ‘아버지의 해방일지’를 읽었다. 콘돔을 사러 편의점으로 질주하던 김애란의 소설 ‘달려라, 아비’ 이후로 아버지의 운동력을 이렇게 발랄하게 묘사한 작품은 처음이었다. 지리산 빨치산 출신의 전향한 사회주의자 아버지와 최후의 남부군 생존자 어머니가 농사지으며 사는 이야기는 책갈피에 머리를 박고 ‘오열할 정도로’ 웃기다.

김지수 마인즈 커넥터(Minds Connector)
전 조선비즈 문화전문기자, 
‘이어령의 마지막 수업’ 
‘위대한 대화’ 저자
김지수 마인즈 커넥터(Minds Connector)
전 조선비즈 문화전문기자, ‘이어령의 마지막 수업’ ‘위대한 대화’ 저자

“누가 봐도 유머일 수밖에 없고 유머여야 하는 순간에도 내 부모는 혁명을 목전에 둔 혁명가처럼 진지했고, 그게 사람들의 웃음을 자아냈다”라고 그는 쓰고 있다. 이를테면 사정이 딱해 보이는 방물장수를 무조건 집에 재우려는 아버지와 어머니의 대화.

“우리 집이 방이 왜 없어? 야랑 자면 되잖애?”

“베룩(벼룩)이라도 옮으면 워쩔라고.”

“자네. 지리산서 뭣 헐라고 목숨을 걸었능가? 민중을 위해서 아니었능가? 저이가 자네가 목숨 걸고 지킬라 했던 민중이여, 민중!”

정지아는 방물장수 하룻밤 재우는 일에 민중을 끌어들이는 아버지나, 그 말에 꼬리를 내리고 찬장에 모셔둔 새 접시를 꺼내는 어머니, 그 민중이 옮기고 간 벼룩 자국에 허벅지를 벅벅 긁는 딸 사이를 오가며, 거리를 두고 이 희비극을 완성해 냈다. 민담 같기도 하고, 만담 같기도 한 시골뜨기 사회주의자 부모의 생애사를 읽으며, 나는 크게 위로받았다.

2011년 고향인 구례에 둥지를 튼 화제의 베스트셀러 작가를 만나러 기차를 타고, 남도로 떠났다. 햇빛이 은어 비늘처럼 반짝이는 섬진강변을 달려 통창이 시원한 작가의 시골집으로 들어섰다. ‘빨갱이 아버지’가 조선 미디어에 나오다니 격세지감이라며, 그가 웃었다. 초여름, 섬진강에 뜬 물별만큼이나 은은한 미소였다.

정지아 소설가. 
사진 강민구 사진가
정지아 소설가. 사진 강민구 사진가

당신은 누구의 딸인가.
“아버지의 딸(웃음). 아버지랑 공통점이 더 많다.”

어머니는 어떤 분인가.
“똑똑한 분이다. 국졸이었지만, 아버지는 어머니를 엘리트주의자라고 놀렸다. 아버지보다는 오지랖이 덜하셨고 민중보다는 딸을 더 사랑하셨다. 어머니에겐 딸이 이념이었다.”


정지아의 어머니 이옥남은 지리산에서 활동했던 남부군이었다. 98세로 현재 유일한 생존자. 읍내에서 혼자 개밥처럼 거칠게 드시는 게 안타까워, 곁으로 모셔 왔다고 했다. 아버지 정운창은 전남도당 조직부부장이었다.


소설을 읽으면서 정말 많이 웃었다. 신자유주의 시대에 불시착한 ‘빨치산 가족 시트콤’처럼 읽혔다. ‘출생의 비극’을 이토록 적절하고 따뜻하게 거리를 두고 회복해 내다니, 놀랍다.
“(담담하게) 빨치산의 자식들은 사는 게 투쟁이었다. 소설 ‘남부군’ 쓰신 이우태씨는 나보다 더 상상할 수 없는 고초를 겪었다. 그분 아버지가 사회안전법 생기기 전에 2~3년 살다가 아이를 낳았는데, 전향을 안 해서 다시 감옥으로 들어갔다. 아들 입장에서는 아버지가 자기를 버리고 사상을 택한 격이니, 오죽 상처가 컸겠나. 사람들은 이문열 선생도 사람들은 우파라고 비난하는데 나는 ‘오죽하면 그랬을까’ 싶다. 당해보지 않으면 모른다. 이문열 선생도 남로당 고위 간부였던 아버지가 자신을 버리고 월북했다. 가서 성공한 것도 아니고 숙청을 당했다. 그러니 간첩만 내려오면 끌려가고⋯. 나는 이문열 선생이 서울대 사범대에 간 걸 생각하면 눈물이 난다.” 


정지아의 입에서 발화된 ‘오죽하면’이라는 부사 위로 그의 아버지의 말이 스르르 감겼다. “가가 오죽하면 글겄냐?”는 ‘아버지의 해방일지’에서 건진 가장 아름다운 한국말이었다.


서울대 사범대에서 눈물이 왜 나나.
“그 당시 중학생이었던 나도 연좌제에 걸려서 내 미래에 답이 없다는 걸 알았다. 그러니 이문열이 서울대 사범대를 나와서 뭘 할 수 있었겠나. 그렇게 존재를 외치고 한 학기 만에 휴학을 한 거다. 어찌 보면 1970년대 한국문학의 부흥은 연좌제가 만들었다. 이문열, 김원일, 김승옥, 이문구, 김성동, 조정래⋯, 좌파의 자식들은 세상에 나와서 예술밖에는 할 게 없었다. 돈 안 들어가는 예술이 글밖에 없으니, 글쓰기 말고는 할 게 없었다.” 


아버지가 자식에게 내어준 세상의 출구가 글밖에는 없었다는 말이 아프게 명치를 찔렀다. 사상범의 가족 또는 친족의 사회 활동을 제한하던 연좌제는 1980년 정지아가 중학교 3학년 때 폐지됐다.


책에서 당신의 아버지는 혁명가라기보다는 좋은 어른처럼 보였다.
“좋게 말하면 혁명가고 나쁘게 말하면 반란군인데, 아버지는 이념으로 선택한 게 아니라 사람으로 살고 싶어서 택한 일이었다. 아버지가 의지적이었던 것에 반해, 어머니는 상황을 따라갔다. 시집갔더니 남편이 빨갱이였고, 여순 반란 사건 때 산으로 따라 들어가 임신을 했다. 12월에 산달이 돼 내려왔더니 가족도 외면해서 친척집 전전하다 애 낳자마자 산으로 쫓겨났다더라. 

다들 살려고 상황에 휩쓸려다녔다. 이념의 실체를 모르는 사람들이 무슨 사회주의 활동을 했겠나. 방물장수 하루 재워주는 거, 집 앞 눈 먼저 쓰는 거, 궁한 사람 돈 빌려주는 거⋯, 적어도 내가 겪은 빨갱이 부모는 그런 것들을 사회주의의 실천이랍시고 했다. 사람의 도리를 하겠다는 거였지.” 

최근에 ‘어른 김장하’라는 다큐멘터리에서 누군가 그분을 ‘빨갱이’라고 욕설하는 장면이 담겼다. 문득 우리 시대의 어른은 모두 이데올로기에서 자유롭지 않았을 거다.
“그럼에도 진짜 어른은 이데올로기에 얽매이지 않는다. 좌우에서 보아도 좋은 사람이다. 내 아버지는 깨어있는 사람이고, 편견 없는 평등주의자였다. 인간이 선택할 수 없는 것에 너그러우셨다. 코흘리개 코부터 닦아주고, 못생기고 더러운 아이들부터 챙겼다. 예쁜 애 예뻐하는 건 누구나 할 수 있다고. 아버지처럼 편견 없는 평등주의자로 사는 건 쉽지 않다. 정치는 진보인데 자기 이익을 포기 못 하는 사람이 얼마나 많나. 그러면 또 그 주장이 얼마나 초라한가. 자신이 뱉은 말대로 살기가 그만큼 어렵다.”

당신 이름 지아는 지리산과 백아산에서 딴 이름이라던데, 매우 울창한 이름이다.
“지혜 지(智), 나 아(我) 자다. 부모가 자신의 지향을 담아 지은 이름이지. 엘리트주의자의 센 고집이 다 들어가 있다(웃음).”


지리산 밑에 들어오니 산이 아(我)를 품었다고 했다. 나라는 중력을 버리고 나니 가볍고 산뜻한 가족사가 떠오르더라고. 


지리산에 치유의 힘이 있는 걸까.
“하하. 구례에 와서 배운 게 많다. 살아 보니 내가 옳다고 생각했던 것, 아름답다고 생각했던 것, 하찮다고 생각했던 사람의 다른 모습이 보인다. 내가 생각했던 게 100% 옳지 않았다. 학교 문예창작 수업에서는 자기 상처를 다 드러내라고 한다. 그런데 남의 상처를 들여다보면 그 고통의 깊이가 다 천차만별이다. 내 부모가 사상범이라는 건 정치적 지향의 문제지만, 이상한 종교에 빠진 엄마부터 폭력적이고 차별적인 아버지까지, 듣고 보니 세상 자식들의 괴로움은 끝이 없었다. 대학에서 만난 친구, 가르치던 제자들을 보면 어린 시절 애착이 온전치 못해 내면이 파헤쳐진 이들이 많았다.” 


그 자신, 세상과의 불협화음은 있었지만, 부모의 지극한 사랑을 받아서 내면은 탄탄하다고 했다. 세상과의 불화를 삭혀낸 ‘빨치산의 딸’ ‘숲의 대화’ 등 정지아의 전작 소설은 동인문학상, 이상문학상 빼고 웬만한 문학상은 다 받았지만, 오랫동안 독자의 사랑은 못 받았다. 


좋은 이야기도 읽어줄 시대를 만나야 꽃이 피는 것 같다.
“어찌 보면 나는 진정성이 사라진 시대에 계속 진정성을 붙잡고 있었던 거다(웃음). 요즘은 경쟁이 심하고 자기 삶이 고달파서, 다들 지금 여기가 아닌 곳으로 데려다주길 바라잖나. 하지만 난 문학이 언제까지 가벼우랴⋯ 하는 마음을 놓지 않았다. 그래도 ‘아버지의 해방일지’가 이렇게 뜨리라고는 상상도 못 했다.”

‘가가 오죽하면 글것냐?’ 이 문장에 마법이 있다고 생각한다. 청년들은 이렇게 다 받아주는 어른이 고팠던 게 아닐까.
“그런데 구례에는 아버지 같은 분이 많다. 아버지 장례식장에 전복죽 끓여오는 떡집 언니도 그중 하나다. 실존 인물이고 허락받고 책에 썼다. 우리 어머니 전남편의 친척인데, 평소에도 음식을 바리바리 싸들고 와서 늙은 내 어머니를 봉양한다. 

부침개 좋아하는 어머니를 위해 한 장씩 다섯 종류의 전을 부쳐온다. 나는 깻잎 몇 장도 씻기 싫어 꾀를 내는데, 몇천 장의 깻잎을 다 씻어서 밑반찬을 만들어 오는 거다. 정말 신기했다. 대체 남을 위해 저러는 마음은 뭘까⋯.”

혈연관계도 아닌데.
“미스터리다. 불편한 마음 들까 봐 돈으로 헤아릴 수 없는 선물을 한다. 찬찬히 보고 필요한 게 뭘까를 찾아서, 쓱 준다. 그 자애로움을 온전히 받아들이다 보니 나도 조금씩 사람이 되고 있다. 그러니까 이곳은 내 것을 내어주는 사람이 많은 거다.”

그분들은 대체 왜 그러나.
“자기가 받았기 때문 아닐까. 은혜를 갚아야 한다는 마음으로⋯.”


게다가 온 마을 사람이 왜 그렇게 다 웃긴가. 얼어 죽고 굶어 죽는 고통을 견뎠던 전직 빨치산이 고추밭 김매는 2시간을 못 견디고, 노동이 혁명보다 더 고통스럽다고 고백하는 장면에서 배꼽을 잡았다. 


한여름에 권총 자살했다고 신문에 난 앵커 처벅이 퍼벅으로, 펄벅으로 전도돼서 자존심을 건 싸움이 되는 장면도 웃기고 서글펐다.
“실제로 우리 작은아버지가 꼭 신문을 잘못 봐서 낭패를 보시곤 했다. 나는 얘기를 재밌게 하는 스타일은 아니고. 다만 보통 사람들이 생각하는 소설가에서 좀 벗어나 있는 것 같다. 권위가 없달까. 그런데 알고 보면 무학의 소설가가 더 짱이다. 기대를 깨는 웃음의 바이브를 안달까.”

혹 당신도 부모님처럼 유물론자인가.
“(미소 지으며) 좀 다른 의미로 유물론자가 아니다. 나는 물건을 싫어한다(웃음). 물건 대신 사람을 모으는 것 같다. 5000원짜리 몸뻬 바지에, 양말도 누가 벗어놓고 간 것 빨아서 신는다.”

아…, 정말 물욕이 없나.
“돈 벌면 갖고 싶은 게 뭘까를 생각해 본 적이 있다. 조니워커 블루 향을 좋아하고 에르메스 디자인이 취향에 맞지만, 가격을 보면 ‘으흥’이다. 뭘 사달라고 해본 적도 없다. 무슨 말이냐 하면 나는 이 책이 뜨기 전에도 좋았다. 부족하지 않았다. 대학 문예창작과 강의를 나가고 있는데, 운전을 좋아하니 교수보다 택시 운전사를 해볼까 진지하게 고민도 했다. (동의를 구하듯) 소설가보다 택시 기사가 더 멋있지 않나.”


물욕도 편견도 권위도 없어 태평한 정지아의 얼굴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편견만 내다 버려도 삶의 지경이 태평양처럼 넓어지는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