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영환 작가가 자신의 작업실에서 작업하고 있다. 
사진 정영환
정영환 작가가 자신의 작업실에서 작업하고 있다. 사진 정영환

경기도 의왕시의 한 지식산업센터. 바쁘게 오가는 트럭, 굳게 닫힌 철문이 줄줄이 있는 삭막한 사무실이 일순간 숲으로 변신했다. 여느 사무실과 다를 것 없는 420호 문이 열렸기 때문이다.

연지연
조선비즈 생활경제부
아트콘텐츠팀 기자
연지연 조선비즈 생활경제부 아트콘텐츠팀 기자

물건을 상하차하던 트럭 운전사, 분초를 따지며 납품에 신경 쓰던 업체 사장이 잠시나마 숨을 쉬려고 다가온다. 일상에 지친 이들이 커피 한잔하면서 잠시 쉬어가는 곳. 이곳은 바로 정영환 작가의 아틀리에다.

정영환 작가는 ‘푸른 숲’ 작가라는 별칭이 따라붙는다. 하얀 캔버스에 파란색으로 그린 나무와 숲이 그의 트레이드 마크다. 초록색이 아닌 파란색으로 나무를 그리면서 작가는 관객에게 새로운 세상을 선물하고 싶다고 했다. 동네 뒷산 어딘가에 있을 법한 나무지만 비현실적인 느낌으로 몽환과 치유를 넘나들게 하겠다는 의도다.

그의 손에서 탄생하는 숲은 요즘 여기저기서 자주 만나볼 수 있다. 과거엔 상업적이라고 생각해서 다양한 컬래버레이션(협업) 작업을 거부했지만, 생각이 바뀌었기 때문이다. 최근엔 현대차와도 의미 있는 협업을 했다.

“국내 미술 시장이 달라졌다. 해외에도 적극적으로 진출하고 관람객과 접점도 늘려야 할 때다. 한국 작가들의 저력을 보여줘야 할 때라고 생각한다.”

자신이 그린 푸른 숲 앞에서 포즈를 취하고 있는 정영환 작가. 사진 정영환
자신이 그린 푸른 숲 앞에서 포즈를 취하고 있는 정영환 작가. 사진 정영환

요즘 협업한 작품이 자주 보인다. 최근 가장 신경 쓴 작업이 있다면.
“현대차 제네시스와 협업하는 것에 신경을 많이 썼다. 2023 서울모빌리티쇼에 제네시스가 엑스(X) 콘셉트 시리즈 중 제네시스 엑스 컨버터블을 소개하는데, 그 배경으로 작품을 넣게 됐다. 한국의 사계절을 생생하게 느낄 수 있게 하는 데 주력했다. 그림을 디지털아트로 바꾸는 과정은 물론 다양한 이해 관계자를 만족시키는 모든 작업이 흥미로웠다. 전시와는 또 다른 성격의 작업이었다.”

현대차와 협업하게 된 계기가 있을까.
“고맙게도 제의가 먼저 왔다. 자연을 재료 삼아 그리면서도 한국적이라는 평가를 받아서가 아닐까 생각했다. 내 작품은 동양화가 아닌데도 종종 청화백자(순도 높은 백자에 청색의 코발트 안료로 무늬를 그리고, 그 위에 투명 유약을 입혀 구워낸 도자기) 같다는 평가를 들었다. 한국적 느낌이 든다는 뜻이다. 아마도 흰색 캔버스에 파란 숲을 그려서인 것 같다.”


현대차는 정의선 현대차그룹 회장의 지시로 지난해 말부터 ‘제네시스’라는 브랜드를 강화하는 데 힘써왔다. 브랜드 헤리티지(브랜드의 역사와 스토리 등 고유의 가치)를 만들어 차별화하는 방식으로 프리미엄 브랜드로 거듭날 수 있다는 계산에서다. 고민 끝에 정한 제네시스의 헤리티지는 바로 한국적인 것. 기와(남색), 두루미(하얀색), 단청(주황색) 등을 내외장재로 사용한 것도 이 때문이다.


왜 하얀 바탕에 파란 숲인가.
“관람객의 상상을 자극하고 싶어 배경을 생략했다. 그러다 보니 바탕이 흰색일 수밖에 없었다. 여기에 파란색을 쓴 것은 가장 좋아하는 색이어서다. 파란색을 좋아한 작가는 많았다. 우리나라에선 김환기 선생이 대표적이고, 모노크롬 회화의 창시자로 불리는 프랑스의 이브 클라인도 그랬다.

푸른색은 다양한 개성이 있다. 차갑기도 하고 신비하기도 하고 화려하다. 동시에 차분하고 단순하고 안정감을 준다. 내 숲을 보며 다양한 감정을 느끼길 바라는데, 가장 적합한 색이라고 생각한다.

초록 숲은 익숙하지만, 파란 숲은 좀 생경하다. 하지만 어딘가 꼭 있을 법한 나무와 숲 아닌가. 여기에서 관람객이 많은 감정을 느꼈으면 한다. 희망과 슬픔, 낯설고 신비롭고 아름다운, 그 중간 어딘가.”

늘 나무를 그리는 이유가 있나
“아버지 덕분이다. 뇌졸중으로 아버지가 쓰러지신 이후로 부모님을 경기도 양평에 모셨다. 가는 길은 온통 산과 들이다. 아버지도 자연의 품에서 산과 들을 보고 계신다. 아버지가 자연을 보면서 힘을 내시길 바랐고, 동시에 나는 자연을 보면서 위로받았다. 그 위로를 공유하고 싶었다. 아버지를 모신 이후로 그린 작품이 ‘그저 바라보기’ 시리즈다.”

작품 속 나무와 숲이 잘 관리된 프랑스 정원 같기도 하고 숲 같기도 하다.
“내 작품은 구상화(실재할 법한 대상을 그린 회화)다. 어딘가 있을 숲과 나무지만 실제 어느 공간을 따온 것은 아니다. 안정감을 주고 싶어 대칭으로 그림을 그리고 진짜 나뭇잎처럼 하나하나 일일이 나뭇잎을 묘사한다. 가장 작은 붓으로 잎을 그린다.”

그런데 작업실에 색깔을 입은 나무도 많다. 흰색과 파란색을 고집하는 줄 알았는데.
“관람객에게 다양한 감정을 느끼게 해주고 싶다. 배경을 분홍색으로 바꾸고 나무에 노란색을 입혀 보니 해석이 여러 가지로 나왔다. 일출이라는 사람, 일몰이라는 사람, 봄이라는 사람, 가을이라는 사람⋯. 그 다양한 감정이 좋다.”

드라마에 작품을 걸었나.
“이번이 처음은 아니고 두 번째다. 작년 3월에 종영한 TV 드라마 ‘신사와 아가씨’에도 작품이 나왔는데, 이번에는 KBS 일일 드라마 ‘비밀의 여자’ 세트장에 작품 몇 점을 걸었다. 이런 활동을 상업적이라 여기고 부정적으로 생각한 때가 있었다. 2013년인가, 도자기 업체에서 내 그림을 활용하고 싶다고 했는데 그때 거절했던 건 이런 생각 때문이었다. 하지만 생각이 달라졌다. 

우연한 기회에 영부인의 옷으로 조명받은 적 있는데, 이런 생각의 변화 덕분이었던 것 같다.”


정영환 작가의 푸른 숲은 2017년 김정숙 전 여사의 상의에 담겼다. 패션 디자이너 양해일이 2015년 수원시립미술관 개관 기념 특별 행사인 ‘아트 콜라보 패션쇼’에 정 작가와 협업해 의상을 선보였는데, 이 의상이 나중에 영부인의 의상이 됐다.


해외 전시 계획도 있나.
“6월에 프랑스 파리에서 국내를 대표하는 작가들과 함께 전시를 연다. 갤러리엠나인이 프랑스에 설립한 FDA(La fontaine des Artistes·작가들의 샘)와 한불상공회의소가 공동 주최·주관하는 ‘Somme des parties: Récupéation et Unité(부분의 합: 회복과 결속)’ 전시 작가로 참여하게 돼서다. 8월에는 벨기에로 자리를 옮겨 전시를 개최한다. 올해 목표는 프랑스와 벨기에 전시를 포함해 올해 예정된 모든 전시를 잘 마무리하는 게 목표다. 한국 미술이 해외로 뻗어나가는 데 역할을 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