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조선사들은 명실상부 세계 최고의 위상을 자랑한다. 특히 액화천연가스(LNG)선 수주는 국내 조선 3사(HD현대중공업·삼성중공업·한화오션)를 따라올 적수가 없다. 클락슨리서치에 따르면, 올해 1분기 전 세계에서 발주된 LNG선 가운데 90%를 우리 조선 3사가 수주한 것으로 나타났다. 그러나 ‘최강 경쟁력’을 가진 우리 조선 3사에도 LNG 화물창 기술만큼은 여전한 난제다. 화물창 기술은 초저온 상태로 액화된 가스의 기화를 막아 안전하게 운송하도록 돕는 핵심 기술이다. 그중에서도 선체 내부와 일체로 제작되는 멤브레인 방식의 화물창이 가장 많은 양의 LNG를 실을 수 있어 효율적이며 안전성이 뛰어나다고 평가받는데, 이 시장을 프랑스 가즈트랑스포르 에 테크니가즈(GTT)가 사실상 독점 중이다. 국내 조선 3사도 라이선스 계약을 맺고 LNG선 1척을 건조할 때마다 100억~200억원을 GTT에 지불하고 있다.
최근 조선 3사에 희소식이 전해졌다. GTT에 지불하던 기술 라이선스 사용료 중 상당 부분을 절감할 수 있게 된 것이다. 4월 13일 대법원은 GTT가 공정거래위원회(이하 공정위)를 상대로 제기한 행정 소송에서 최종적으로 공정위의 손을 들어줬다. 그동안 GTT는 LNG 화물창 기술 라이선스를 제공하면서 ‘기술 지원’을 함께 끼워팔아왔는데, 이를 불공정 행위로 보고 공정위의 과징금 처분 및 시정 명령이 정당하다고 판단한 것이다.
5월 8일 서울 중구 법무법인 광장 본사에서 송평근(사법연수원 19기) 대표변호사와 한종연(38기) 변호사를 만났다. 광장은 이번 사건에서 공정위의 이해 관계인인 조선 3사를 대리했다. 공정위 측 대리는 법무법인 지평이, 상대편 GTT 측 대리는 김앤장 법률사무소가 맡았다.
“라이선스 사려면 기술 지원도 받아야”
GTT는 1994년 가즈트랑스포르(Gaztransport)와 테크니가즈(Technigaz)가 합병돼 만들어진 회사다. 전체 매출 90% 이상이 LNG 화물창 기술 라이선스 실시료에서 나온다. 전 세계적으로 많이 사용되는 대표적인 LNG 화물창 기술은 GTT와 노르웨이 MOSS가 보유하고 있다. 공정위에 따르면, 2000년까지는 MOSS의 독립 지지형 화물창을 적용한 선박이 더 많았으나 이후 GTT의 멤브레인형 화물창이 훨씬 더 보편적으로 쓰이고 있다. 현재 전 세계 LNG 선박 시장에서 GTT 점유율은 80%에 육박하는 것으로 추산된다. 국내 조선 3사도 GTT와 기술 라이선스 기본계약(TALA)을 맺고 20년 넘게 관계를 유지 중이다. TALA 기간은 통상적으로 6년이며 계약 종료에 관한 서면 통보가 없는 한 5년 더 연장된다. GTT와 TALA를 맺은 조선사들은 화물창 기술을 이용해 LNG 선박을 건조하고 이를 전 세계 어디서나 판매할 수 있는 비배타적 권리를 부여받는다.
그런데 GTT가 라이선스 계약을 맺으면서 기술 지원 서비스까지 함께 판매하며 문제가 됐다. 조선사가 선주와 선박 건조 계약을 체결하면 GTT가 해당 선박에 필요한 세부 설계 및 분석, 계산 노트 및 도면 작성 등 기술 지원 작업을 해 조선사에 제공한 것이다. 조선 3사는 기술 지원은 반드시 필요한 게 아니니 라이선스 제공과 분리해달라고 GTT에 요구했다. 2015년 한화오션(옛 대우조선해양)이 가장 먼저 총대를 멨다. HD현대중공업(옛 현대중공업)과 삼성중공업도 2016년, 2018년 각각 같은 주장을 했다.
그러나 3사의 요구는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공정위는 결국 GTT의 끼워팔기가 공정거래법상 시장지배적 지위 남용 행위 및 불공정거래 행위에 해당된다며 2020년 11월 시정 명령과 과징금 125억2800만원 납부 명령을 내렸다. GTT는 즉각 서울고등법원에 행정소송을 제기했다(공정위 처분에 관한 불복의 소는 고등법원이 1심 관할법원이다).
광장 “조선 3사 기술력 有…경쟁 기회 줘야”
공정위의 조사 단계에서부터 조선 3사를 대리한 광장은 GTT의 행위가 공정거래법 위반에 해당한다는 사실을 다각도로 규명했다. GTT가 라이선스와 기술 지원을 별개로 나눠서 팔 수도 있는데 끼워팔기를 한 것인지, 또 기술 지원 판매의 강제성 때문에 시장 경쟁이 제한됐는지 여부가 쟁점이었다. GTT는 ‘수요가 없다’는 논리를 내세웠다. 즉 멤브레인형 LNG 화물창 기술 지원을 조선사로부터 구매하려는 선주들의 수요가 없었으므로 기술 지원이 별개의 상품이 될 수 없다는 것이었다. 수요가 없다는 논리는 시장 경쟁 제한을 반박하는 근거로도 쓰였다. 기술 지원은 별개의 시장이 아니기 때문에 경쟁 제한 자체가 성립되지 않는다는 취지였다.
광장은 이 논리를 정면 반박했다. GTT가 끼워팔기 관행을 오랜 기간 유지했기 때문에 기술 지원을 조선사로부터 구매하겠다는 수요가 아직 실현된 적은 없으나 그런 이유로 ‘선주의 수요가 없다’고 단정해선 안 된다고 주장했다. 조선사들은 다년간 LNG 화물창 건조 경험을 축적해 스스로 기술 지원을 수행할 수 있다고 판단한 상태였다. 적어도 ‘잠재적 공급자’ 정도로는 볼 수 있으니 기술 지원 시장에 뛰어들 기회는 줘야 한다고 광장은 주장했다.
이 과정에서 GTT는 조선 3사의 기술력을 문제 삼기도 했다. 조선사들이 기술 지원을 직접 할 경우 안전성에 문제가 생길 수 있다며, 라이선스와 기술 지원의 통합 판매는 특허권의 정당한 행사 범위 안에서 이뤄졌다는 취지로 주장했다. 송 대표변호사는 “조선 3사의 기술 지원이 안전한지 여부를 판단하는 것은 선주의 몫”이라며 “GTT는 시장 참여자 중 하나일 뿐, 안전성을 판단하고 감독할 권한은 없다”고 말했다. 실제로 공정위가 선주들을 대상으로 실시한 설문 조사에서는 조선 3사가 기술 지원을 직접 할 경우 조선사에 발주할 의사가 있다는 응답이 다수 나왔다. GTT 같은 수준의 품질 및 계약 조건 등을 제공한다면, 얼마든지 조선 3사에 기술 지원을 맡길 수 있다는 것이었다. GTT 측에서 증인으로 신청한 해외 선박 전문가들도 되레 조선사와 공정위 쪽에 유리한 증언을 한 것으로 전해졌다. 그 외에 GTT가 합병 법인이 되기 전의 라이선스 계약 관행도 광장에 유리한 근거가 됐다. 한 변호사는 “GTT의 전신인 테크니가즈는 두 개를 따로 분리해 계약하는 관행이 있었는데, 합병되고 나서부터는 TALA라는 이름으로 라이선스와 기술 지원을 붙여서 팔았다”며 “이 점을 근거로 GTT의 주장이 옳지 못하다는 논리를 폈다”고 말했다.
라이선스 이용료 척당 최대 200억⋯상당 부분 절감할 듯
지난해 12월, 서울고등법원은 GTT가 공정위를 상대로 낸 시정 명령 등 취소 소송에서 공정위의 손을 들어줬다. 법원은 GTT가 라이선스 내용에 포함되지 않은 기술 지원 서비스까지 구매하도록 조선 3사에 강제한 행위가 지식재산권의 정당한 행사에 해당하지 않는다고 봤다.
또 GTT의 행위로 시장 경쟁이 저해됐다고 판시했다. 광장에서 주장한 내용을 대부분 받아들인 것이다. 과징금 납부 명령 중 일부는 취소했다. 대법원에서 GTT의 상고를 심리불속행으로 기각함에 따라, 이제 GTT는 조선사가 원할 경우 라이선스와 기술 지원을 별개의 상품으로 분리해 판매해야 한다. 그동안 베일에 싸여있던 라이선스 이용료와 기술 지원료의 비율도 앞으로는 공개될 전망이다. 조선사가 100억~200억원에서 얼마를 절감하게 될지도 알 수 있을 것이다. 송 대표변호사는 “이번 판결은 GTT가 시장 경쟁을 인위적으로 막지 못하도록 제동을 걸었다는 데 의의가 있다”며 “역량 있는 후발 주자에 기회 자체도 부여하지 않는다면, 특정 업체만 영구히 시장을 독점하는 결과를 낳을 수 있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