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 셔터스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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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故) 김우중 대우그룹 창업자는 세계 경영에 앞장선 우리나라 대표 기업인이다. ‘세계는 넓고 할 일은 많다’는 1989년 발간된 그의 자전적 에세이집 제목이다. 이 책은 발간 직후 6개월 만에 100만 부가 매진되며 당시 최단기 밀리언셀러를 기록했다. 

책은 성장의 새로운 활로를 찾던 우리 경제와 국민에게 세계로 나아갈 길을 보여줬다. 당시 그는 이미 1년에 250일 이상을 해외에서 보낸다는 소문이 날 정도로 국제 비즈니스 전문가였다. 특히 대우라는 기업이 국제적으로 주목받은 것은 1990년대 동서 냉전이 끝나고 세계적인 경제 통합이 이뤄지던 시기였다. 그는 폴란드, 헝가리, 체코, 슬로바키아 등 새로 문이 열린 동유럽 국가들에 적극적으로 투자해 우리 경제의 새로운 시장을 개척했다. 당시 자본과 기술이 부족했던 체제 전환국들은 대우를 적극적으로 환영했고 한국 기업들은 해외시장을 확대하는 새로운 계기를 얻었다.

윤덕룡
KDI 초빙연구위원
전 한반도평화연구원 원장
윤덕룡 KDI 초빙연구위원
전 한반도평화연구원 원장

1990년 기준 서방 진영의 대표 격인 국가 간 협의체인 주요 7개국(G7)은 세계 국내총생산(GDP)의 50%, 세계무역의 60%를 차지하고 있었다. 당시 사회주의 국가 간 경제협력체였던 코메콘(COMECON·상호경제원조회의)은 1990년 기준으로 세계 GDP에서 약 10.1%, 세계무역에서는 약 13.6%를 차지하는 데 머물렀다. 특히 사회주의 국가의 리더였던 소련의 GDP는 세계 GDP의 3.4%를 차지했고 중국은 1.8%에 불과했다. 그러나 사회주의 국가들이 체제 전환을 시작하고 동서 냉전이 종식되면서 세계시장이 통합됐고 세계경제성장률이 빠르게 높아졌다. 기존 서방 진영에 쌓여있던 자본이 구사회주의 국가들에 투자되고 새로운 기술이전이 이뤄지며 구사회주의 국가들이 비약적으로 성장했다. 서방 진영 국가들도 새로운 시장으로 진출하는 기회를 얻었기 때문에 세계경제성장률은 전반적으로 증가했다. 국제통화기금(IMF)에 따르면 1980년대에 세계경제 평균 성장률은 3.2%에 불과했으나 1990년대 후반에는 3.3~4.5%, 2000년대에는 3.0~4.7%에 달했다.

성장률 제고의 혜택을 상대적으로 많이 누린 곳은 구사회주의권 국가들이었다. 서방 국가의 자본과 기술을 받아들여 경제개발과 압축 성장을 이룰 수 있었기 때문이다. 대표적인 국가가 중국이다. 중국은 1990년 세계 GDP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1.8%에 불과했으나 2021년에는 18.4%를 차지해 미국에 이어 세계 2위의 경제력을 갖게 됐다. 반면, 서방 국가들은 경제 발전 수준 성숙화와 고령화 등으로 세계에서 차지하는 상대적인 경제력 비중이 오히려 작아졌다. 미국은 여전히 세계 1위 경제 대국이지만 1990년 세계 GDP의 33.2%를 차지하던 수준에서 2021년 24.8%로 그 비중이 낮아졌다. 

한국은 1990년 이후 다른 서방 국가들과 달리 경제력이 크게 성장했다. 한국은 1990년 세계 GDP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0.7%에 불과했지만 2021년 1.8%로 증가하여 세계 10대 경제 강국으로 올라섰다. 경제성장의 원동력은 무역이었다. 1990년 세계무역의 1.2%를 차지하던 나라에서 2021년에는 2.6%를 차지하여 세계 8위를 차지했고 2022년에는 6위로 올라섰다. 동서 냉전이 끝나고 세계화 시대로 접어들던 과정에서 대우그룹을 비롯한 한국의 모든 기업이 적극적으로 세계 경영에 뛰어든 결과다.

지금까지 한국 경제를 견인해 온 무역이 최근 들어 도전받고 있다. 그동안 한국의 국제관계는 ‘안미경중(安美经中·안보는 미국, 경제는 중국)’이라는 말로 대변됐다. 그러나 최근 국제 정세는 더 이상 중국에 경제를 의존하기 힘들도록 만들고 있다. 수년째 지속되고 있는 미·중 간 패권 경쟁만이 아니라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이후 가속화하고 있는 세계시장의 진영화가 디글로벌라이제이션(역세계화) 추세를 만들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냉전시대 때같이 안보와 경제를 모두 미국에 의존하는 ‘안미경미(安美经美)’로 돌아갈 수도 없다. 아무리 민주주의와 자유를 가치 체계의 기반으로 하는 동맹국 간에도 기술 경쟁과 자국 일자리 확보를 위한 경쟁에서는 양보가 없는 시대가 됐기 때문이다. 미국 인플레이션 감축법(IRA)이 그 상징이다. “세계는 넓고 할 일은 많다”고 다시 외칠 방법을 생각할 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