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플라이트’ 속 장면. 사진 IMDB
영화 ‘플라이트’ 속 장면. 사진 IMDB

누구나 거짓말을 한다. 그러나 거짓말에도 ‘한계 효용 체감의 법칙’이 적용된다. 거짓말이 주는 재미와 이익은 처음엔 짜릿하지만, 더는 버틸 수 없는 임계점이 온다. 거짓말하는 자신에 대한 혐오감일 수도 있고, 거짓에 거짓을 더한 무게에 허리가 푹 꺾이는 순간을 만날 수도 있다. 인간은 양심이란 중력을 견디며 살아야 하는 존재다. ‘거짓 질량 한계의 법칙’이라고 해야 할까.

민간 항공사의 베테랑 기장 휩 휘태커는 악천후 속에서 비행을 시작한다. 난기류까지 만나지만 휩에게 그 정도는 식은 죽 먹기다. 하지만 착륙 직전 노후한 기체 고장으로 조종 불가 상태에 빠진다. 휩은 천재적인 실력과 기지를 발휘해서 비상착륙에 성공, 102명 승객 중 96명의 생명을 구하는 기적을 이루어 낸다.

김규나
조선일보·부산일보
신춘문예 단편소설 당선, 
소설 ‘트러스트미’ 저자
김규나 조선일보·부산일보 신춘문예 단편소설 당선, 소설 ‘트러스트미’ 저자

두 명의 승무원과 네 명의 승객을 잃은 안타까운 사고였지만 똑같은 조건에서 열 명의 조종사가 시뮬레이션한 결과, 열 번 모두 전원 사망을 피할 수 없었다는 사실이 밝혀진다. 휩은 영웅 대접을 받아야 마땅했다. 가벼운 상처를 입은 그가 입원해 있는 병원 앞에도, 집 앞에도 기자들이 몰려든다. 하지만 휩은 세간의 눈을 피해 숨어버린다.

그는 심각한 알코올 중독자, 마약 중독자였다. 비행이 있던 나흘 내내 술에 취해 있었다. 사고가 있던 당일에도 승무원 카트리나와 함께 술을 마시고 밤을 보냈다. 아침엔 숙취를 감추기 위해 각성제로 코카인까지 흡입했다. 52분간의 짧은 비행 중에도 몰래 보드카를 마셨다.

사고는 기체 노후와 고장 때문이었다. 술이든 마약이든 휩의 중독과는 무관했다. 휩의 탁월한 조종 실력이 아니었다면 승객 모두 사망했으리라는 것도 자명했다. 항공사도 제조사에 책임을 지우려 했고, 제조사는 항공사의 정비 불량을 탓하려 했다. 그러나 마약과 음주 비행이 알려진다면 모든 책임과 비난은 휩의 차지가 될 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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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는 관객에게 묻는다. 휩에게 책임이 있는가? 조종사는 술을 마시면 안 되지만 약물의 긍정 효과 덕에 평소보다 과감하게 실력 발휘를 할 수 있었던 것도 사실 아닌가? 그 덕분에 많은 승객의 목숨을 구했다면, 그냥 넘어가도 되지 않을까?

항공사 노조 단체가 선임한 변호사는 혈중알코올농도와 마약 복용 사실이 담긴 검사보고서를 무효화할 수 있다고 장담한다. 대신 청문회가 열릴 때까지 술과 마약 근처에는 가지도 말라고 조언한다. 그가 취해 있었다는 사실이 알려지고 그것이 사고에 영향을 미쳤다는 판결이 난다면, 휩은 여섯 명의 죽음에 대해 법적 책임을 지고 종신형을 살 가능성도 있었다. 그가 입원해 있는 동안 100통이 넘는 부재중 전화가 남겨졌다. 언론사의 인터뷰 요청들이었다. TV를 보았다면 사고 소식을 모를 리 없는 가족, 이혼한 아내와 아들에게서는 괜찮냐고 묻는 전화 한 통이 없었다. 코앞에서 죽음을 마주하고 살아 돌아왔지만 두 팔 벌려 안아주는 가족이 없다는 건 얼마나 쓸쓸한 일인가.

생텍쥐페리의 ‘어린 왕자’에 나오는 어느 별의 술주정뱅이처럼, 휩도 술 마시는 게 부끄러워 술을 마셨는지도 몰랐다. 술 때문에 망가져 버린 삶이 후회스러워서, 상실감과 수치심을 잊으려고 계속 취했다. 술로도 채워지지 않는 헛헛함은 마약으로 채웠다.

지금이야말로 끊어야 할 때다. 술 때문에 가족을 잃었는데 직업도 잃고 명예도 잃고 자유까지 잃을 판이었다. 그는 집에 있던 술과 마약을 모두 버린다. 병원에서 만난 니콜의 권유로 중독자 치료 모임에도 나간다. 하지만 그 모든 건 지금껏 수없이 반복해 온 술주정뱅이의 거짓말, 작심삼일의 자기기만일 뿐이었다.

휩에게도 추락의 트라우마를 견디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자신을 속이고 세상을 속이고 그 비밀을 지켜야 할 숙제도 그를 짓눌렀다. 점점 조여 오는 책임에 대한 압박감은 ‘죽을 목숨을 살려놓았더니 보따리를 내놓으라는 건가’ 하는 분노로 치환된다. 분노는 자신에 대한 실망의 또 다른 표현이다. 휩은 승객의 목숨을 책임진 기장이다. 한 번이라도 의무를 절감하고 책임에 숙연한 적 있었던가. 이번만 무사히 넘기면 다 잘될 거라며 휩은 또 자신을 속인다. 사고 당일, 숙취를 눈치채고 있던 부기장과 승무원에게 거짓 증언도 부탁한다. 휩은 그런 자신이 혐오스럽다. ‘술은 입에도 안 댔어, 다시는 안 마실게, 앞으로 잘할게’라며 아내와 아들에게 얼마나 자주, 얼마나 많은 거짓말을 해왔던가. 이제는 ‘내 덕에 살았으니 빚을 갚아라’며 동료들에게 거짓말을 강요하고 있었다.

내 안의 비겁한 거짓말쟁이

수치심과 죄책감은 멀리 달아나라고 속삭인다. 그러나 도망갈 곳이 없다. 휩은 청문회에 선다. 미리 짜 맞춘 각본대로 수많은 질문에 거짓으로 대답한다. 마지막 질문 하나만 남았다. 조사위원이 묻는다. “터뷸런스가 심해서 음료 서비스를 하지 않았는데 기내에서 빈 보드카 병들이 발견됐다. 당신은 카트리나가 근무 중에 술을 마셨다고 생각하는가?”

추락의 위기에서 안전벨트를 풀고 달려가 복도를 뒹구는 어린아이를 구하려다 목숨을 잃은 카트리나의 혈중알코올농도는 높았다. 그와 밤새워 마셨으니 당연했다. ‘그렇다’고 대답하면 거짓말은 완결된다. 휩은 영웅으로 거듭날 것이고 다시 조종석에 앉을 수 있었다. 술과 마약을 계속하겠지만, 그 때문에 더 큰 사고를 일으킬 수도 있겠지만, 그건 그때 가서 걱정할 일이었다.

죽은 자는 말이 없다. 카트리나가 음주근무의 오명을 쓰겠지만, 밤을 함께 보낼 정도의 애정은 있었을 테니 그의 거짓 증언을 용서해 줄지도 몰랐다. 하지만 휩은 쉽게 입을 떼지 못한다. 물을 마신다. 질문이 뭐였죠? 되묻는다. 침묵의 시간이 흐른다. 영화에 몰입하며 휩이 무사하길 바라던 관객도 함께 고민하는 순간이다. 당신이 휩이라면, 어떻게 대답할까?

‘포레스트 검프’ ‘캐스트 어웨이’를 연출했던 로버트 저메키스 감독의 2012년 작품이다. 중년의 덴젤 워싱턴이 휩을 연기했다.

파멸처럼 보이는 성공이 있다. 추락처럼 보이는 상승도 있다. 나약한 어제의 나를 죽여야 강인한 내일의 내가 태어난다. 내 안의 비겁한 거짓말쟁이를 버려야 진실한 삶의 주인공이 된다. 모르지 않는다. 말은 쉽다. 그런데 솔직해지는 건 왜 이토록 어려울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