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 단위로 이슈가 바뀌는 현재의 대중음악계지만, 올해는 4세대 걸그룹이 주도하는 부동의 한 해가 될 것 같다. 2010년대 중반부터 시작된 트와이스, 블랙핑크, 레드벨벳(트브레) 시대에 이어 4세대 걸그룹도 뉴진스, 아이브, 르세라핌의 3강으로 정리되는 분위기다. ‘트브레’ 이후, ‘뉴아르’가 정착한 것이다. 흥행과 화제성 모두 다른 그룹이나 가수가 따라오지 못하고 있다.
트브레 시대를 주도했던 기존 3대 기획사, 즉 SM, JYP, YG 소속 그룹이 없다는 게 우선 흥미롭다. SM의 막내 에스파는 ‘넥스트 레벨’ 이후 후속타가 약했다. SM 경영권 분쟁 사태로 인해 어수선한 분위기가 이어진 것도 사실이다. JYP는 트와이스 이후 잇지와 엔믹스를 연이어 내놓았지만 트와이스만큼의 힘을 얻지 못하고 있다. 대신 데이식스, 스트레이캣츠의 해외 순항에 힘입어 주가와 매출 모두 우상향을 기록 중이다. YG는 좀 복잡하다. 올해 가을 데뷔 예정인 베이비몬스터가 5월 14일 프리 데뷔곡(처음 도입된 개념이다) ‘드림’을 공개했다. K팝 걸그룹 최단기간인 129일 만에 유튜브 채널 구독자 200만 명을 돌파할 만큼 기대되는 팀이지만 ‘드림’에 쏠린 관심은 아직 미지수다. 지난해 티저나 프리뷰 같은 절차 없이 뉴진스의 ‘어텐션’이 공개와 동시에 이슈의 블랙홀이 된 걸 감안하면 밋밋해 보이기도 한다. 무엇보다 YG는 8월 블랙핑크와 재계약을 앞두고 있다.
소통 방식 바꾼 뉴아르
뉴아르는 엔터테인먼트 기업의 지형도만 바꾼 게 아니다. 아이돌 산업, 아니 음악 산업이 전체적으로 대중 지향에서 팬덤 지향으로 변화하면서 가수들의 소통 방식도 바뀌고 있다. 예능 프로그램에 출연하는 대신 유튜브 자체 콘텐츠를 제작한다. 미디어를 상대로 하는 쇼케이스나 영양가 없는 팬 미팅 대신 팝업 스토어를 개최해, 직접 팬과 접촉하지 않고도 충분한 효과와 만족도를 얻어내고 있다. 르세라핌은 ‘Unforgiven’의 발매 약 일주일 전인 4월 26일 성수동에서 팝업 스토어를 열었다. 앨범 사전 청취 기회는 물론, 관련 굿즈와 식음료(F&B)까지 즐길 수 있는 이 행사는 개최 당일부터 인파가 몰렸다. 기존 팬 사인회가 일회성으로 끝나는 반면, 팝업은 멤버가 직접 참여하지 않고도 팬을 결집시킬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이 말은 또한, 아이돌 그룹이 개별 멤버와 음악 등으로 소비되는 ‘콘텐츠’에서 팀 이미지가 소비되는 ‘브랜드’로 진화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뉴진스가 이를 강력히 증명한다.
지난해 7월 데뷔와 동시에 스타덤의 중심을 차지한 그들은 브랜드 평판에서도 꾸준히 1위를 차지해왔다. 이를 보여주듯 분야를 막론하고 각종 CF 및 앰배서더 활동을 해왔다. 이 중 눈에 띈 몇 가지 기획이 있다. 하나는 LG의 노트북인 그램. 연예인이 찍는 광고는 일반적으로 미디어를 통해 만들어진 이미지를 판매하는 행위다. 그 이미지를 제품에 동기화해 대중의 시선을 이끌면서, 제품 이미지가 결정된다. 따라서 너무 많은 CF는 이미지 소모를 가중함으로써 해당 연예인의 수명을 갉아먹기도 한다. 그런데 뉴진스의 이 광고는 연예인이 카메라 앞에서 포즈와 멘트를 취하는 일반적인 상황을 넘어서는 것이었다. 뉴진스의 앨범 커버와 뮤직비디오를 통해 또 하나의 멤버처럼 여겨지는 마스코트, 토끼(Tokki)를 노트북 커버에 새겨 넣은 제품을 출시한 것이다. 전통적으로 홍보와 마케팅에 있어서 낮은 평가를 받아온 LG답지 않은 결정이었다. 그 결과 그램 뉴진스 에디션은 애플 신제품 급의 관심을 받았다. 순식간에 완판됐다. 리셀 시장 가격도 천정부지로 올랐다. 캐릭터를 활용한 이 기획은 또 한 번 이어졌다. 맥도날드와 광고 계약을 체결하면서 종이컵과 감자튀김 포장지에 맥도날드 로고 대신 토끼가 등장했다. 맥도날드 로고가 브랜드 세계에서 차지하는 상징과 가치를 생각한다면, 대단히 파격적이다.
아티스트와 기업의 컬래버 격상
지난 4월, 뉴진스는 신곡 ‘Zero’를 발표했다. 코카콜라 제로 슈거와 컬래버로 나온 CM송이다. 가수가 CM송을 부른다는 것이 지극히 평범하고 당연한 행위지만, 이것이 음원으로 출시되는 경우는 없다. CM송이 하나의 ‘밈’이 될 때는 있어도 상품성 있는 콘텐츠로 여겨지지는 않으니까. 가수 입장에서도 홍보 활동을 할 수 없기 때문에 일종의 가욋돈처럼 여기기 마련이다. 그런데 뉴진스는 기존 프로듀서들과 함께 이 노래를 제작, 발매했다. 뮤직비디오를 제외하고 어떤 활동도 하지 않았지만 음원 차트 상위권을 차지했다. 이런 일련의 기획은 2020년대의 화두인 아티스트와 기업의 컬래버를 한 단계 격상시켰다고 평가할 수 있다. 잘 기획된, 능력 있는 아이돌이 소모성 콘텐츠를 넘어 그 자체로 강력한 브랜드가 될 수 있음을 보여줬기 때문이다.
이런 부분에서 아이브가 상대적으로 눈에 띄지 않지만, 오히려 아이브는 전통적인 걸그룹의 전략과 클리셰를 극대화한다. 장원영과 안유진을 투톱으로 내세워 인기를 견인한다. 시대와 장르를 넘나드는 요소들을 조합하여 ‘훅’ 있는 노래를 내세운다. 스토리텔링보다는 멤버의 매력을 부각하는 뮤직비디오로 시선을 끈다. K팝, 아니 한국 대중음악의 특징 중 하나인 ‘있는 힘껏 쥐어짜 부르는 고음 파트’를 회피하지 않는다. 뉴진스가 ‘얼터너티브 K팝’이라 여겨질 만큼 완벽주의에서 벗어나 자연스러움을 내세우며 센세이션을 일으킬 때, 아이브는 K팝 성공 방정식을 극대화하며 입지를 확보했다.
콘셉트와 스타일의 차이는 있지만, 이전 세대와 확실한 차별성을 내세우기 힘들었던 3세대와 달리 뉴아르의 시대는 한계에 다다른 것 같은 K팝 시장이 여전히 진화 가능성이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걸그룹 신3대장의 시대를 의미 있게 지켜보는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