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저 스티븐 
딜로이트 컨슈머 인더스트리 센터 매니징디렉터
드포대 역사학, 컬럼비아대 개발경제학·국제개발학 
석사·MBA
로저 스티븐 딜로이트 컨슈머 인더스트리 센터 매니징디렉터
드포대 역사학, 컬럼비아대 개발경제학·국제개발학 석사·MBA

물가가 오르고 경기가 악화하면 많은 소비자가 절약을 하고 아예 소비를 포기하기도 하지만, 살기가 팍팍할수록 소소한 사치를 즐기는 행태도 뚜렷해진다. 사치 소비는 순전히 즐거움이나 자기만족, 과시 등을 위해 꼭 필요하지 않은 물건에 필요 이상의 돈을 쓰는 행태를 말한다. 소매업·소비재 기업들은 어떤 소비자가 무슨 이유로 어떤 품목으로 사치를 즐기는지 파악해야 매출 기회를 잡을 수 있다.

‘립스틱 지수(lipstick index)’는 경기 침체기에 저렴한 사치품의 판매가 증가한다는 통념에 근거해 불황을 예측하는 지수로 활용되곤 한다. 글로벌 화장품 브랜드 에스티로더 상속자 레오나르도 로더가 2001년 불황에도 립스틱 판매가 증가한 데 착안해 만든 지수다. 이 작은 사치품이 소비자들의 지갑 사정에 큰 부담을 주지 않으면서도 현실도피 욕구를 충족시켜 준다는 것이다. 최근 경제가 악화하는 몇몇 주요국에서 실제로 립스틱과 향수 등 화장품 판매가 증가하고 있다. 립스틱 지수는 이러한 판매 데이터를 보면 논리적으로 보이지만, 사치 소비 행태의 전체 그림을 보여주지 않는다. 심지어 가장 중요한 부분을 놓치고 있을 수도 있다.

딜로이트는 지난 6개월간 전 세계 23개국 소비자 약 15만 명을 대상으로 사치 소비 관련 설문조사를 실시했다. 소비자들에게 구매 품목, 지출액, 구매 이유를 물었다. 그 결과 사치 소비가 예상보다 많았고, 몇 가지 고정관념을 걷어내자 더욱 구체적인 실상이 모습을 드러냈다. 이를 통해 ‘버번 바로미터(bourbon barometer)’가 사치 소비 행태를 더욱 정확히 반영할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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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사치, 절대 우습게 볼 수 없다

소비 동기는 국내총생산(GDP) 통계나 매장 판매액에 나타나지 않고, 전 세계 소비자들이 사치품에 쓰는 정확한 액수도 집계되지 않는다. 하지만 소비자들에게 직접 물어보면 구매 동기와 액수를 알 수 있다. 우선 설문조사 결과, 작은 사치는 전 세계적으로 나타나는 현상이라는 결론이 도출됐다. 단지 자신의 즐거움을 위해 지출할 여유가 있다고 대답한 응답자 비중이 42%에 불과했음에도 불구하고, 지난 1개월간 사치 소비를 했다는 응답자는 75%를 넘었다. 미국, 스웨덴, 캐나다, 호주 등 국가에서는 그 비율이 80%에 육박했고, 비율이 제일 낮은 일본조차도 응답자 비중이 절반에 달했다. 젊은 세대일수록 또 부유할수록 사치 소비를 했다는 응답자 비율이 높기는 했으나, 사치 소비를 했다는 응답자 비율은 연령대와 소득층에 상관없이 고르게 높았다. 사치 소비가 중요한 소비지출 트렌드가 되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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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짜 주인공은 남자…의외 사치 소비 행태

불경기 때의 사치 소비를 대표하는 것이 립스틱 지수라고 하면, 화장품을 구매함으로써 재정 스트레스에서 잠시 도피하는 여성 소비자가 눈앞에 그려진다. 하지만 조사 결과, 실상은 이와 사뭇 다르게 나타났다.

1│저렴한 사치 소비 큰 손은 ‘남성’

불경기에 사치 소비는 여성만의 전유물이 아니다. 사치 소비를 한다는 남성 비율이 여성에 못지않았다. 그리고 사치 소비를 하는 소비자 중에서는 남성이 여성보다 훨씬 많은 돈을 썼다. 글로벌과 미국 기준으로 남성 지출액이 여성보다 40% 많았다. 특히 지출액의 성별 격차는 밀레니얼 세대가 가장 컸다. 이 세대는 남성이 여성보다 20달러(약 2만6000원) 더 많이 썼다.

2│먹고 마시는 사치를 부린다

사치 소비 중 가장 인기 있는 품목은 화장품이 아니라 식음료였다. 미용 품목에 사치를 부린다는 응답자보다 식음료에 사치를 부린다는 응답자 비율이 글로벌에서는 약 세 배, 미국에서는 무려 네 배나 높았다. 특히 남성 응답자 중 비율이 57%에 달했고, 지출액은 여성보다 60%가 많았다. 식음료 사치라 하면 소소한 간식이나 커피전문점을 떠올리기 쉽지만, 의외로 2022년 한 해 미국에서 고급 양주 판매가 13% 증가한 것으로 나타났다.

3│작은 사치인데 지출액 꽤 많다

립스틱 가격은 천차만별이지만 미국에서 판매되는 립스틱 가격은 평균 10달러(약 1만3000원)다. 이와 비교하면 글로벌 사치 소비 지출액 중간값인 32달러(약 4만2000원)는 꽤 높은 수준이고, 식음료를 제외하면 50달러(약 6만6000원)까지 올라간다. 가장 지출액이 많은 품목은 전자 기기로, 약 182달러(약 24만원)에 달했다. 저렴한 사치라 해도 립스틱에 국한되지 않고, 꽤 고가 품목도 포함돼 있는 것이다. 이제 불경기의 사치 소비에 대한 새로운 그림이 그려지지 않는가. 밀레니얼 세대 남성이 근사한 레스토랑에서 저녁 식사를 즐기며 긴장도 풀고 배고픔도 해결한다. 또 양주를 수집하기도 한다. 립스틱 지수뿐 아니라 버번 바로미터를 주시해야 하는 이유다.

4│美 데이터로 본 사치 소비의 동기

사치 소비는 흔히 현실도피 행위 또는 단순히 명품을 구매하는 행위로 간주된다. 하지만 스트레스와 긴장 해소도 사치 소비의 강력한 동기로 작용한다. 또 단순히 쾌락을 위해서가 아니고, 실용적이고 오래 쓸 수 있을 것 같아 사치 소비를 하는 경우도 있다. 따라서 품목과 지출액별 소비 이유를 살펴보면 구체적인 패턴을 파악할 수 있다. 미국 데이터를 중심으로 사치 소비의 동기를 알아보자.

5│의류 사치 소비, 가격에 따라 다른 이유

소비자들이 의류에 사치를 부리는 이유는 지출액 100달러를 기준으로 달라졌다. 지출액이 100달러 미만인 경우, 오래 입을 수 있고 편안함을 제공하기 때문이라는 실용적인 응답이 주를 이뤘다. 하지만 100달러가 넘어가면 새로운 패턴이 나타난다. 실용적인 이유가 급격히 줄고, 자기표현을 위해서라는 응답이 많이 증가한다. 통상 사치 소비의 주요 동기로 간주되는 현실도피는 중요한 요인이 되지 못했다.

6│미용 및 개인 관리 위한 사치 늘어

립스틱이 포함된 미용 제품 품목 중에서도 치장보다는 웰니스를 위한 사치 소비가 훨씬 많았다. 긴장과 스트레스를 풀어주는 미용 제품이 더 큰 인기를 끄는 것이다. 소비자들은 경제적 스트레스에서 벗어나고자 건강과 웰니스에 중점을 둔 제품으로 작은 사치를 부리고 있다. 또 의류 품목과 마찬가지로 지출액에 따라 소비 이유가 달라졌다. 지출액이 많아질수록 실용적 이유는 감소하고 새로운 것에 대한 시도와 자기표현 등의 이유가 증가했다. 여기서도 현실도피는 중요한 요인이 아니었다.

유통·소비재 기업, 새 매출 기회 발견하라

유통 및 소비재 기업들은 대부분 고객의 특정한 상황이나 인생의 특별한 이벤트를 마케팅 포인트로 잡는다. 하지만 저렴한 사치를 즐기는 소비자들의 행태를 더욱 심층적으로 파악하면 새로운 매출 기회를 잡을 수 있다. 소비자의 구매 이유를 파악해서 맞춤형 마케팅 콘텐츠로 자사 제품에 대한 수요를 끌어올릴 수 있다. 

예를 들어 스카프를 판매한다면 이를 단순히 패션 아이템으로 내세우기가 쉽지만, 100달러 미만 제품이라면 실용성에 중점을 두는 것이 더 효과적일 수 있다. 또 미용 및 개인 관리 제품의 경우 웰니스가 구매의 가장 큰 이유이지만, 가격이 높아지면 ‘새로움’을 찾는 소비자들이 늘어난다는 것을 염두에 두자.

이번 딜로이트의 조사 결과는 사치 소비에 대해 그동안 제대로 알려지지 않았던 실상을 드러냈다. 립스틱 지수이건 아니면 버번 바로미터이건 한 가지 변하지 않는 사실은, 평소에 근검절약하는 소비자도 가끔은 작은 사치를 부린다는 것이다. 유통 업계는 품목을 막론하고 고정관념에 사로잡히지 말고 이러한 가끔 발생하는 사치 소비의 배경에 대해 더욱 폭넓게 이해할 필요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