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 셔터스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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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진건이 1924년에 발표한 단편소설 ‘운수 좋은 날’은 인력거꾼 김첨지의 비극적인 하루를 그리는 작품이다. 아픈 아내와 늘 굶주려 있는 아이를 집에 두고 돈을 벌러 나간 김첨지는 그날따라 연거푸 손님을 태우는가 하면 장거리 손님을 맞는 등 횡재라고 말해도 좋을 만큼 운수 대통인 하루를 보낸다. 그러나 집으로 돌아온 그를 맞이한 것은 죽어 싸늘하게 식어 버린 아내와 죽은 아내의 마른 젖을 빨고 있는 아이다.

어쩐지 운이 좋았던 그날이 그의 인생에서 가장 불운한 날이었다는 사실은, 행운이라고는 기대할 수 없는 식민지하 빈민의 출구 없는 삶을 지독할 만큼 사실적으로 그린다. 김첨지는 그저 황망한 심정으로 대답 없는 아내 앞에서 절규할 뿐이다. 설렁탕을 사 왔는데 왜 먹지를 못하니, 먹지를 못해⋯. 이후 비참하고 슬픈 소설이라면 적지 않게 읽었지만, 이 소설만큼 서글픈 작품을 만나지는 못했다. 한국 문학사에서 ‘운수 좋은 날’이라는 표현만큼 불길한 문장이 또 있을까.

어떤 소설도 이 소설만큼 슬플 수는 없을 거라고 생각하면서도 가슴 한편에는 늘, 이 소설을 다시 쓰면 어떤 이야기가 될지 궁금한 마음이 있었다. 그 지독한 가난과 불운을 2020년대 버전으로 쓰면 어떤 색깔이 나올까. 조금은 더 희망적인 이야기가 될 수 있을까. 아니면 그때보다 더 가혹한 지옥이 펼쳐질까. 자신에게 좋은 순간이 왔을 때 도래할 불운을 걱정하지 않고 그 순간을 즐길 수 있다는 건 그 인생이 충분히 괜찮다는 증거일 것이다. 우리는 충분히 괜찮은 삶을 살고 있을까.

박혜진 문학평론가 
조선일보 신춘문예 
평론 당선, 
한국문학평론가협회 젊은평론가상, 현대문학상
박혜진 문학평론가
조선일보 신춘문예 평론 당선, 한국문학평론가협회 젊은평론가상, 현대문학상

올해 세계문학상 수상작인 장편소설 ‘우리가 겨울을 지나온 방식’의 마지막 문장은 이렇게 끝난다. “오늘은 운수가 좋은 날이다.” 이 소설이 100년 뒤에 다시 쓰인 ‘운수 좋은 날’이자 2020년대 버전의 ‘운수 좋은 날’임을 자처하고 있음을 쉽게 짐작할 수 있는 엔딩이다. 나는 정말 궁금했다. 다시 쓴 ‘운수 좋은 날’은 비극의 갱신일까 새로운 희망의 서사일까. 우린 어디까지 왔을까. 

김첨지의 자리엔 준성이라는 청년이 있다. 아픈 아내와 어린아이를 두고 나가 인력거를 끌었던 김첨지처럼 준성은 병든 아버지를 돌보는 동시에 밤에는 생활비를 벌기 위해 대리운전을 뛰는 스물여섯 살 청년이다. 돌봄과 간병, 생계를 위한 노동이라는 삼중고에 시달린다는 측면에서 준성의 상황은 김첨지의 그것보다 더하면 더했지 결코 못하지 않아 보인다. 고등학생 시절부터 뇌졸중과 알코올성 치매를 앓는 아버지를 간병해야 하는 처지에 놓인 준성은 자신의 인생에 대한 어떤 선택도 내리지 못한 채 오직 생존을 위한 삶을 살아왔다. 그런 준성의 삶에 불행의 탑이 쌓인다. 대리운전 중 손님의 외제 차에 손상을 입혀 거액의 수리비를 물어야 할 상황에 처하는 것도 모자라 아버지를 목욕시키던 중 예기치 못한 사고가 발생하며 평생 아버지를 보호한 준성이 오히려 궁지에 몰릴 지경에 이른 것이다. 이쯤 되면 주인공을 지켜보는 독자로서도 허공에 대고 묻고 싶어진다. 도대체 그가 왜 이렇게나 고통받아야 하느냐고. 

작품은 언제나 시대와 상호작용하는 가운데 탄생한다. 1924년의 불길함이 김첨지라는 한 개인의 특수한 불행만은 아니었던 것처럼, 2023년의 불길함 역시 준성이라는 한 청년의 지독하게 재수 없는 사연만을 의미하진 않는다. 작가 역시 100년 전과 현재를 단순 비교하지 않는다. 그 시절에 비하면 공동체라고 할 만한 시스템이 존재하는 지금, 그럼에도 개인이 오롯이 감당해야 하는 간병의 무게는 적정하고 또 온당한 것일까. 그 무게를 나누어 가질 수 있는 가능성에 대해 우리가 외면하고 있는 건 무엇일까. 다만 100년 뒤에 쓴 ‘운수 좋은 날’은 확실히 더 희망적이다. 김첨지의 ‘운수 좋은 날’이 지독한 불운의 전조였던 것과 달리, 준성의 ‘운수 좋은 날’은 꼬인 데 없이 말 그대로 운수 좋은 날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작가는 준성에게 반어법으로서의 운수 좋은 날이 아니라 말 그대로 운수 좋은 날을 선물하기 위해 ‘이웃의 도움’이라는 구체적인 구원을 선사한다.

생의 겨울을 지나는 방식

거주하는 임대아파트 옆집에는 준성과 마찬가지로 치매에 걸린 노모를 돌보던 중년의 여성 명주가 산다. 명주는 이미 사망한 엄마를 미라로 만들어 두고 며칠을 보내고 있는 상황이다. 사망신고를 하는 순간 엄마 앞으로 나오던 연금이 끊길 텐데, 간병하느라 일하지 못한 지 오래인 것은 물론이고 몸도 성치 않은 명주로서는 당장 생존이 급선무이기 때문이다. 준성은 명주의 도움을 받아 위기를 넘고, 명주는 준성을 도우며 자기 죗 값을 치른다. 

이들이 생의 겨울을 지나는 방식을 두고 최선의 결말이자 아름다운 결말이라고 말하고 싶은 생각은 없다. 그러나 죄 없는 사람들이 벌 받는 듯한 삶을 살아갈 때, 이들이 막다른 길에 도달하는 것이 그들의 잘못은 아닐 것이다. 막다른 길은 그 사회의 절망을 평가하는 기준이고 이웃의 도움은 그 사회의 희망을 예견하는 기준이다. 우리의 절망과 희망은 기준으로부터 어디쯤 와 있을까.

Plus Point

문미순

사진 연합뉴스
사진 연합뉴스
2013년 문화일보 신춘문예에 당선돼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2021년 심훈문학상을 수상하면서 첫 소설집 ‘고양이 버스’를 펴냈다. 2023년 ‘우리가 겨울을 지나온 방식’으로 제19회 세계문학상을 수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