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팅힐’에 등장하는 포토벨로 마켓. 사진 구글
‘노팅힐’에 등장하는 포토벨로 마켓. 사진 구글
영국 웨스트 런던 노팅힐(Notting Hill) 지역의 포토벨로 거리(Portobello Road)는 시장 거리다. 주중엔 다양한 종류의 과일과 채소가 팔리며, 주말에는 동이 트기 무섭게 나타나는 골동품 가판대와 사람들로 붐빈다. 1999년 영화 ‘노팅힐’의 주인공 윌리엄 태커는 포토벨로 거리 한 모퉁이에 위치한 작은 여행 전문 서점의 주인이다. 윌리엄은 아내와 이혼 후 매일 1㎞ 거리의 시장을 가로지르는 길로 출퇴근하며 무미건조하게 반복되는 일상을 보낸다. 그러던 어느 수요일, 그에게 믿을 수 없는 일이 일어난다. 우연히 책방에 들어온 손님이 세계적인 배우 애나 스콧임을 깨달은 것이다. 숨이 멎을 듯한 시간은 순식간에 흘러가고 애나는 터키 여행책을 사 들고 홀연히 서점을 떠난다. 얼떨떨한 표정의 윌리엄이 겪은 그날의 운명적인 사건은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몇 분 뒤, 그는 오렌지 주스를 사서 시장 모퉁이를 돌아가던 중 누군가와 부딪혀 주스를 쏟는다. 상대는 놀랍게도 다시 애나였다. 윌리엄은 티셔츠가 주스로 얼룩진 그녀를 자기 집으로 데려와 옷을 갈아입도록 도와준다. 작별 인사 직전, 애나가 갑작스러운 키스를 하며 두 사람의 관계가 시작된다.
강현석 
SGHS 설계회사 소장 
코넬대 건축대학원 석사, 
현 서울대 건축학과 출강, 
전 헤르조그 앤드 드 뫼롱 
바젤 사무소 건축가
강현석 SGHS 설계회사 소장
코넬대 건축대학원 석사, 현 서울대 건축학과 출강, 전 헤르조그 앤드 드 뫼롱 바젤 사무소 건축가

일상의 회복을 돕는 공간, 시장

예고 없이 찾아온 사건은 윌리엄의 단조로운 일상을 뒤엎으며 행복을 선사한다. 그러나 비일상의 달콤함이 사라진 순간, 슬픔에 휩싸인 윌리엄을 포용하고 회복시켜 준 것은 다름 아닌 평범한 일상이었다. 영화 중반부에서 애나는 떠나가고, 혼자 남은 윌리엄은 씁쓸한 표정으로 포토벨로 시장 거리를 걷기 시작한다. 빌 위더스의 곡 ‘에인트 노 선샤인(Ain’t No Sunshine)’을 배경으로 하는 2분간의 롱테이크 장면은 시장 속 공간에 담긴 일상의 다채로움과 이를 통해 윌리엄이 회복하는 과정을 묘사한다. 카메라는 윌리엄의 걸음을 쫓으며 여름에서 시작해 가을, 겨울, 봄으로 끝나는 시장의 4계절 모습을 담아낸다. 시장의 분위기는 비와 낙엽, 눈과 함께 자연스럽게 변화한다. 계절마다 달라지는 상점의 진열 상품들은 시장에 생기를 불어넣는다. 제철 채소와 과일들이 천연의 색과 향으로 시장을 풍성하게 채운다. 겨울에는 크리스마스트리와 장식 조명으로 인해 들뜬 축제 분위기가 형성되고, 봄에는 각양각색의 꽃들이 시장 구석구석을 화사함으로 물들인다. 얇은 반소매 셔츠는 청명한 여름 햇살을, 두꺼운 장갑과 양말은 포근한 겨울 속 온기를, 원색의 스카프는 신선한 봄과 가을의 바람을 연상시킨다. 시장을 가득 메운 사람들은 윌리엄과 같이 주어진 ‘오늘’을 성실히 살아가며, 함께 내일을 맞이한다. 롱테이크 장면의 시작 부분에 등장하는 임산부는 장면의 말미에서 갓 태어난 아이를 안고 있는 모습으로 다시 나타난다. 윌리엄이 아이를 힐끗 보고 미소 지으며 장면은 마무리된다.

스페인 바르셀로나에 있는 ‘산타 카테리나 시장’
프로젝트. 사진 EMBT
스페인 바르셀로나에 있는 ‘산타 카테리나 시장’ 프로젝트. 사진 EMBT

도시 표면 위로 떠오른 일상들

영화의 롱테이크 장면처럼, 시장은 도시에서 모든 구성원의 일상이 집약되는 대표적 공간이다. 사람과 상품, 지역, 문화 사이의 교류가 활발하게 일어나는 시장 속 풍경은 생명력 있는 공동체의 삶을 보여준다. 따라서 시장에서의 경험은 평소에는 체감하기 힘들었던 일상의 의미와 가치를 환기할 기회를 제공한다. 

스페인 바르셀로나 구도심에 위치한 ‘산타 카테리나 시장(Santa Caterina Market)’은 이러한 시장의 특성을 시각적이고 물리적으로 형상화한 프로젝트다. 스페인 건축 설계회사 이엠비티(EMBT)는 150여 년의 세월을 거치며 낙후된 전통 시장의 재생을 위해 독특한 물결 모양의 지붕 구조물을 제안했다. 주름진 식탁보를 연상시키는 5500㎡의 거대한 지붕은 기존 건물 위를 덮어 과거와 현재가 중첩된 상황을 만든다. 하부에는 다양한 판매 시설과 공공시설, 주차장 그리고 공사 중 발굴된 역사 유적이 모두 공존한다. 

여기에서 가장 흥미로운 요소는 지붕의 표면을 덮은 형형색색의 세라믹 타일이다. 바르셀로나의 강렬한 태양에 반짝이도록 유약을 바른 32만5000장의 타일들은 총 67가지 색을 띤다. 선택된 색상의 범위는 지붕 아래 시장의 특성을 도시의 표면 위로 생동감 있게 드러내기 위해 결정됐다. 시장에서 판매되는 채소와 과일의 이미지들로 거대한 정물화를 구성하고, 지붕 위로 투영해 모자이크화했다. 타일 하나하나가 저해상도 이미지에서의 픽셀 역할을 하는 셈이다. 차분한 박스형 건물들에 둘러싸인 ‘산타 카테리나 시장’은 활기 넘치는 수평 지붕을 통해 도시 풍경 속에 숨어있던 다채로운 일상의 존재감을 선명하게 드러낸다.

네덜란드 로테르담의 ‘마켓홀’과 내부. 사진 MVRDV
네덜란드 로테르담의 ‘마켓홀’과 내부. 사진 MVRDV

통합된 일상 공간이 주는 시너지

건축가 그룹 엠브이알디브이(MVRDV)가 설계한 네덜란드 로테르담의 ‘마켓홀(Markthal)’은 주거와 시장을 획기적인 방식으로 통합한다. 두 동의 아파트가 상층부에서 아치형으로 만나며 중앙에 시장을 위한 열린 홀을 품는 방식이다. 시장 홀의 아치 내벽에는 17세기 네덜란드 정물화를 참고해 꽃, 곤충, 식품 이미지를 확대한 ‘풍요의 뿔’이라는 대형 벽화가 설치됐다. 주변 도시 맥락과 소통하고 방문객을 끌어들이기 위해 시장 홀의 양단은 거대한 단일 유리로 투명하게 마감됐다. 폭풍우 등을 견디기 위해 테니스 라켓과 같은 케이블 그물이 유리를 강화하는 시스템이다. 개인과 공동체의 일상이 유기적으로 공존하는 방식은 상호 지속 가능한 시너지를 발생시킨다. 40m 높이의 아치 아래 위치한 120m 길이의 시장 홀은 날씨로부터 보호받는 쾌적하고 개방적인 공간을 제공받는다. 24개의 펜트하우스를 포함한 228개의 아파트 유닛에 사는 주민들은 언제든지 쉽게 중앙 시장 홀에 접근해 96개의 식품 가판대와 소매점, 레스토랑, 카페를 이용할 수 있다. 새로운 도시 유형의 형식과 함께 ‘마켓홀’에서 주목할 만한 점은 시장과 주거 공간 사이의 적극적인 소통 방식이다. 각 주거 유닛은 벽이나 바닥에 설치된 창을 통해 시장 홀과 시각적으로 연결된다. 이로써 아파트 거주자들은 바깥으로 도시를 향한 경치를 바라보며 동시에 안쪽으로는 활기찬 시장의 일상 풍경을 감상할 수 있다. 반면에 시장 홀을 방문하는 사람들은 아치 내부에 리듬감 있게 배치된 주거의 창을 통해 마치 수족관에 둘러싸인 듯한 공간적 경험을 할 수 있다. 이를 통해 자신의 일상이 다른 사람의 일상과 공존하며 연결돼 있음을 인식한다. 시장에 내재한 일상의 다채로움은 서로 다른 일상에서 맺어진 관계를 통해 드러난다. 오래된 시장을 개선하는 일이 보이지 않던 일상들에 주목하는 것에서부터 시작되어야 하는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