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의 무역 압박 카드들
미국이 1980년대 말부터 국제무대에서 전가의 보도처럼 사용한 것이 1974년 제정된 미국 통상법 301조를 개정한 슈퍼 301조다. 특별하고 강력하다는 의미로 ‘슈퍼’라는 수식어가 붙은 것이 그 위력을 가늠케 한다. 기존에는 특정 산업만을 불공정 대상으로 지정하고 보복할 수 있었지만, 개정된 법률은 한 가지 문제로 특정 국가 전체에 보복할 수 있도록 만들었다. 겉으로는 글로벌 무역 시장에서 불공정한 관행을 시정하겠다는 데 목표를 두고 있지만 사실은 미국의 눈에 벗어나면 보복 조치를 당할 수 있다는 엄포로 이해됐다. 이 법안의 주요 타깃은 미국 상품에 대한 부당한 관세 부과와 수입 규제 등 통상 제한 조치는 물론 여타 국가의 산업 보호를 위한 보조금 지급과 식량 및 원자재 등에 대한 공급 제한이다. 미국은 이를 통해 자국이 우위를 점하고 있는 농산물 시장을 개방하도록 압박하고 기술적 우위가 있는 컴퓨터나 인공위성 등에 대한 기술 보호가 미약하다는 이유로 자료 제출을 요구하고 이에 잘 응하지 않으면 보복하겠다고 으름장을 놓았다. 미국 시장에 진입한 상품이 정부 보조금이나 금리가 낮은 금융을 지렛대로 이용했다면 이 역시 슈퍼 301조의 희생양으로 삼았다. 대표적인 사례가 미국이 2018년에 2500억달러(약 329조6500억원)어치의 중국 제품에 대해 네 차례에 걸쳐 추가 관세(25%)를 부과한 것이다. 이는 당시 미국의 대중국 수입액의 절반 정도를 차지할 정도로 엄청난 규모였다.
여기에다 불공정한 환율 운용에도 보복하는 방안을 마련했다. 예를 들어 특정국의 통화가치가 상대적으로 낮게 평가돼 운용됐다면 수출보조금을 준 것과 같다는 논리로 매년 전 세계 국가를 대상으로 환율 조작 여부를 조사해 발표하고 있다. 최근에는 환율 조작에 대해 보복관세의 일종인 상계관세를 부과할 수 있도록 토대를 마련해 주요 타깃인 중국은 물론 동맹국인 한국과 대만, 일본을 위협하고 있다. 특히 대미국 수출국들은 환율 조작 여부가 상당히 주관적 평가인 데다 기준도 명확하지 않아 오히려 로비를 통해 ‘선처’를 읍소하는 상황에 내몰리기도 한다. 무역 흑자는 교역국 간의 산업별 경쟁력의 종합적인 차이를 반영하는데 미국은 이를 모두 환율 조작 결과로 이해할 정도다. 미국 재무부는 2020년 12월 베트남과 스위스를 환율 조작국으로 지정했다. 베트남이 직전 1년간 미국에 대한 무역 흑자액이 580억달러(약 76조4700억원)로 전년 470억달러(약 61조9700억원)보다 늘었고 외환시장 개입 금액도 같은 기간 국내총생산(GDP) 1% 미만에서 5% 이상으로 증가한 점을 이유로 들었다.
최근에는 반도체를 중심으로 중국에 대한 압박을 강화하고 있다. 2019년 5월 중국 반도체 선두 주자인 화웨이에 내민 미국의 규제 카드는 부품 공급 제한이었다. 안보상에 문제가 있으니 여타 국가들이 화웨이에 반도체를 수출할 때 허가를 받으라는 내용이었다. 그다음 해 12월에는 중국 내 또 다른 반도체 기업인 SMIC에 대해 화웨이보다 센 조치인 거래 제한이라는 칼을 뽑았다. 이후 반도체 장비의 대중국 수출 금지 조치를 발표해 중국의 반도체산업에 대한 싹을 자르려 한다는 분석이 언론에서 나왔다. 2023년 들어서는 화웨이에 대한 전면적인 수출 통제 가능성이 나돌고 있다. 지난해 10월 미국 상무부가 발표한 것으로 2023년 5월부터 수출이 실질적으로 중단될 수 있다는 전망이 나돈다.
더욱 우려되는 대목은 이런 제재가 여타 국가에도 부정적으로 작용한다는 점이다. 미국산 소프트웨어를 사용해 생산된 제품은 중국에 들어갈 수 없고 반도체 장비 분야 강자인 일본과 네덜란드도 미국의 요구로 ‘중국 따돌리기’에 동참할 가능성이 커 보인다. 최근에 미국이 추진 중인 인프라 투자 및 일자리법, 반도체 칩과 과학법(칩스법), 인플레이션 감축법(IRA) 등이 겉으로는 공급망 구축법이지만 내심 1980년대와 1990년대 미국이 불공정하다고 했던 국산과 외국산 차별조치법이라는데 전문가들은 거의 이의가 없을 정도다. 더욱이 향후 2년간은 차기 미국 대통령 선거 관련 일정이 즐비해 외국 제품을 차별하는 새로운 법이 우후죽순처럼 나돌아 표를 얻는 지렛대로 활용될 것으로 우려되고 있다.
중국도 수출입 규제로 불만 국가 압박
중국은 세계 1위 무역 강국이라는 점을 매개로 상품에 대한 수출입 규제를 통해 중국을 불편하게 만드는 국가에 압박을 가하고 있다. 노르웨이가 2010년 중국의 반체제 작가이자 인권운동가인 류샤오보에게 노벨상을 수여하자 노르웨이와 자유무역협정(FTA) 협상을 즉시 중단하고 연어 수입을 막았다. 이에 따라 중국 연어 시장의 90% 이상을 장악했던 노르웨이산 연어는 중국인의 식탁에서 거의 자취를 감출 정도로 타격을 입었다. 2016년 노르웨이의 유화 제스처로 양국 간에 화해 분위기가 조성된 후에야 원래 상태로 돌아갈 수 있었다. 2009년에 일본이 분쟁 지역인 센카쿠열도 인근에서 일본의 순시선을 들이받았다는 이유로 중국인 선장과 선원 등 15명을 억류하자, 중국은 일본 첨단제품에 주로 사용되는 희토류 수출 제한을 통해 힘겨루기에 나섰다. 통관절차 지연 등의 방법으로 일본 전자제품에 들어갈 희토류 공급을 막은 것이다. 이로 인해 막대한 경제적 타격에 직면한 일본이 선장과 선원을 석방하고 특사를 파견하는 등의 사과를 한 후에야 원래 상태로 돌아갔다.
2020년 말부터 중국은 호주와 석탄 교역을 두고 긴장 관계가 형성되자 호주로부터의 석탄 수입을 사실상 중단했다. 비슷한 시기 호주산 와인, 바닷가재 등에 대한 수입도 관세 추가 부과 등으로 크게 줄었다. 공식적으로 무역 보복이라는 용어는 등장하지 않았지만, 미국 중심의 안보동맹에서 호주의 활동이 활발해진 것에 대한 중국의 본심이 드러난 것으로 분석됐다. 코로나19의 원인 규명을 위해 중국이 적극적으로 나서야 한다는 호주의 성명도 중국의 심기를 불편하게 만들었다. 호주는 세계 2위 석탄 수출 대국으로 중국 시장에 대한 의존도가 25%로 매우 높았다. 호주가 중국의 조치에 경제적 손실을 감수하고도 쉽게 고개를 숙이지 않자, 그 피해가 중국에서 나타나기 시작했다. 중국은 인도네시아와 러시아로부터 석탄 수입을 늘려 호주산 감소를 메꾸려고 했으나 열효율이 좋은 호주산의 공백을 완전히 채울 수 없었다. 석탄을 주 연료로 하는 화력발전에 대한 의존도가 높은 중국은 그 여파로 2021년에 전력난에 노출됐다. 2023년 들어 중국 정부는 대안을 찾지 못하고 슬그머니 호주산 석탄 수입을 재개하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그동안 승승장구하던 중국의 무역 보복 전략이 굴욕을 맛보는 상황이 전개된 것이다.
중국은 무역 보복을 가할 때 일반적인 원칙이 있다. 분쟁 정도가 약하면 상대국이 예민해하는 농식품을 위주로 타격을 가한다. 노르웨이의 연어, 캐나다의 카놀라유, 호주 와인, 대만 과자류 등이 대표적이다. 해당국에서 농민의 불만을 야기해 리더십에 금이 가도록 유도할 뿐 아니라 일반 상품은 대체 시장 마련이 상대적으로 쉬워 충격이 크지 않은 것을 감안한 전략이다. 또한 보다 강도 높게 상대국에 충격을 주기 위해서는 여행 제한 카드를 꺼내 든다. 해외여행객 송출을 담당하는 여행사가 정부의 입김하에 있고 비자 제한을 통해 쉽게 통제가 가능하기 때문이다. 이 밖에 사회주의 특성상 집단적 통제가 용이해 중국 내 불매운동도 상품무역 및 여행 제한과 함께 자주 등장하는 카드다.
심판 역할까지 자처하고 나선 미·중
미국은 세계 최강의 파워를 바탕으로 미국법이 국제법임을 은근히 과시하고 있다. WTO가 글로벌 교역에서 국제 경찰의 기능을 사실상 상실하면서 미국이 심판 역할도 자임하는 모양새다. 미국이 자국 기술이 사용됐다고 제3국 간 거래도 통제하는 것은 너무 나간 것 아니냐는 불만도 적지 않다. 그러나 미국은 국제금융 네트워크와 달러 파워를 손에 쥐고 여타 불만이 제기되지 못하도록 틀어막고 있다. 중국은 세계 1위의 무역국이자 최대 관광객 송출국으로 투명성이 결여된 조치도 서슴지 않고 있다. 문제는 미·중 간 분쟁이 장기화하면서 이런 심판 역할이 더 잦아지고 있다는 점이다. 심지어 상대국에 어느 편인지 분명히 밝히라는 메시지를 내보내기도 한다. 미국과 중국은 글로벌 경제에서 선수이자 심판 그리고 룰 세터(rule setter·국제 교역룰 제정자)로 그 영역을 확대하고 있다. 그만큼 여타 국가의 자유로운 입지는 줄어들 수밖에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