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 셔터스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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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기업 임원 출신의 선배 A씨는 퇴직하고 제2의 직장 혹은 직업을 구하려는 생각을 깨끗하게 버렸다. 몇몇 대학에서 연구실과 적지 않은 연구비를 지원해 주는 조건으로 초빙받았지만 모두 사양했다. 그는 퇴직한 후 

1년가량 그동안 버킷 리스트에 담아만 두었을 뿐 실행하지 못했던 것 중의 하나인 해외여행을 다녔다. 그냥 아무 나라 아무 도시나 정해서 그 도시에서 한 달 동안 살아보는 식으로다.

김진국
문화평론가, 
현 고려대 
민족문화연구원 교수
김진국 문화평론가, 현 고려대 민족문화연구원 교수

그렇게 살아본 나라 중에서 어떤 나라가 가장 좋았느냐고 묻자, 일순의 주저 없이 ‘스페인’이라는 단어가 튀어나왔다. 스페인이라는 나라가 뭐가 그리 좋았을까. 일단 지중해를 끼고 있는 따뜻한 해양 국가라는 게 좋았다. 다양한 종교와 문화유산이 있는 유서 깊은 나라라는 것도 좋았다. 그러나 그를 사로잡은 것은 다양한 음식과 함께 이방인일지라도 편안하게 그 문화 속에 스며들 수 있는 개방적인 문화였다. “스페인 사람들은 하루에 다섯 끼를 먹는데, 밤 10시가 저녁 식사 시간이야. 자정이 다 되어가는데도 도심은 사람들로 붐비고, 아무 카페나 들르면 ‘타파스’라 불리는 개성 있는 간식과 함께 다양한 음식과 주류가 기다리고 있어. 낭만과 열정이 넘치는 사람들과 대화하는 재미도 쏠쏠하지!” 

그는 그렇게 1여 년간의 해외 몇 나라를 돌아보며 ‘한 달 살아보기’ 체험을 마치고 돌아오자마자 요리학원에 등록했다. 다시 1년간 그는 한식, 양식, 중식 할 것 없이 다양한 요리법을 배웠다. 첫 번째 수혜자는 말할 것도 없이 선배의 가족이었다. 

서른이 넘은 그의 아들딸은 아직 미혼인데, 평생 회사 일에 쫓겨 다니느라 정작 그들의 어린 시절이나 사춘기, 그러니까 아버지가 가장 필요한 시절에 그들과 정서적인 유대감을 형성할 기회가 없었다. 화목하지 않은 가정이라고는 할 수 없지만, 화기애애한 가정도 아니었다. 

하지만 그가 요리학원에서 어느 정도 요리법을 마스터하고, 아마추어치고는 제법 요리사 시늉을 낼 수 있을 정도가 되자 상황이 일변했다. 부녀지간 혹은 부자지간에 뭔가 어색하고 데면데면했던 분위기가 정답고 화기가 넘치는 분위기로 확 바뀐 것이다. 그가 와인과 함께 만들어 내온 파스타나 스테이크를 함께 맛보면서, 부부간의 정이 더욱 애틋해졌고, 부모·자식 간에는 전에 없던 친밀감이 생겼다고 한다. 

여기서 한발 더 나아가 이제는 아들이나 딸이 친구들을 초대해 ‘아빠의 요리’를 선보인다고 한다. 선배 A씨는 지금이 당신 일생에서 가장 행복한 시절이라고 단언한다. “내가 아들딸과 소통하는 것도 행복한 일인데, 그들의 친구까지 대접하면서 공감대를 만들어 가는 이런 날이 올 거라고는 꿈도 꾸지 못했어. 이런 게 일상의 기적이 아니라면 뭐가 기적이겠어?” 

요즘 우리 주변에 요리에 관심을 가지고 취미 삼아 혹은 생계로 하는 남자들이 제법 많아졌다. 남자가 부엌에 들락거리면 집안에 흉한 일이 생긴다느니 어쩌니 하는 어이없는 미신이 관습이었던 시절이 있기는 했었나 싶을 정도로 아득한 옛이야기가 됐다. 이젠 ‘셰프’라는 말이 완전히 새로운 일상 언어로 정착했을 정도다. 

원래 우리는 식당에서 요리하는 이들을 ‘요리사’ 혹은 ‘조리사’라고 불렀다. 그런데 어느새 요리사라는 말이 셰프라는 말로 대체된 것이다. 셰프는 ‘주방장(chef de cuisine)’을 뜻하는 말이다. 어원상으로도 우두머리를 뜻하는 치프(chief)와 같다. 사실 요리사, 조리사가 직업명이고, 셰프, 주방장은 지위명인데 이게 혼용되고 있는 것이라고 한다. 대학 교수 중에는 평교수도 있고 학과장, 처장, 학장, 부총장, 총장 등의 직함이 따로 있다. 그런데 그냥 교수라고 부르면 될 것을 굳이 학과장 혹은 학장이라고 부르는 셈이다.

어쨌거나 그만큼 남자가 요리하는 일이 일상이 된 세상에 우리가 살고 있다는 방증일 것이다. 굳이 남녀의 성 역할이 변화한 세태를 논하지 않더라도, 요리의 즐거움에 대해서 심리학자들이 관심을 가진 지는 꽤 오래됐다. 한 연구에 따르면 사람들이 요리하는 것을 좋아하는 이유에 대한 설문조사 결과를 이렇게 몇 가지로 말한다.

다섯 가지 요리의 즐거움

먼저, 내가 남들에게 뭔가를 제공할 수 있다는 만족감이다. 사람들은 누군가에게 뭔가를 베풀 때 즐거움을 느낀다. 이것은 사람들이 이타적인 행동을 할 때 뇌에서 엔도르핀을 방출하여 이른바 ‘헬퍼스 하이(helper’s high)로 알려진 긍정적인 느낌을 생성하는 것과 유사하다. 헬퍼스 하이란 문자 그대로 도움을 주는 사람의 기분이 고조되는 현상을 말하는 심리학 용어다. 대개 사람들은 남을 돕는 봉사활동이나 자선활동을 하게 되면 심리적으로 기분이 좋아지고, 신체적으로도 반응이 좋아지기 때문에 이렇게 이름을 붙였다고 한다. 

둘째, 내 요리를 가족이 즐길 때의 기쁨이다. ‘제 논에 물 들어가는 것과 자식 입에 밥 들어가는 것보다 즐거운 일은 없다’는 속담도 있지 않은가. 사랑하는 아내와 자식들을 위해 맛난 집밥을 만들어 주는 일은 단순하지만 특별한 경험이다. 특히 저마다 복잡다단하고 특별한 가정사 때문에 서로 소원해지고 거리감이 생긴 경우에 요리를 통한 봉사는 이런 간극을 메꿀, 더없이 좋은 매개체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셋째, 여기서 한 발짝 더 나아가 요리하는 과정에서 친구 및 가족과 깊은 유대감을 가질 수도 있다. 외로움은 신체적, 정신적 건강을 위협하는 큰 위험 인자 중 하나다. 그런데 선배 A씨처럼 요리가 사람을 하나로 모으고, 사회적 관계를 형성하는 데 도움을 주는 경우도 많다. 선배가 또 다른 직업이나 직장을 구해서 바깥으로 떠돌았다면, 그는 평생 아내와 자식들에게 생경한 ‘돈 벌어다 주는 기계’에 그쳤을지도 모른다. 자식의 친구들까지 초대해 소통한다는 것은 얼마나 멋진 일인가.

넷째, 완전히 새로운 것을 실험해 보고 경험하면서 창의력과 성취력을 느낀다는 사람도 있다. 일반적으로 정신건강은 스스로가 관리 가능한 목표를 설정하고, 그에 걸맞은 바람직한 보상을 받을 때를 이상적으로 본다. 이런 맥락에서 본다면 식사를 준비하는 것은 매우 훌륭한 단기적 목표가 될 수 있다. 몇 가지 음식 재료를 가지고 뭔가 새로운 요리로 변화시키는 것은 소박하지만 새로운 예술작품을 하나 탄생시키는 것에 비유할 수 있을 것이다. 

다섯째, 요리는 사람의 스트레스를 해소하기도 한다. 사실 요리는 크게 부담을 가질 필요가 없는 부담 없는 취미가 될 수 있다. 음식 재료를 선정해서 장을 보고 재료를 씻고 다듬고 써는 것은 물론이고, 중간중간 맛을 보면서 저어 주거나 간을 보는 일에 몰두하다 보면, 바깥에서 받았던 각종 스트레스를 잠시나마 잊게 할 것이다. 끊임없이 닥치는 업무나 과제의 파도 속에서 잠시 속도를 늦추고 망중한(忙中閑)의 여유를 맛보는 것도 좋을 것 같다. 그래서 어떤 이는 요리를 스트레스를 날려버리는 ‘스트레스 버스터(stress buster)’라고 부르기도 한다. 

집에서 요리를 즐기는 한 미국인은 요리에 일종의 힐링(healing) 작용이 있는 것 같다고 말한다. “나에게 요리는 해방감을 느끼게 하는 좋은 수단이다. 요리는 나에게 일종의 치료이기도 하다. 스토브에서 끓는 수프와 와인 한 잔을 들고 하루를 마무리할 때면 뭔가 편안하고 만족스러운 기분이 들어서 기분이 좋아진다. 나는 사람들이 만들기 쉬우면서도 맛있는 간단한 레시피에 초점을 맞춰 요리를 시작해 볼 것을 권한다. 대부분의 레시피는 생각보다 쉽다. 자주 사용할 몇 가지 요리 도구에도 투자해 보자. 아름답게 세공된 도마 위에서 잘 드는 주방용 칼이 재료를 자르는 촉감과 시각적 경험보다 더 만족스러운 것은 없다.”

“새로운 별을 발견하는 것보다 새로운 요리를 발견하는 것이 우리 일상에 더 많은 행복을 가져다준다.” 프랑스의 법률가 장 브리야사바랭이 했다는 이 말이 결코 과장이 아니라는 것을 요리를 한 번이라도 해 본 사람이라면 공감할 것이다. 요리에는 나름대로 일가견이 있는 내 아들과는 달리, 라면이나 겨우 끓일 줄 아는 나의 시대착오도 이제는 바로 잡아야 할 때가 온 것 같다. 나도 이번 주에는 A 선배처럼 요리학원에 등록이라도 해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