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경제학자 조지프 슘페터는 1912년 ‘창조적 파괴’라는 개념을 통해 자본주의 성장 원리를 제시했다. 낡은 시장과 기술을 파괴(대체)하는 혁신으로 경제가 발전하고 기업은 이윤을 창출할 수 있다는 논리다. 이 개념은 오랫동안 경영계의 중요한 패러다임으로 자리 잡았다. 하지만 ‘블루오션 전략’ 창시자인 프랑스 인시아드 경영대학원의 김위찬 교수와 르네 마보안 교수의 생각은 달랐다. 파괴적 혁신에만 매몰되면 자칫 새로운 시장을 창출할 기회를 놓칠 수 있고, 기업과 일자리도 사라질 수 있다고 우려했다.

김 교수와 마보안 교수는 대신 ‘비(非)파괴적 혁신(Non-disruptive Innovation)’이란 새로운 개념을 제시한다. 기존의 시장과 기술, 일자리를 파괴하지 않고도 얼마든지 새로운 시장을 창조할 수 있다는 것이다. 한국의 김치냉장고가 대표 사례다. 김치냉장고의 등장은 기존 냉장고 시장을 파괴하지 않고도 새로운 시장을 창조해 냈다. 지난 5월 두 교수는 이 개념을 담은 신간 ‘비욘드 디스럽션(Beyond Disruption·파괴를 넘어서)’을 출간했다. 아직 한국어 번역본이 나오지 않은 만큼, 이들에게 비파괴적 혁신이 현대 사회에 주는 메시지가 무엇인지와 한국 기업에 필요한 조언을 구했다. 다음은 두 교수와의 일문일답.

‘블루오션 시프트’ 이후 6년 만의 후속작이다.
르네 마보안 교수 “2004년 ‘블루오션 전략’, 2017년 ‘블루오션 시프트’를 출간한 뒤 전 세계 기업과 대학에선 ‘블루오션이 혁신 분야를 지배하는 창조적 파괴 개념과 어떻게 다른가’라는 질문이 나왔다. 우리는 답을 찾는 과정에서 새로운 사실을 하나 발견했다. 그동안 새로운 것을 창조하려면 기존의 낡은 것을 파괴해야 한다고 생각했지만, 파괴 없이도 새로운 것을 창조할 수 있다는 사실이다. 이는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일반적인 혁신 이론과 반대다. 바로 파괴를 넘어 새로운 시장을 혁신하는 것이다.”

조지프 슘페터가 주창한 ‘창조적 파괴’ 개념이 항상 옳은 것은 아니란 뜻인가.
김위찬 교수 “슘페터의 견해에 따르면 새로운 시장의 창출은 파괴에 의존한다. 가령 한국의 타다와 택시 산업을 생각해 보자. 이 관점은 부분적으로 맞지만, 동시에 부분적으로 틀린 관점이기도 하다. 많은 새로운 시장이 (기존 시장의) 파괴 없이도 창출돼 왔고 지금도 계속 창출되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새로운 시장이 어떻게 창출되는지에 대한 완전한 그림을 그리려면 창조적 파괴의 이면도 이해해야 한다. 이를 우리는 ‘비파괴적 혁신’이라고 부른다.”

좀 더 구체적으로 설명해달라.
김위찬 “비파괴적 혁신은 완전히 새로운 개념이다. 창조적 파괴의 반대 개념으로 생각해도 된다. 창조적 파괴는 기존 산업의 경계 내에서 새로운 시장을 창출할 때 발생하는 반면, 비파괴적 혁신은 기존 산업의 경계 밖 또는 경계를 넘어 완전히 새로운 시장을 창출할 때 발생한다. 반려동물의 핼러윈 의상부터 산후조리원, 사이버 보안, e스포츠, 사회적 취약계층을 위한 금융 서비스인 마이크로 파이낸스 사업 등이 비파괴적 혁신의 대표 사례다.”

한국의 비파괴적 혁신 사례는. 
김위찬 “한국에선 (세계 최초의 김치냉장고) ‘딤채’가 친숙한 사례다. 한국인이 도시로 이주하면서 더 이상 김치를 텃밭의 항아리에 보관할 수 없게 되자, 만도 위니아가 (김치냉장고를 출시해) 새로운 시장을 창출할 수 있는 기회를 발견해 냈다. 한국인의 라이프 스타일은 변했지만, 김치에 대한 사랑이 변하지 않은 덕분이다. 딤채는 엄청난 규모의 새로운 시장을 창출했지만, 한국인이 김치 외에도 다양한 식품을 보관하기 위해 계속 구매하고 사용하는 전통적인 냉장고 산업을 파괴하지 않았다는 게 핵심이다.”

왜 우리는 비파괴적 혁신에 관심을 둬야 하나.
김위찬 “몇 가지 이유가 있지만, 두 가지만 제시하겠다. 첫째, 기업이 성장을 위해 창출하고 포착할 수 있는 혁신 기회의 지평을 넓힐 수 있어서다. 둘째, 비즈니스와 사회가 함께 번영하는 ‘포지티브 섬(positive-sum·모두가 이익을 누리는)’ 방식의 혁신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파괴적 혁신과 달리) 기존의 산업과 일자리가 사라지거나 지역사회가 피해를 보는 사회적 해악을 초래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비파괴적 혁신을 통해 경제적 이익과 사회적 이익을 모두 성취할 수 있다는 뜻이다.”

그렇다면 비파괴적 혁신이 파괴적 혁신보다 우월한가.
마보안 “비파괴적 혁신이 파괴적 혁신보다 우월한 것은 아니다. 둘은 상호 보완적이며 고유의 역할이 있다. 가령 특정 산업이 비효율적·비효과적이고, 환경과 사람에게 부정적인 영향을 준다면 파괴적 혁신이 필요하다고 본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 비파괴적 혁신을 권장한다. 기존 산업을 파괴하는 대신 그동안 해결하지 못했던 문제를 해결하고, 기존 산업의 경계를 넘어 새로운 기회를 창출함으로써 충돌 없이 성장을 이룰 수 있기 때문이다.”

인공지능(AI)의 발전으로 사람들이 일자리를 빼앗길까 봐 우려한다. 기존 산업이나 일자리를 잃지 않고도 AI 산업이 발전하려면.
마보안 “AI는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 목적에 이르는 수단이라는 점을 인식해야 한다. 생산성 향상에만 초점을 맞춘다면 대규모 실직으로 이어질 수 있다. 이는 정부와 지역사회에 큰 걱정거리가 될 것이다. 대신 AI가 비파괴적 혁신을 창출하도록 이끌어야 한다. 그럼 기존 일자리가 없어지지 않고, 오히려 새로운 일자리를 만들고 (경제)성장을 이뤄낼 수 있다.”

생산성 악화에 직면한 한국 기업들에 조언 한다면.
마보안 “기업들이 생산성을 높이기 위해 업계의 모범 사례를 벤치마킹하는 경우가 있다. 대부분은 기존 시장에서 경쟁력을 높이는 데 집중한다. 하지만 기업의 생산성이 뛰어나도 기존 산업의 경계를 뛰어넘지 않는다면 기업의 성장은 기존 산업의 수요에 휘둘릴 수밖에 없다. 즉, 기존 시장의 파이가 성장하지 않거나 줄어들면 그 기업은 언젠간 피비린내 나는 ‘레드오션(치열한 경쟁 시장)’에서 헤엄치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기업들은 레드오션에서 벗어나 블루오션에서 헤엄치는 방법을 배워야 한다. 기존 기업과 일자리를 파괴하지 않으면서도 이를 달성할 수 있다면 기업은 사회와 조화로운 성장을 이룰 수 있다. 바로 이 지점에서 비파괴적 혁신이 중요하다.”

Plus Point

경영계 뒤집은 블루오션 전략
‘하버드비즈니스리뷰’ “선도적 사상가”

2005년 김위찬 교수와 르네 마보안 교수가 공동 출간한 ‘블루오션 전략’은 47개국에서 번역돼 전 세계에서 400만 부가 넘게 팔린 베스트셀러다. 두 교수는 경쟁과 파괴적 혁신에 매몰돼 왔던 기존 경영계에 경쟁자가 없는 새로운 시장, 즉 ‘블루오션’을 창조한다면 더 큰 기회가 있다는 메시지를 전했다. 창조가 새로운 시장을 만들어 내고, 창조하는 기업만이 치열한 경쟁 속에서도 수익을 낼 수 있다는 논리다. 이후 2017년 레드오션에서 블루오션으로 이동하는 구체적인 방법과 사례를 담은 후속작 ‘블루오션 시프트’를 출간했다. 최태원 SK그룹 회장은 이 책을 계열사 임직원들에게 선물하며 일독을 권하기도 했다. 

3월 7일(현지시각) ‘하버드비즈니스리뷰(HBR)’는 창간 100주년을 맞아 두 교수를 마이클 포터 하버드대 교수, 클레이턴 크리스텐슨 하버드 경영대학원 교수와 함께 ‘선도적인 사상가(Leading thinkers)’ 4인으로 선정했다.

김우영 기자
이코노미조선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