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파키스탄이 극심한 정국 혼란에 빠져들고 있다. 부패 혐의로 축출된 임란 칸 전 파키스탄 총리 지지자들의 반(反)정부 시위에 정부가 강경 대응으로 맞서면서다. 시위대와 칸 전 총리 측근이 대거 체포되고 야권 성향 언론인이 잇따라 실종되는 등 공포 분위기가 고조되는 가운데 경제 위기까지 악화하고 있다.
칸 전 총리는 6월 4일(이하 현지시각) 로이터와 인터뷰에서 강력한 군부와 정보기관이 자신의 정당인 파키스탄정의운동(PTI)을 와해하려고 한다며 자신이 군사 법원에서 재판을 받고 수감될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또 5월 9일 자신이 체포된 후 발생한 대규모 시위와 연루됐다는 혐의로 체포된 PTI 당원 수십 명의 군사 법정 재판 절차가 시작된 점에 대해 “그것은 군부가 나를 감옥에 가둘 유일한 방법”이라며 파키스탄 군부가 오는 10월 예정된 총선에서 자신이 복권하는 것을 막고 싶어 한다고 말했다.
칸 전 총리는 5월 9일 수도 이슬라마바드 고등법원에 출석하려다 청사 입구에서 부패 방지기구인 국가책임국(NAB) 요원에게 체포됐다. 그가 체포됐다는 소식이 알려진 직후 파키스탄 전역에서 지지자들의 거센 시위가 벌어졌다. 시위대는 군부대와 언론사, 경찰서 등지를 습격했고, 정부·군 관련 시설에 불을 지르거나 도로를 봉쇄하는 등 무력 행사에 나섰다. 이에 파키스탄 경찰은 최루탄과 물대포 등으로 대응했고, 급기야 군병력까지 동원됐다. 이 과정에서 시위대 10명이 숨지고 수백 명의 시위대와 경찰이 다친 것으로 전해졌다.
파키스탄 대법원은 칸 총리가 체포된 지 2일 만인 5월 11일 그의 석방을 명령했다. 사실상 법원 경내에서 체포된 점이 불법이라는 이유에서다. 이튿날 파키스탄 고등법원은 칸 전 총리에게 2주간의 보석을 허가하고 그를 석방했다. 이후 시위는 잠잠해졌지만, 사태 여파는 지속됐다. 파키스탄 당국은 칸 전 총리의 측근과 지지자 등 5000여 명을 체포했고, 파키스탄 반테러 법원은 체포된 이들 가운데 33명을 군 법정으로 넘겼다. 칸 전 총리의 정치 기반인 PTI 주요 인사들이 탈당하거나 정치 활동을 중단했고, 현 정부를 비판해 온 야권 성향 언론인들이 잇따라 실종되며 공포 분위기가 조성됐다.
결국 칸 전 총리는 정부에 대화를 요청했다. 그는 5월 26일 유튜브 화상 연설을 통해 “현재 일어나고 있는 일들은 해결책이 아니다”며 “당국은 당장 나와 대화하자”라고 했다. 그는 “모든 국가기관이 각각의 헌법적 역할 내에서 작동하는 것이 해결책”이라며 “나의 당(PTI)과 함께 국가를 발전 궤도에 다시 올려놓는 방법을 찾자”고 말했다. 그러나 별다른 성과는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칸 전 총리는 로이터 인터뷰에서 “현재 위기에서 벗어날 방법을 찾기 위해 군부에 회담을 요청했지만, 아무런 답을 받지 못했다”고 했다.


크리켓 스타에서 ‘사상 첫 의회 불신임 총리’로
칸 전 총리는 파키스탄 국민 스포츠로 불리는 크리켓 스타 출신이다. 1992년 크리켓 월드컵 우승을 이끌며 파키스탄의 영웅으로 칭송받던 그는 PTI를 조직해 정계에 입문, 2002년 국회의원에 처음 당선됐다. 이후 2018년 총선에 출마한 그는 반부패, 정실인사 척결, 교육·의료 환경 개선 등을 공약으로 내세워 파키스탄 총리에 취임했다.
친중·친러 성향이었던 칸 전 총리는 집권 이후 미국과 서방을 배척하고 중국과 협력을 강화해 경제난을 해결하려는 행보를 보였지만, 결과는 실패였다. 결국 파키스탄 의회는 지난해 4월 경제 정책 실패, 부패 척결 공약 불이행 등을 이유로 칸 전 총리를 불신임 축출했다. 파키스탄은 잦은 쿠테타 등으로 5년 임기를 채운 총리가 없었는데, 의회 불신임 가결로 퇴출당한 총리는 그가 사상 처음이다. 칸 전 총리는 자신의 혐의를 전면 부인하며 미국 등 외국 세력의 음모와 정치 보복으로 총리직에서 밀려났다고 주장했다. 이후 그는 조기 총선을 요구하며 지지자들의 반정부 시위를 주도했다. 특히 칸 전 총리는 줄곧 자신을 몰아낸 배후 세력으로 군부를 지목했다. 지난해 11월에는 유세 도중 괴한의 총격으로 다리를 다치자, 현 정부와 군부가 함께 자신을 암살하려고 시도했다고 주장해 반정부 여론에 불을 지폈다.
파키스탄 군부는 영국 식민지에서 독립한 후 여러 차례 쿠데타를 일으켜 직접 정치에 참여했다. 지금은 정계 전면에 나서진 않지만, 파키스탄 정치, 사회에 막강한 영향력을 미치는 것으로 알려졌다. 칸 전 총리도 2018년 총선 때 군부의 지원을 받았는데, 2019년 당시 ISI 수장이었던 아심 무니르를 경질하며 군부와 사이가 틀어졌다는 분석이 나온다. 무니르는 칸 전 총리 해임 이후 정권을 잡은 셰바즈 샤리프 총리가 파키스탄 육군 사령관에 임명한 인물이다. 칸 전 총리는 로이터 인터뷰에서 “무니르 사령관이 왜 나를 외면하는 데 집착하는지 모르겠다. 내가 사임을 요청해 원한이 있는 것 같다”고 말하기도 했다.
경제 악재에 정치 혼란까지…디폴트 우려 확산
정국 혼란 속 이미 망가졌던 파키스탄 경제 상황은 더 악화하고 있다. 지난 2월 글로벌 신용평가사 무디스는 파키스탄의 신용등급을 ‘Caa3’로 하향 조정했다. 지난 30년간 가장 낮은 수준이다. 국제통화기금(IMF) 구제금융 프로그램 지원 협상에서도 난항을 겪고 있는 파키스탄이 곧 디폴트(채무불이행)에 빠질 수 있다는 경고가 나온다.
대외경제정책연구원(KIEP)이 6월 2일 발간한 ‘파키스탄의 복합위기와 시사점’ 보고서에 따르면, 현재 파키스탄의 기준금리는 21%로 아시아 국가 중 가장 높다. 파키스탄의 연간 소비자물가 상승률은 지난 4월 사상 최고치인 36.4%를 기록했다. 물가 상승과 소득 감소로 정부의 식량 지원에 의존하는 국민이 늘어나면서 최근 식량 배급소에서 압사 사고가 발생하기도 했다.
채무 위기도 심각하다. 현재 파키스탄의 대외 부채는 약 1000억달러(약 132조원) 규모로 추산된다. 그러나 파키스탄 중앙은행의 외환보유액은 지난 4월 기준 약 50억달러(약 6조5300억원) 수준에 그쳤다. 무디스에 따르면 올해 6월까지 파키스탄이 상환해야 할 부채는 70억달러(약 9조1400억원) 규모다. 파키스탄 정부는 2019년 IMF와 구제금융 지원에 합의했지만, 구조조정 등 정책 이견으로 전체 지원금(65억달러·약 8조6290억원) 가운데 일부만 받았다. 마지막 지원금을 받은 지난해 8월 이후 IMF와 협상을 지속했지만, 아직 추가 구제금융 지원금을 받지 못했다. 그레이스 림 무디스 애널리스트는 “올해 파키스탄 회계연도가 끝나는 6월까지는 외국 채권자에게 원리금을 지급할 수 있을 것으로 보이지만, 그 이후 파키스탄의 자금 조달 옵션은 불확실하다”며 “외환보유액이 매우 부족한 상황에서 IMF 구제금융이 없다면 파키스탄은 디폴트를 선언할 수 있다”고 했다.
인구수 2억3000만 명의 세계 5위 인구 대국인 파키스탄의 경제가 파탄 위기에 몰린 주요 원인으로는 중국 일대일로(一帶一路·육해상 실크로드) 프로젝트가 꼽힌다. 파키스탄은 일대일로 프로젝트에 참여하면서 중국 자본을 끌어와 대규모 인프라 투자를 지속했고, 대외 부채는 기하급수로 늘었다. 파키스탄의 대외 부채 중 약 30%가 중국에 진 빚으로 추산된다. 이런 상황에서 코로나19 사태, 우크라이나·러시아 전쟁에 따른 에너지 수입 가격 상승, 국제 금리 상승, 지난해 발생한 최악의 홍수 피해(피해액 149억달러 규모) 등 각종 악재가 겹치며 경제 상황이 급속도로 악화한 것이다.
칸 전 총리 해임 후 혼란한 정국은 경제 위기 우려를 더하고 있다. KIEP는 “칸 전 총리가 올 10월 예정된 총선에 참여하지 못할 경우 시위가 격화할 수 있다”며 “정치 위기와 더불어 채무, 국민 생활고 등 위기 요인이 파키스탄 재정을 악화하고 외부 자금 확보를 어렵게 해 디폴트 가능성을 키울 수 있다”고 지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