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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누라와 자식만 빼고 다 바꿔라.” 

30년 전인 1993년 6월 7일 고(故) 이건희 삼성전자 선대 회장은 독일 프랑크푸르트 인근 켐핀스키호텔에서 전 세계 수백 명의 삼성그룹 임원을 소집해 “국제화 시대에 변하지 않으면 영원히 2류나 2.5류가 될 것”이라며 이같이 선언했다. 이른바 ‘신(新)경영 선언(프랑크푸르트 선언)’이다. 

이 선대 회장은 이 자리에서 “결국, 내가 변해야 한다. 또 바꾸려면 철저히 바꿔야 한다”며 “삼성그룹 가족은 15만 명이다. 모든 가족이 한 방향으로 나아가면 속도는 15만 배가 빨라진다. 그러나 제각각 움직이면 제자리에서 맴돌게 되는데, 지금 우리가 처한 상황이 그렇다”고 했다. 당시 삼성은 국내 1등 기업이었지만, 해외에선 그 가치를 인정받지 못하는 상황이었다. 

이 선대 회장은 양(量)이 아닌 질(質)적 성장도 강조했다. “양을 없애고 질을 향하라고 했는데 아직도 양을 향하고 있다. 불량을 없애라, 불량은 적이다, 암이다 하는데 질을 향하지 않고 있다.” 리더십의 중요성도 역설했다. 그는 “어느 조직이든 좋은 쪽 5%와 나쁜 쪽 5%가 극단을 이루고 있고 나머지는 어느 쪽이 잘되느냐에 따라가게 돼 있다”며 “경영자의 역할은 뒷다리를 붙잡는 5%를 집어내고 잘하려는 5% 쪽에 힘을 몰아줘 그 방향으로 나가도록 하는 데 있다”고 했다. 

이후 삼성은 대대적인 혁신에 나섰고, 글로벌 일류 기업으로 발돋움했다. 1993년 41조원이던 삼성전자 자산 규모는 지난해 448조원으로 10배 넘게 증가했고, 같은 기간 매출은 28조6847억원에서 302조2313억원으로 늘었다. 4만7600명이던 인력도 12만1400명으로 증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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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영 패러다임 ‘양’에서 ‘질’로 선회 

6월 7일, 이 선대 회장의 신경영 선언이 30주년을 맞았다. 신경영 선언은 양을 중시하던 기존 삼성의 관행에서 벗어나 질을 중시하는 쪽으로 경영 방향을 선회하는 계기가 됐고, 결과적으로 ‘글로벌 삼성’의 밑거름이 됐다는 평가를 받는다. 

이 선대 회장의 신경영 선언은 ‘삼성이 변하지 않으면 망할 수 있다’는 위기감에서 나왔다. 그가 회장에 취임한 지 5년이 지난 1993년이었다. 그해 초 미국 한 가전 매장을 찾은 이 선대 회장은 제너럴일렉트릭(GE), 필립스, 도시바, 소니 등에 삼성 제품이 밀려 귀퉁이에서 먼지가 쌓인 채 있는 모습을 목격하고 큰 충격을 받았다. 그는 삼성 제품이 싸구려 취급을 받은 것에 격노했고, 뼈를 깎는 수준의 혁신을 해야 글로벌 경쟁에서 승리할 수 있다고 여겼다. 그해 발생한 이른바 ‘세탁기 사건’도 이 선대 회장에게 위기감을 안겼다. 세탁기 뚜껑 부품이 들어맞지 않자 삼성 직원들이 칼로 깎아내는 모습이 사내 고발 방송 카메라에 포착된 것이다. 이후 이 선대 회장은 독일 출장에서 전 세계 삼성 임원을 불러 모았고 “바꾸려면 철저히 다 바꿔야 한다. 극단적으로 말해 마누라와 자식만 빼고 다 바꾸라”고 일갈했다. 

신경영 선언 이후 삼성은 그야말로 ‘괄목상대’했다. 이듬해 애니콜 브랜드 휴대전화를 선보였고, 세계 최초로 256메가 D램을 개발했다. 이어 1996년 1기가 D램을 만들어 글로벌 휴대전화와 반도체 시장의 주도권을 잡았다. 최고의 품질을 지향하는 조직 문화도 이때 만들어졌다. ‘라인 스톱’ 제도가 대표적이다. 이 선대 회장은 공장의 한 라인에서 불량 제품이 나오면 라인 전체를 멈추는 라인 스톱 제도를 도입했다. 그 결과 1993년 불량률이 전년 대비 두 자릿수로 줄었다. 애니콜 휴대전화 불량품 15만 대, 약 150억원어치를 전량 폐기한 1995년 ‘애니콜 화형식’도 유명한 품질 경영 일화다.

이재용 회장 ‘제2의 신경영’은 

신경영 선언 30주년을 맞은 2023년 현재, 재계는 아버지 이건희 선대 회장을 이어 삼성을 이끄는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의 리더십을 주목하고 있다. 특히 현재 삼성은 미·중 글로벌 기술 패권 전쟁과 경기 둔화 등으로 위기에 처했다. 올해 1분기, 삼성전자가 14년 만에 반도체 부문에서 영업손실(4조5800억원)을 냈을 정도다. 

이 회장은 2020년 ‘승어부(勝於父·아버지를 능가함)’를 언급하며 “국격에 맞는 새로운 삼성을 만들어 (돌아가신) 아버님께 효도하고 싶다”고 밝힌 바 있다. 2021년 이건희 선대 회장 1주기 추도식에선 “고인에게 삼성은 삶 그 자체였고, 한계에 굴하지 않는 ‘과감한 도전’으로 오늘의 삼성을 일궜다”며 “이제 겸허한 마음으로 새로운 삼성을 만들기 위해 우리 모두 함께 나아가자”고 했다. 

이 회장은 지난해 10월 회장 취임 후 특유의 글로벌 네트워크를 바탕으로 미래 성장 동력 확보에 적극적으로 나서고 있다. 그는 2007년 삼성전자 고객총괄책임자(CCO)에 오른 이후부터 삼성의 고객, 협력사 등 전 세계 주요 최고경영자(CEO)들을 만나는 등 인맥을 다져왔다. 재계에선 ‘JY(이재용) 네트워크’로 통한다. 

이런 상황에서 올해 5월 이 회장의 미국 장기 출장이 집중 조명되고 있다. 이번 출장에서 이 회장은 젠슨 황 엔비디아 CEO, 사티아 나델라 마이크로소프트(MS) CEO, 일론 머스크 테슬라 CEO 등을 만나 인공지능(AI), 자동차 전장용 반도체, 바이오 등 삼성의 미래 성장 사업과 관련 비전을 공유하고 협력 방안을 논의했다. 

특히 이 회장과 젠슨 황 CEO의 만남이 주목받고 있다. 5월 10일(현지시각) 미국 실리콘밸리에서 만난 두 기업인은 AI 반도체 관련 시너지 창출 방안과 파운드리(반도체 위탁생산) 협업 방안을 이야기한 것으로 알려졌다. 엔비디아는 생성형 AI 서버에 들어가는 그래픽처리장치(GPU)를 생산하고 있다. 칩 생산 때는 삼성전자 같은 파운드리 기업을 활용한다. 머스크 CEO와 회동은 완전자율주행(FSD·Full Self Driving) 반도체 공동 개발을 포함한 AI 등 미래 기술에 대해 폭넓게 교류하겠다는 의지를 보인 것으로 풀이된다. 

이 회장은 이번 미국 출장 기간 호아킨 두아토 존슨앤드존슨 CEO, 조반니 카포리오 BMS CEO, 누바르 아페얀 플래그십 파이어니어링 CEO, 크리스토퍼 비에바허 바이오젠 CEO 등 글로벌 제약·바이오 거물도 만나 바이오 사업 경쟁력 강화와 신사업 발굴을 위한 협력 방안을 논의했다. 삼성바이오로직스 북미법인을 찾아 “반도체 성공 DNA를 바이오 신화로 이어가자”며 바이오 분야 성장 의지도 다졌다. 삼성은 2010년 바이오를 신수종 사업으로 정한 뒤 투자를 지속해 왔다. 2011년에는 그룹 바이오의약품 개발 및 생산 계열사 삼성바이오로직스를 설립했다. 

나아가 이 회장은 AI 등 미래 성장 사업에 맞춰 창의성이 발현될 수 있는 유연한 조직 문화를 조성하는 것도 고민 중이다. 이 회장은 “선대의 업적과 유산을 계승·발전시켜야 하는 게 나의 소명”이라며 “세상에 없는 기술에 투자해야 한다. 그리고 인재들이 마음껏 뛰놀 수 있는 조직 문화, 도전과 열정이 넘치는 창의적인 조직을 만들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박용선 기자
이코노미조선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