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오늘의 마지막 품목, ‘무지홍인(无纸红印)’입니다. 시작가 1억원부터 200만원씩 호가하겠습니다. (중략) 1억9000만원 나왔습니다. 2억원, 2억1000만원 나왔습니다. 2억1000만원, 축하드립니다.”
5월 26일 서울 중구 르메르디앙호텔에서 보이차 거래 플랫폼 에세티(ASSETTEA)를 운영하는 스타트업 ‘끽다’가 국내 최초로 보이차 경매를 진행했다.
357g 정도인 보이차 한 편(측량 단위, 보이차를 떡처럼 뭉쳐 편편하게 한 것)의 최고 낙찰가액은 2억1000만원. 1950년대 중국 윈난성 쓰쐉반나주에서 생산된 ‘무지홍인’이 그 주인공이었다.
경매로 나온 보이차는 총 11종으로, 전체 낙찰가액은 4억4800만원이었다. 경매 응찰자는 40여 명으로 대부분 40~70대 남성이었다. 중국과 두바이, 모로코 등에서 온 외국인 7명도 참여했다. 정장 차림의 남성들이 응찰 팻말을 연거푸 들며 치열한 경합을 벌였다.
호가 경쟁 끝에 최종 낙찰자가 된 40대 남성은 소감을 묻는 기자의 질문에 “대리인 자격으로 참여했다”고 답을 피하면서도 “미술품과 유사한 시장이라고 보면 된다”고 말했다. 최소 30년 이상 발효 과정을 거쳐야 제맛을 내는 보이차는 공급이 부족해 부르는 게 값이다. 골동품이 비싼 값을 받는 것과 같은 이치다.

경희대 미술대 한국화과, 성균관 유학대학원 동양미학 수료, 선향다례원 차 전문가 1,2 과정 수료, 일본 우라셍케 입회수업 수료, 전 끽다거 차문화연구소 소장 사진 허지윤 기자
보이차, 과거 中 상류층 관시 여는 열쇠 역할
1900년대 중국 유산계급(有産階級)의 전유물이었던 보이생차는 1960년대 문화대혁명 등 정치적 영향으로 생산이 막혔고 홍콩과 대만으로 반출됐다. 현재 골동품급 진품 노차(老茶)를 구하기 어려운 이유다. 이 때문에 귀한 진품 보이차는 오래전부터 중국 상류 사회에서 중시되는 ‘관시(關係)’를 풀 열쇠로도 활용되고 있다.
해외 사업가라고 밝힌 다른 응찰자는 “1988년 생산된 ‘8892 후기홍인’ 두 편을 자녀 앞으로 사뒀다”면서 “귀한 고급 차(茶)는 중국과 중동 지역 주요 인사들과 네트워크를 쌓는 데 도움이 된다”고 말했다. 그가 당시 한 편당 1500만원에 샀던 찻값은 이번 경매에서 4300만원에 거래됐다.
보이차 경매시장이 급성장한 데는 보이차가 중국 부호들의 부를 과시하기 위한 수단이 된 영향이 크다. 세계 부자들이 차(茶)를 사는 데는 귀한 차를 마시며 탐닉하려는 목적도 있지만, 가격 상승을 기대하고 접근하는 측면도 있다. 실제로 규모나 가격, 세부 요건 등에 따라 과세 체계가 촘촘한 부동산과 주식, 미술품 등 다른 자산군과 달리 보이차는 세금도 다소 모호하다. 보이차는 개인 간 거래되는 중고 물품 거래 형태인데, 우리나라나 중국 등은 가격과 관계 없이 일시적인 중고 물품 거래에 대해선 세금을 부과하지 않기 때문에 증여 수단 등으로 각광받고 있다.

“30년 이상 진품 생차만 12만 편 보유”
국내 보이차 경매시장의 첫 문을 연 끽다는 1910년에 제작된 보이차부터 현재 만들어진 보이차까지 120여 종, 30년 이상 진품 생차만 무려 12만 편을 보유하고 있다. 일반적으로 하루에 3~4명이 한자리에서 함께 차를 우려내 마실 때 보이 찻잎의 양이 10g이다.
5월 31일 서울 종로구 북촌로에서 만난 안성희(39) 끽다 대표는 “발효시켜 만드는 보이차는 일반 차와 달리 오래 둘수록 맛이 깊어지고 가격도 오른다”면서 “할아버지가 발효해서 손자가 마시는 차”라고 소개했다. 끽다는 ‘차나 한잔 들게’란 뜻의 불교 용어 끽다거(喫茶去)에서 나온 말이다.
끽다는 홍콩옥션, 영원다행, 베이징차협회 등 믿을 수 있는 기관과 진품 인증 및 판매 제휴를 맺고 진품 감별, 실물 안심 보관 서비스까지 통합적으로 제공하는 온라인 글로벌 표준 차 거래 플랫폼 ‘에세티(ASSETTEA)’를 개발해 올해 출시했다. 에세티를 통해 다양한 진품 보이차에 대한 정보를 데이터화하고, 블록체인 기술을 활용해 진품 여부를 인증·보관·관리·거래하는 시스템을 구축했다.
안 대표는 “중국 부호와 우리나라 보이차 애호가들은 희소성이 큰 진품 노차대에 투자한다”면서 “골동품급 보이차 매물은 한정돼 있는 반면, 이를 원하는 수요는 많아 시간이 지날수록 가치가 오른다”고 했다. 다음은 안성희 대표와 일문일답.
보이차가 언제부터 부자들의 투자 대상이 됐나. 대박 사례도 있나.
“중국의 차 사랑, 차 문화는 오래전부터 시작됐지만, 투자 시장이 급성장 한 건 중국 경제가 성장하면서다. 세계 옥션 시장에서 보이차 경매가 시작된 것은 2000년대다. 소더비(Sotheby’s) 등 세계 경매 회사들이 보이차 경매를 매년 연다. 지난 1936년 당시 시세 2.6홍콩달러(약 443원)에 판매됐던 보이차 ‘송빙호’는 2019년 홍콩 옥션에서 1560만5000홍콩달러(약 26억6200만원)에 낙찰됐다.”
시중에서 보이차를 구하는 게 어렵지 않다. 중국 여행 가면 다들 사 오지 않나. 어떤 차가 투자 가치가 있나.
“보이차라고 해서 가격이 다 오르는 게 아니다. 투자 가치가 있는 보이차는 매우 한정돼 있다. 첫째, 중국 윈난성의 야생차 나무의 잎이어야 한다. 둘째, 그 야생차 나무의 나이가 최소 150년 이상은 돼야 가치가 있다. 1000년 이상의 차나무도 현재 살아 있다. 윈난성 야생 차나무는 모두 나무마다 관리 번호가 부여돼 있고 허가받은 이들만 채취할 수 있게 돼 있다. 셋째, 생차여야 한다. 시중에 판매하는 보이차의 99%는 숙차다. 보이차는 본래 30년 이상 후 발효돼야 마시기에 적합한데, 숙차는 악퇴발효 방식을 통해 짧은 기간에 선발효해 대중적으로 음용하기에 적합하도록 만든 것이다. 경매시장에서 드라마틱한 가격 상승이 이뤄지는 건 생차다. 투자 목적으로 접근한다면 숙차가 아닌 생차를 사야 한다. 넷째, 족보가 있어야 한다. 다섯째, 이 조건을 모두 갖추면서 진품이어야 한다. 현재 유통시장에 가품(가짜)이 너무 많다. 진품인 줄 알고 속아 사는 사람이 많은데, 전문가와 감별 시스템을 통해 이를 판별할 수 있다. 보관·관리·유통 등의 신뢰도도 매우 중요하다.”
끽다가 보이차 거래 플랫폼 에세티를 개발한 배경은.
“국내에서도 투자 목적으로 보이차를 구매하는 사람이 늘고 있는데, 가품 유통 거래로 피해 사례가 늘고 있다. 보관 상태에 따른 품질 관리 문제도 있다. 한국 보이차 1세대인 부모님은 차 시장과 문화가 변질하는 것에 대한 우려가 컸다. 블록체인·인공지능(AI) 등 IT와 빅데이터를 활용하면 보이차 거래 시장을 보다 투명하고 안전하게 만들 수 있다고 봤다. 차 감별에 대한 노하우를 갖춘 끽다와 각 IT 분야 전문가들이 뜻을 모으게 됐다. 사실 부모님을 설득하는 게 쉽지는 않았다. 기획 및 법무 검토, 세무 검토 후 개발까지 4년가량 걸렸다. 다양한 전문가의 자문을 모두 거친 뒤 NFT(Non Fungible Token·대체 불가 토큰)의 기술을 활용해 진품 인증 및 거래 기록 추적 시스템을 구축했다. 이를 통해 진품을 판별하고 인증서를 발급하고 가격과 거래 내역도 투명화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