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일 애증 역사가 담긴 검푸른 현해탄
야마구치현은 일본 혼슈(본섬) 서쪽 끝에 있는 곳이다. 메이지유신으로 번(藩)이 없어지기 전까지 조슈(長州)로 불렸다. 부산(釜山)에서 부관훼리를 타면 시모노세키항까지 연결된다. 이 항로에는 한일 간 애증의 역사가 배어 있다. 조선통신사들이 이 항로를 따라갔고, 20세기 일제 강점기 당시 강제징용을 갔던 조상의 아픈 눈물이 흘러간 바닷길이다.
부산~시모노세키 항로는 1905년에 운항을 개시한 관부(關釜)연락선이 기원이다. 시모노세키의 한자 뒷 글자와 부산의 앞 글자를 따서 만들었다. 제2차 세계대전에서 일본이 패하면서 한일 간 정기 해상 교통이 끊겼다가 1970년 운항을 재개했다.
3일 새벽 도착한 시모노세키 앞바다는 고요했다. 바람 한 점 없는 맑은 날이었지만, 바닷속을 들여보니 검푸른 물결이 출렁였다. 혼슈 시모노세키와 규슈 북서부 인근 해역은 현해탄(玄海灘)으로 불린다. 玄은 ‘어두운’ ‘검은’의 뜻이 있다. 일본에서는 ‘현계탄(玄界灘)’으로 주로 쓴다.
시모노세키항 인근 해안에 있는 조선통신사 상륙 기념비를 찾아갔다. 조선통신사가 일본 본섬에 도착한 것을 기념해 한일의원연맹에서 세운 것이다. 1592년 임진왜란을 일으킨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죽은 뒤 에도막부를 연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조선과 국교 회복을 요청한다. 조선은 일본과 외교를 탐탐지 않게 생각했으나 포로 송환 등을 목적으로 약 300~500명으로 구성된 조선통신사를 16차례 파견하게 된다.
야마구치에서 일본의 깊은 ‘속살’을 봤다
야마구치는 중세 시대부터 ‘서쪽의 교토(수도)’로 불릴 정도로 번성했다. 시모노세키와 하기(萩)에는 옛 무사 문화의 흔적이 남아 있다. 교토를 모방해 만든 무사의 주거지를 하기 ‘성하 마을’에서 만날 수 있다. 메이지유신 발상지인 하기는 ‘하기야키’ 도자기로도 유명하다. 교토의 라쿠야키, 사가의 가라쓰야키와 함께 일본 3대 도자기로 꼽힌다. 하기야키의 기원은 임진왜란 당시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무장으로 조선에 출병한 모리 데루모토에게 붙들려 간 도공 이작광, 이경 형제다.
조선통신사 상륙 기념비의 도로 건너 언덕 쪽에 1937년 개관한 일청강화기념관 건물이 있다. 청국과 일본 간 강화회의(1894년 3월 20일~4월 17일)가 열린 장소다. 조선인이 참석하지 못한 시모노세키의 한 식당에서 조선의 운명이 결정됐다. 일본 측에서 이토 히로부미, 청나라에선 리홍장이 대표로 참석했다. 11개 항목으로 구성된 조약문이 기념관 벽에 걸려 있다. 1조에 ‘조선국의 독립과 청국에 대한 조공 폐지’를 명시했다. 실제로는 조선에 대한 청의 영향력을 없애는 대신 일본의 조선 개입을 허용하는 내용이다. 1894년 발발한 청일전쟁은 동학농민운동의 진압을 이유로 조선에서 벌어졌다.
일본 근대화, 산업화 역사 150년 넘어
시모노세키항에서 버스로 1시간 30분 정도 떨어진 하기는 1868년 일어난 메이지유신의 발상지다. 일본은 메이지유신을 통해 아시아를 대표하는 경제·군사 강국으로 부상한다. 미국과 서유럽 몇 개국을 제외하면, 19세기 말까지 산업혁명과 헌정(憲政)을 함께 이룬 나라는 동양에서 일본이 유일했다. 당시 메이지유신을 감행한 주도 세력의 근거지가 바로 조슈와 사쓰마(현 가고시마)번이다.
하기에는 메이지유신의 사상적 기반을 제공한 요시다 쇼인(吉田松陰)의 유적지 쇼카손주쿠(松下村塾)가 있다. 일본의 우파 정치인들이 존경하는 정치사상가가 요시다 쇼인이다. 쇼카손주쿠 안내판이 보이는 곳에 버스를 세우니 관광 안내를 하는 자원봉사자가 다가왔다. 그를 따라 기와지붕의 단층 목조건물로 갔다. 8칸 다다미방의 작은 시설이다. 이곳에서 28세 쇼인은 1857년부터 동네 젊은이들을 대상으로 교육을 시작했다. 메이지유신 11년 전이다. 그는 신분과 계급에 상관없이 제자를 받아들여 3년 정도 가르쳤다. 강의실로 썼던 방에 애제자 13명의 초상화가 걸려 있다. 초대 총리를 지낸 이토 히로부미를 비롯해 데라우치 마사다케, 기도 다카요시, 이노우에 가오루 등이 그의 제자다. 메이지유신을 성공시킨 주역들이다.
요시다 쇼인은 홋카이도 개척, 류큐(현 오키나와· 당시 반독립국)의 일본령화, 조선 속국화, 만주·대만·필리핀 영유화 등을 주장했다. 대외 개방과 부국강병을 내세운 쇼인의 사상은 메이지유신의 토대가 됐다. 역대 일본 총리들의 아시아 진출 정책의 뿌리가 되기도 했다. 그는 메이지유신 9년 전인 1859년 29세의 나이에 참수된다. 이곳에서 걸어서 5분 거리에 그의 제자인 이토 히로부미 고택이 있다. 우리에게는 불편한 장소지만, 그의 생애를 통해 일본이 150여 년 전에 어떻게 부국강병의 길을 걸어갔는지를 알 수 있다.
장기간 축적된 지식과 기술이 일본의 저력
하기에는 조슈번이 1718년 창설한 메이린칸(明倫館)이 있다. 일본 3대 근대 학교로 불렸던 곳이다. 당시 쓰였던 목조 교실 곳곳에 일본 근대화와 산업화 과정을 알 수 있는 자료를 전시 중이다. 현미경이나 측량기, 각종 수술 도구와 현대식 무기 등 과학기술과 산업 발전을 보여주는 실물 자료도 많다. 여행에 동반한 한 참가자는 “150여 년 이전부터 일본이 이렇게까지 과학과 기술 발전에 노력했다는 사실을 보고 깜짝 놀랐다”며 “당시 조선은 뭘 했는지 참으로 안타깝다”라고 말했다.
시모노세키와 하기를 둘러보고 귀국한 6월 5일, 일본 증시는 버블 붕괴 이후 33년 만에 최고치를 기록했다. 1990년 7월 이후 최고 수준이다. 글로벌 경제 불안 속에 외국인 자금이 일본으로 모이는 데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을 것이다. 오랜 기간 축적된 지식과 기술 그리고 기초 산업이 일본 경제의 저력 아닐까 하는 생각이다.
국제사회에서 힘없는 국가의 운명은 1세기 전이나 지금이나 똑같다. 우크라이나·러시아 전쟁이 그걸 생생하게 보여준다. 5일 새벽 눈을 뜨니 멀리 부산항 불빛이 눈에 들어온다. 지금 대한민국호는 어디를 향해 가고 있는 것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