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직(失職)하거나 배우자와 사별하고 심각한 장 질환에 시달리는 사람들이 있다. 이를 뒷받침하듯 스트레스가 심각한 장 염증을 유발하는 이유가 동물실험으로 밝혀졌다. 연구가 발전하면 염증성 장 질환을 치료하는 새로운 방법이 개발될 것으로 기대된다.
미국 펜실베이니아대 의대의 크리스토퍼 타이스(Christoph Thaiss) 교수 연구진은 5월 25일(현지시각) 국제 학술지 ‘셀’에 “뇌에서 나온 스트레스 감지 신호가 장에서 염증 유발 물질을 분비시킨다”고 밝혔다. 스트레스를 받은 뇌가 장 질환을 부른다는 것이다.
부신피질 스트레스 호르몬이 장 염증 악화시켜
스트레스를 심하게 받으면 장 염증이 악화하면서 염증성 장 질환(IBD)을 부른다. 궤양성 대장염과 크론병이 IBD의 대표적 예다. 환자는 복통, 설사, 피로를 겪는 것은 물론이고, 심지어 생명을 잃는 위험에 빠지기도 한다. 치료받아도 스트레스를 받으면 다시 증상이 악화하는 경우가 많다.
연구진은 스트레스와 장 염증 사이의 연관 관계를 밝히기 위해 일주일 동안 생쥐 8마리를 매일 3시간씩 작은 원통에 집어넣어 스트레스를 받도록 했다. 그다음 일주일은 화학 자극제를 투여해 염증성 장 질환 증상을 유발했다. 뇌가 스트레스를 감지하면 신장 위의 부신피질에 신호를 보내 당질코르티코이드(glucocorticoid)라는 스테로이드 호르몬을 방출시킨다. 당질코르티코이드는 인체 면역 반응을 억제하고 염증 반응을 낮춰 치료제로도 쓰인다. 하지만 이번 실험에서는 정반대 결과를 보였다.
연구진은 스트레스와 염증성 장 질환을 유발한 생쥐 3마리에게 당질코르티코이드 호르몬을 차단하는 약물을 투여했다. 이후 대장 내시경으로 생쥐의 장을 검사해 염증과 손상 정도를 0~15점으로 평가했다. 점수가 높을수록 상태가 나쁘다는 말이다. 실험 결과 스트레스 호르몬 차단제를 투여한 생쥐들은 평균 5점이었지만, 약을 주지 않은 생쥐들은 15점에 가까워 당질코르티코이드가 염증을 더 악화시키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번 결과는 당질코르티코이드가 염증성 장 질환 치료에도 사용되는 약물이라는 점에서 더 주목받았다. 약으로 쓰던 물질이 사실 병을 부른다는 말이 되기 때문이다. 연구진은 당질코르티코이드는 짧은 시간 사용하면 항염증 효과가 있지만, 스트레스가 만성이 되면 시스템이 완전히 바뀌어 반대로 염증을 촉진한다고 설명했다.
신경세포가 염증 유발하고 장운동 위축시켜
연구진은 스트레스 호르몬이 장 질환을 유발하는 과정을 밝히기 위해 생쥐의 대장에서 조직을 채취해 유전자를 분석했다. 스트레스 호르몬 수치가 높았던 생쥐는 장 신경교세포에서 염증 유발 유전자의 활성이 증가했다.
교세포는 신경세포에 필요한 물질을 공급하는 후방의 지원부대와 같다. 하지만 스트레스 호르몬이 나오면 신경교세포가 면역세포를 깨우는 분자를 방출했다. 면역세포는 일반적으로 병원균과 싸우는 물질을 분비하는데, 스트레스 상황에서는 장에서 염증을 유발했다. 인체 방어군이 외부 침입자 대신 자신을 공격한 셈이다.
스트레스 호르몬은 장 신경세포의 성숙도 방해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미성숙한 신경세포는 장 근육을 수축시키는 물질을 덜 분비했다. 타이스 교수는 “위장관에서 장운동과 배변을 위해 성숙한 장 신경세포가 필요하다”고 밝혔다. 스트레스가 장운동도 위축시킨다는 말이다.
사람 역시 같은 경로로 스트레스가 장 질환을 유발한다고 연구진은 추정했다. 실제로 염증성 장 질환 환자 63명을 대상으로 스트레스 정도를 설문 조사하고, 대장 조직을 채취해 분석했다. 그 결과 스트레스를 더 많이 받는 사람일수록 장 손상이 심하고 염증이 증가했다. 타이스 교수는 “이번 연구는 스트레스 관리가 염증성 장 질환 치료 효과에 큰 영향을 미칠 수 있음을 시사한다”며 “환자의 심리적 상태를 완전히 무시해 온 기존 치료법과 상반되는 생각”이라고 말했다.
스트레스는 장내 미생물 바꿔 우울증까지 유발
스트레스가 장 건강을 망치는 것은 우리 몸에 사는 미생물로도 설명할 수 있다. 미국 하버드대 의대 브리검 여성병원 연구진은 지난 3월 국제 학술지 ‘심리 의학’에 “부정적 감정이 증가하면 장에 사는 미생물의 구성이 바뀐다”고 밝혔다.
연구진은 여성 간호사 200여 명을 대상으로 지난 30일 동안 행복감이나 희망 같은 긍정적 감정을 느꼈는지, 아니면 슬픔이나 두려움, 불안 같은 부정적 감정 상태에 있었는지 물었다. 설문 조사 3개월 후, 같은 여성들의 대변 시료를 받아 미생물 유전자를 해독했다.
분석 결과 감정 상태에 따라 장내 미생물 종류가 달랐다. 행복감을 느낀 사람에게 많은 장내 미생물이 부정적 감정 상태인 사람에게서는 수치가 낮았다. 연구진은 스트레스가 장내 미생물 종류를 바꿔 다른 질병까지 유발할 수 있다고 밝혔다.
논문 교신저자인 양-위 류(Yang-Yu Liu) 하버드대 의대 교수는 “앞서 많은 연구에 따르면 장내 미생물 군집의 교란이 불안, 우울증, 심지어 신경 장애를 포함한 다양한 건강 문제를 일으킬 수 있다”고 말했다.
스트레스가 심해지면 장내 미생물 건강도 나빠져 뇌까지 병을 얻을 수 있다. 실제로 2020년 프랑스 과학자들은 ‘네이처 커뮤니케이션’에 만성 스트레스가 장내 미생물의 칸나비노이드 생산을 줄여 우울증을 유발한다고 밝혔다. 칸나비노이드는 신경세포 생성을 촉진하는 인체 물질이다.
장내 미생물이 뇌와 장을 연결하는 통로라는 사실은 2004년부터 알려졌다. 당시 일본 규슈대 연구진은 장내 미생물을 완전히 없앤 쥐에게 스트레스를 유발하자 스트레스 호르몬이 정상 쥐보다 두 배나 많이 나오는 것을 확인했다. 장내 미생물이 스트레스에 대한 면역력도 제공했다는 의미다. 스트레스는 서로 연결된 뇌와 장을 동시에 망칠 수 있는 만병의 근원인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