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기술이전과 산업구조 변화가 이어지는 과정이 우두머리 기러기가 앞장서고 다른 기러기들이 뒤따르는 형태와 유사해 플라잉 기스 모델으로 불렸으며 ‘안행형(雁行型) 발전 모형’으로도 일컫는다. 동아시아에서는 일본이 우두머리 기러기 역할을 했다. 일본이 서구 선진국 기술을 따라잡으며 기술을 선도했고 동아시아 주변국들이 관련된 산업에서 부가가치를 생산하는 데 참여해 유사한 산업 분야에 집적효과가 나타났다. 이 과정에서 기술이전이 발생하고 역내 국가 간 공급망 연계가 강화됐으며 수출 지향적인 산업들이 확대됐다. 동아시아 국가들은 경제 발전과 기술 개발에 서로 영향을 주면서 수출 경쟁력을 키웠고 지금은 각자 첨단 고부가가치 생산 분야에까지 진출해 상호 경쟁하는 수준으로 성장했다.
동아시아 국가들은 경제 발전 과정에서만 서로 영향을 미친 것이 아니다. 지금은 발전 모형의 약점까지도 공유하는 현상을 보이고 있다. 대표적인 문제가 저출산이다. 일본의 합계출산율은 지난해 1.2를 기록했다. 이미 2007년부터 사망자 수가 출생아 수를 앞질러 15년째 인구 자연 감소가 지속되고 있다. 지난해에는 70만 명이 넘는 인구가 감소했다. 중소도시 하나의 인구가 매년 사라지고 있는 셈이다.
대만은 2022년 합계출산율 0.89를 기록했다. 출생아 수는 전년 대비 1만 명 이상 줄어들어 사망자 수보다 적어졌으며 인구는 11만674명이 감소했다. 출생아 수의 지속적인 감소로 인구의 자연 감소는 2020년부터 3년째 이어지고 있다. 싱가포르도 예외는 아니다. 싱가포르의 2022년 합계출산율은 1.1이며 2020년과 2021년 인구 자연 감소를 기록했다. 지난해 소폭 증가했으나 장기적 추세는 인구 감소로 가고 있다. 인구 문제가 가장 심각한 나라는 한국이다. 한국의 지난해 합계출산율은 잘 알려진 바와 같이 0.78이다. 동아시아 국가 중 가장 낮은 수준일 뿐 아니라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가운데서도 꼴찌다.
세계에서 가장 높은 성장률을 과시하던 동아시아 국가들이 지금은 세계에서 가장 먼저 소멸할 국가 목록 선두에 선 것이다. 주된 이유는 다음과 같다. 첫째, 높은 주택 가격이다. 1990년대에는 일본 도쿄가 세계에서 주택이 가장 비싼 곳이었다. 지금은 싱가포르가 그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한국과 대만도 비싼 주택 가격 때문에 청년의 결혼 연령이 늦춰지고 있다. 둘째는 비싼 교육비다. 동아시아 지역의 교육열은 이 지역 경제성장을 이끈 동력이기도 하지만 초등학교 이전부터 시작하는 과도한 경쟁으로 부모들의 사교육비 부담이 출산을 주저하게 하는 요인으로 지적된다. 셋째는 유교적 전통과 가부장적 문화다. 경직적인 성역할 구분 등이 저출산의 대표적 요인으로 지적된다.
플라잉 기스 모델은 동아시아 경제 발전에는 기여했지만 사회 발전까지 이끌지는 못했다. 오히려 급속한 성장이 가져온 경제성장의 과실이 자산 버블과 불평등 심화를 초래하고 과도한 경쟁 사회로 몰아가 저출산을 가져온 측면이 있다. 지금까지 축복으로 여겨진 동아시아의 성장이 오히려 미래의 소멸을 예고하는 재앙이 되지 않도록 하려면 지금부터라도 당장 사회적 변화에 나서야 한다. 그래야 지속적인 경제성장도 가능하다. 새로운 플라잉 기스 모델에서는 한국이 우두머리 기러기가 되길 기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