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에서 태어났기 때문에 한국 기업에 주목하기 시작한 것은 아닙니다. 그간 클라우드와 SaaS(Software as a Service·서비스형 소프트웨어) 시장의 가능성을 크게 봤는데, 이제 한국에도 이와 관련한 유망 기업이 많아졌기 때문입니다.”
미국 실리콘밸리에서 벤처캐피털(VC) 스톰벤처스를 이끄는 남태희 대표는 6월 7일 서울 강남구 역삼동에 있는 오렌지플래닛 사무실에서 인터뷰를 하고 한국 기업에 관심을 두는 이유가 본인의 ‘뿌리’ 때문이냐는 질문에 이같이 답했다.
남 대표는 5세에 의대 교수였던 아버지를 따라 가족과 함께 미국 세인트루이스로 건너갔다. 이후 응용수학으로 하버드대를 졸업하고, 시카고대에서 법학 박사 학위를 받은 뒤 벤처기업 투자 전문 로펌에서 변호사로 일했다.
그는 “원래 하버드대에 입학한 뒤 창업하고 싶었지만, 의대 교수였던 아버지와 타협한 결과 로스쿨에 가 변호사가 됐다”며 “벤처 업계에서 일하고 싶은 마음이 남았기에 벤처기업 투자 전문 로펌에서 일하게 됐다”고 전했다.
남 대표는 변호사로 지내면서 정보기술(IT) 기업을 포함해 약 1000개 사 투자에 관여했고, 2000년 스톰벤처스를 설립해 200여 기업에 투자했다. 그가 이끄는 스톰벤처스는 주로 기업 간 거래(B2B) 중심 기술 스타트업에 투자하고 있다. 미국 연기금으로부터 자금을 수혈받는 스톰벤처스의 총운용 자산(AUM)은 12억달러(약 1조5462억원)에 달한다.
스톰벤처스는 절반은 미국 내 기업에 절반은 그 외 지역에 투자한다. 12개 유니콘(기업 가치 10억달러 이상 비상장 기업)을 포함해 기타 성공적인 기업들의 초기 투자자로 유명하다. 2007년 코스닥에 상장한 국내 게임 회사인 컴투스에 투자를 계속해 2013년 약 1100% 수익률을 기록한 바 있다.
지난해엔 게임사 해긴에 투자했고, 직장인 커뮤니티 블라인드와 인재 검증 플랫폼 스펙터, 에듀테크 기업 클라썸 등의 주요 투자사이기도 하다.
“한국 투자 늘릴 것⋯주목할 곳은 B2B SaaS 기업”
올해 스톰벤처스가 점찍은 곳은 SaaS 기업이다. 첫 투자사로는 ab180을 골랐다. ab180은 SaaS 솔루션인 ‘에어브릿지’를 통해 국내 기업들의 광고 성과를 분석한다. 웹사이트와 모바일 애플리케이션(앱) 이용자 행동 데이터를 분석해 어떤 채널이 가장 최적의 효과를 낼 수 있는지 보여준다.
SaaS란 패키지 형태로 제공되던 컴퓨터 소프트웨어(SW)를 클라우드를 활용해 구독형으로 전환해 제공하는 서비스를 말한다. SaaS 업체는 SW를 구독 형태로 기업들에 공급해 수익을 낸다. 국내에선 전사적자원관리(ERP) 프로그램을 공급하는 더존비즈온이 대표적인 SaaS 기업이다. 남 대표 역시 가장 인상 깊은 한국 SaaS 기업으로 더존비즈온을 꼽았다.
스톰벤처스는 SaaS 기업을 중심으로 국내 투자를 더 늘릴 계획이다. 최근에는 보스턴컨설팅그룹(BCG) 출신 김민주 심사역도 합류했다. 남 대표는 “과거에는 SaaS 분야에 진출한 한국 기업이 많지 않았지만, 이제는 다르다”며 “미국 SaaS 기업에 투자했던 전략에 맞춰 한국 SaaS 기업에 공격적으로 투자하고자 한다”고 말했다.
“인공지능(AI) 분야도 유망 투자처⋯엔비디아보단 구글”
남 대표는 SaaS 기업 외에도 인공지능(AI) 관련 기업도 투자처로 찾고 있다고 밝혔다. SaaS 산업 역시 AI 기술 발전 덕에 더 커질 것으로 보고 있다. 그는 AI가 SaaS에서 생성된 데이터를 분석하고 이 데이터를 SaaS가 다시 활용하는 선순환 구조가 만들어질 것이란 전망을 내놨다. 남 대표는 “클라우드와 AI를 접목한 기업들이 큰 흐름에 올라타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챗GPT 열풍이 단순한 유행에 그치지 않을 것으로 내다봤다. 챗GPT를 시작으로 AI 관련 산업이 폭발적으로 성장할 것이라는 것이다.
남 대표는 챗GPT를 인터넷 세상이 열리기 직전에 등장한 모자이크 웹 브라우저에 비유했다. 모자이크는 1993년 발표된 웹 브라우저로 최초로 대중적인 성공을 거둔 브라우저다. 이후 넷스케이프와 인터넷 익스플로러에 밀려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지만, ‘닷컴’ 역사를 연 시조로 평가받는다.
남 대표는 “과거 모자이크 웹 브라우저가 나오면서 사람들은 머릿속에 떠다니던 인터넷에 대한 개념을 몸소 접하기 시작했고, 이후 관련 산업이 폭발적으로 성장하며 ‘닷컴’ 시대가 열렸다”며 “챗GPT를 통해 일반인도 AI를 직접 체험하게 됐고, AI 관련 산업이 크게 확대될 것”이라고 분석했다.
그는 AI의 미래를 믿는 투자자라면 하드웨어가 아닌 소프트웨어에 주목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남 대표는 “장기적으로 봤을 땐 결국 서비스가 승리한다. 엔비디아 주가가 급등했지만, 그들은 AI 인프라를 구축하는 데 기여하는 기업이다”며 “인프라가 구축되고 나면 서비스가 중요한 만큼 구글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고 귀띔했다.
“창업하기 가장 좋은 시기…선택과 집중해야”
남 대표는 힘든 시기를 겪고 있는 벤처 업계 종사자들에게 따뜻한 위로 대신 냉철한 조언을 쏟아냈다. 유동성이 넘치던 시기 불어났던 몸집을 줄여야 한다는 조언이다. 남 대표는 “애초에 지나치게 많은 직원을 뽑지 않는 것이 가장 좋지만, 필요하다고 생각한다면 해고를 망설여선 안 된다”며 “해고가 늦다는 것은 결단력이 부족하고, 저성과를 용인하는 것으로 비칠 수 있다”고 경고했다.
모두가 어려운 시기인 만큼 신생 스타트업엔 오히려 좋은 시기라는 의견도 내놨다. 남 대표는 “신생 스타트업으로 이직이나 창업을 고민하는 사람들에겐 굉장히 좋은 시점”이라며 “인터넷 태동기 이전처럼 시대적 변화가 많이 일어나고 있는 점도 긍정 요인”이라고 분석했다.
수많은 유니콘을 길러낸 만큼 벤처캐피털리스트들을 위한 조언도 잊지 않았다. 남 대표는 “다소 추상적으로 들릴 수 있지만, 큰 흐름이 무엇인지 읽어내고 그 흐름에 올라탄 기업에 투자해야 한다”며 “무엇이 큰 흐름인지 판단하고 그 분야의 전문성을 길러내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고 전했다.
오랜 기간 스타트업 업계에 몸담았던 남 대표는 본인 같은 고민을 했던 이들을 위한 책을 펴낸다. 앞으로도 벤처기업에 도움 될 만한 지식을 한국에 알릴 계획이다. 남 대표는 “출간을 앞둔 ‘생존을 넘어 번창으로’ 속편에 성장 단계별 스타트업이 고민할 만한 부분을 담았다”며 “스타트업은 단계마다 속성이 다른데 책을 보면 각 단계에서 벌어질 일과 대비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 알 수 있을 것”이라고 전했다.
회사명 스톰벤처스
본사 미국 캘리포니아주
사업 벤처투자업
창업자 남태희, 라이언 플로이드
설립 연도 2000년
총운용 자산 12억달러(약 1조5462억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