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 셔터스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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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추석이었나 보다. 오랜만에 만난 아버지와 이런저런 살아가는 이야기를 나누던 중이었다. “아빠, 아빠는 날 키우면서 언제가 제일 좋았어?” 어머니에 비하면 아버지와 나누는 대화는 대개가 뻔한 편이다. 

대화 자체가 뻔하다기보다는 주제가 그렇다는 뜻이다. 일이나 건강, 또 일이나 건강. 아버지가 내게 무관심하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다만 껍질 같은 대화만 하느라 속살 같은 대화를 나눈 적이 별로 없으니, 속마음을 주고받을 길이 우리 사이에 없는 건 당연하다. 하지만 이마저도 한 살 두 살 나이가 들어가다 보니 자연스럽게 변해 간다. 젊은 시절 봤던 그때 그 아버지보다 내가 더 나이 들었다는 걸 알게 된 뒤부터였을까. 아버지가 그냥 아버지만이 아니라 어린이였고 청년이었으며 애인이었던 남자로 보이기 시작했다. 먹고살기 위해 물불 가리지 않았던 노동자로 보였고, 자식 앞에서 커졌다 작아졌다 하는 대중없는 사람(실은 솔직한 인간)으로 보이기도 했다. 보이는 게 많아지면 물어보고 싶은 것도 많아지는 법이다.

돌아온 대답은 조금 의외였다. 아버지는 내가 아직 혼자서는 걸을 수도 없을 때, 나를 품에 안고 여기저기 걸어 다니던 시절이 살아온 시간 중 가장 행복한 시간이었다고 회상했다. 그 말은 너무 슬펐다. 너무 옛날 일이어서도 아니고, 지금은 사라져 버린 찰나의 순간이기 때문도 아니다. 사는 내내 그런 행복한 시간은 다시 오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면서도 그 말은, 나로서는 한 번도 인식한 적 없는 순간을 영원히 ‘기억’하게 해 주는 신비한 문이 되어 주었다. 아버지의 ‘품’에 안겨 있던 나의 작은 몸. 그때 그 몸의 세포들이 내게 말을 걸어오는 것 같다. 이런 일화들을 경험할 때마다 나는 인간의 몸이야말로 사랑을 쓰고 사랑을 기억하는 사랑의 전부라는 생각이 든다. 왜 아니겠는가.

박혜진 문학평론가 
조선일보 신춘문예 
평론 당선, 
한국문학평론가협회 젊은평론가상, 현대문학상
박혜진 문학평론가
조선일보 신춘문예 평론 당선, 한국문학평론가협회 젊은평론가상, 현대문학상
지넷 윈터슨의 소설 ‘프랭키스슈타인’은 메리 셸리의 소설 ‘프랑켄슈타인’을 현대적 관점으로 다시 쓴 소설이다. 이 소설에는 두 개의 시간대가 교차로 서술된다. 하나는 1818년, 메리 셸리가 ‘프랑켄슈타인’이라는 작품을 집필할 당시 겪었던 일화들이다. 흔히들 오해하는 것과 달리 프랑켄슈타인은 괴물이 아니라 괴물을 만든 박사의 이름이다. 박사는 자신의 욕망을 이루기 위해 괴물을 만들지만, 그 괴물은 자신의 통제를 벗어난 존재가 된다. 300년 전 이야기와 함께 진행되는 또 다른 이야기는 프랑켄슈타인 박사처럼 ‘영원히 사는’ 피조물을 만들어 내겠다는 욕망을 가진 공학 박사 빅터와 여성의 몸으로 태어났으나 남성의 몸으로 살기 위해 자신의 몸을 바꾸어 가고 있는 트랜스젠더 의학 박사인 라이의 사랑 이야기다. ‘프랑켄슈타인’이 18세기 산업혁명의 그늘을 예견했다면 ‘프랭키스슈타인’은 21세기 인공지능(AI) 시대의 그늘을 예견한다.

공학 박사 빅터와 의학 박사 라이는 서로를 사랑하지만 두 사람 사이에는 건너지 못할 가치관의 차이가 있다. 빅터가 인간의 꿈을 ‘데이터’화된 인간이라고 생각하는 것과 달리, 라이는 스스로 몸을 바꾸어 나갈 정도로 몸의 존재로 살아가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에게 인간의 꿈은 데이터가 아니라 ‘키스’다. 데이터와 키스는 하늘과 땅만큼이나 다르다. 데이터는 영원하다. 그것은 끝을 모르고 고통을 모른다. 그러나 키스는 순간일 뿐이다. 인간의 몸처럼 가뭇없이 사라질 것이고 인간의 몸처럼 고통 그 자체이기도 하다. 전자가 고통으로부터의 해방에서 인간의 꿈을 본다면, 후자는 고통으로 돌진하며 인간의 꿈을 본다. 

일찍이 인간은 우리가 영원히 살 수 없음을 애달파했다. 인류 최초의 문학 작품인 ‘길가메시 서사시’의 주제도 바로 그것이었다. 인간이 필멸의 존재라는 것. 반드시 사라지는 인간은 불멸을 꿈꾸며 도시를 건설했다. 도시는 사라질 수밖에 없는 인간이 사라지지 않는 세계를 향해 꾸었던 꿈의 증거이자 꿈의 실체다. 도시의 역사가 인간의 역사일 수밖에 없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그러나 인간에게 ‘영원’이라는 시간이 주어진다면 그 미래는 어떤 모습일까. 자신이 만든 것이 자신을 배신하는 프랑켄슈타인처럼 우리 또한 정신을 잃고 방황하지 않을까. 

제목인 ‘프랭키스슈타인’은 ‘프랑켄슈타인’의 가운데 ‘키스’를 삽입한 조어다. 제목을 통해 작가는 기술화에 반대한다. 300년 전 자기 피조물을 만들고자 했으나 그 피조물을 통제하지 못했던 프랑켄슈타인 박사나 스캔한 뇌와 보존된 장기를 결합해 새로운 생명체를 만들고 싶어 하는 공학 박사의 꿈보다 더 아름다운 꿈은, 영원하지 않을 줄 알면서도 자신이 원하는 몸으로 살기 위해 몸에 가해지는 차별과 혐오에 맞서는 용기 속에 있다는 것이다. 자신과 다른 몸 하나 감당하지 못하고 차별하는 우리에게 인간과 기계의 경계가 사라지는 첨단의 미래가 다 무슨 소용일까. ‘기술’보다 중요한 건 ‘키스’다. 인간과 인간 사이의 접촉이 더 절실하다.

Plus Point

지넷 윈터슨

사진 IMD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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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9년 영국 맨체스터에서 태어났다. 독실한 기독교 집안에 양녀로 입양되어 기도와 성경 속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커밍아웃하고 가출한 뒤 엄격한 집과 보수적인 교회에서 자유로워진 지넷은 아이스크림 장사, 장례식 보조, 트럭 운전사, 정신병원 도우미, 극장 허드렛일 등 여러 막일을 하며 돈을 모아 생계를 꾸려 나갈 뿐만 아니라 밤에는 공부를 해 옥스퍼드대 영문학과에 입학했다. 첫 소설 ‘오렌지만이 과일은 아니다’로 평단의 극찬을 받았으며, 그해 가장 주목할 만한 신인에게 수여되는 휘트브레드 상을 받았다. 두 번째 소설 ‘열정’으로 라이스 상을 받은 후 다양한 글을 쓰고 있다. 빈곤층, 여성, 어린이 등 사회 취약 계층의 복지에 대한 정치적 견해를 피력하기도 하는 등 소설가뿐만 아니라 사회지식인의 삶을 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