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국에서 유일하게 ‘아파트 단지’로만 구성된 행정동. 주택경기 침체기에도 1평(3.3㎡)당 9868만원에 달하는 부촌(富村). 1인당 국민소득이 818달러에 불과했던 1976년 준공됐지만, 3만2000달러(약 4160만원)가 된 지금까지 재건축이 안 되고 있는 곳. 한강 변을 끼고 있는 ‘대한민국 랜드마크’가 될 사업지. 정계와 재계는 물론 유명 연예인들까지 거주하면서 더욱 명성을 얻고 있는 곳.
서울 강남구 압구정동을 설명하는 수많은 수식어다. 압구정동은 △1지구(미성 1·2차와 신사중학교) △2지구(현대아파트, 공영주차장, 현대백화점) △3지구(동호대교와 성수대교 사이 현대아파트, 구정초·중·고교) △4지구(현대 8차, 한양 3·4·6차 아파트) △5지구(한양 1·2차 아파트) △6지구(한양 5·7·8차 아파트)로 나뉜다. ‘신(新)현대’로 불리는 곳이 2지구, ‘구(舊)현대’라고 불리는 곳은 3지구다. 따라서 통상 ‘압구정 재건축’이라고 하면 신현대와 구현대를 아우르는 지역을 말한다.
그런데 요원할 것만 같았던 재건축이 최근 들어 가시화하고 있는 양상이다. 압구정 2지구가 최종 설계안을 확정하면서 본격적으로 재건축 시동을 먼저 걸었고, 압구정 3지구도 현재 ‘설계사 공모’를 진행하면서 속도에 추격전이 붙었다. 이에 발맞춰 서울시도 압구정 2~5지구 재건축 사업에 대한 신속통합(신통) 기획안을 확정했다. 압구정 2~5지구는 2021년 서울시 신통기획에 참여해 재건축 계획안을 짜기 시작했다. 약 2년 만에 청사진이 나온 셈이다. 다만 압구정 1·6지구는 아직 재건축 추진이 활발하지 않은 초기 상황이다.
이번 기획안에 따르면 압구정 2~5지구는 재건축을 통해 1만1830가구 규모로 탈바꿈한다. 서울시는 일단 최고 층수를 50층 안팎으로 설계했다. 따라서 압구정 2지구는 현재 1924가구에서 2700가구가량으로, 압구정 3지구는 현재 3946가구에서 5800가구 안팎으로 가구 수가 늘어난다. 압구정 4지구(1341가구)는 1790가구, 압구정 5지구(1232가구)는 1540가구로 규모가 커진다. 서울시는 혁신적인 디자인을 도입해 높이 규제를 더 유연하게 적용하겠다고 했다. 강남구 중에서도 부촌의 부촌으로 손꼽히는 이곳은 과연 앞으로 어떤 변화를 맞이하게 될까. 그 향방에 따라 대한민국 강남권 한강 변의 풍경 전체가 크게 달라질 것으로 보인다.
“가구 수 최다” 舊현대, 설계사무소 경쟁 치열
7월 4일 오전 구현대아파트 내 압구정 공원 앞. 유명 건축사사무소들이 ‘홍보 경쟁’을 펼치고 있다고 해서 현장을 찾았다. 해안종합건축사사무소 컨소시엄과 희림종합건축사무소·나우동인 컨소시엄이 각각 전시관을 차리고 주민을 대상으로 설명에 공을 들이고 있었다. 해안 컨소시엄은 단지를 숲으로 감싸는 조경과 전 세대 한강 조망 및 남향 배치를 내세운 ‘하이그로브 압구정’으로, 희림 컨소시엄은 한강 변 최고 층수인 70층과 용적률 360% 등 고급화 전략을 앞세운 ‘더 압구정’으로 차별화했다.
특히 설계에 대한 구현대 주민의 관심은 한껏 높아진 상태였다. 앞서 신현대가 유현준 교수를 주축으로 하는 디에이건축사사무소를 확정하면서 자극이 됐다. 이날 만난 주민 A씨는 “내 집이 어떤 모습으로 바뀔지 관심을 갖는 것은 당연하지 않냐”면서 “아무래도 시공은 현대건설이 할 것 같아서, 여기 주민들 관심사는 오히려 설계에 더 쏠려 있다”고 말했다. 최종 결정은 7월 15일 주민 투표로 결정된다.
다만 서울시가 희림종합건축사사무소와 나우동인건축사사무소를 사기미수, 업무방해 및 입찰방해 혐의로 경찰에 고발하면서 향후 추이가 어떻게 흘러갈지 지켜봐야 한다. 서울시는 컨소시엄을 구성한 두 건축사무소가 설계사 선정을 앞두고 시가 정한 용적률 등에 부합하지 않는 설계안을 제시해 조합원, 주민 등을 속이려 했다고 보고 있다. 특히 용적률 360%를 적용하겠다고 한 것이 문제가 됐다. 희림건축 측은 입장문을 통해 “공모 지침을 위반한 것이 아니다. 용적률 360%는 하나의 예시라고 할 수 있지, 끝이 아니다. 판단하는 것은 주민의 몫”이라며 “서울시가 일방의 주장만을 근거로 부당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고 반박했다.
사실 구현대 재건축 논의가 본격적으로 활발해진 것은 4월 25일 총회 개최 이후다. 압구정 지구 내 가장 많은 가구 수를 갖고 있고 역과 인접해 있다는 점에서 사업성이 높을 것으로 기대받는 ‘핵심 구역’이지만, 단지가 11개나 된다는 점에서 이해관계가 첨예하게 다르다. 무엇보다 현대 4차는 5층짜리에 대지 지분이 넓지만, 2종 주거지역이라는 점에서 용적률 250%를 적용받는다. 반면 이곳을 제외한 나머지 단지들은 전부 3종 주거지역으로 용적률 300%가 적용된다.
‘상가 지분’을 어떻게 구성하느냐도 또 하나의 분쟁거리다. 당초 고층 주상복합 형태로 6·7차 아파트 위치에 구성한다는 안이 나왔지만, 현대백화점과 마주 보고 있다는 점에서 수익에 타격을 볼 것이라는 비판도 제기됐다. 상가 지분을 가진 조합원 입장에서는 압구정 2지구에서도 가장 안쪽, 즉 현 위치(1·2차 아파트 맞은편)를 선호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속도도 중요” 新현대, 빠른 추진력에 신고가
이처럼 구현대에는 다양한 이슈가 있지만, 상대적으로 신현대는 재건축 진행 속도가 빠르다. 말 그대로 조합원 간 합의만 잘 이뤄지면 되는데, 오는 12월 또 한 번 총회를 열 계획을 갖고 있다. 지구단위계획을 수립하고 건축심의를 거치는 과정이 통상 5년 정도 걸렸다면, 신현대는 신통기획을 통해 이 기간을 최대한 단축하겠다는 목표다. 철거 및 이주까지 앞으로 8년, 이후 시공 5년을 합하면 13년 후를 내다보고 있는 상황이다.
‘재건축 그림’이 가시화하면서 매매도 상향 거래되고 있다. 실제 올해 6월에는 61평(전용 183㎡)이 63억원에 팔리면서 신고가를 경신(직전가 3월 60억8000만원)했다. 전부 현찰 매입한 것으로 알려졌다.
김연권 신현대공인중개사 대표는 “압구정 재건축은 ‘100년 뒤에나 되는 거 아니야?’라는 인식이 있었는데, 이제 시간과 속도가 매우 중요한 가치가 됐다는 것을 신현대가 입증하고 있다”면서 “신현대발(發) 재건축이 가시화하고 있는 상황에서 신고가를 경신한 셈”이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3년 전 메릴린치증권에서 10년 후 가격을 점쳤을 때 평당 3억원으로 계산했었다. ‘지금 사도 늦지 않다’라는 확신이 있기에 매입을 하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전문가들은 신현대와 구현대가 재건축을 마치면 최대 1만7000가구의 명실상부한 대한민국의 랜드마크 아파트 단지가 형성될 것으로 내다보고 있다. 다만 여전히 토지거래허가제에 묶여 있고 재건축 초과 이익 환수법(재초환법) 시행 시 높은 부담금을 내야 하는 것은 걸림돌이다. 최근 국토교통부가 부과 구간을 차등화하는 방향으로 재초환법 개정안을 수정하면서 압구정 현대 등 고가 아파트가 직격탄을 맞을 것으로 보이는 상황이다.
박합수 건국대 부동산대학원 겸임교수는 “결국 압구정 재건축의 성패는 사업성이 높은 고가 아파트라는 점을 감안하면서 공공자산이라는 한강을 어떻게 시민과 공유할 수 있을지, 그 방법을 찾는 것으로 귀결될 수밖에 없다”면서 “향후 최대 15년 내로 재건축이 완료되면 이른바 ‘전국 부자 2·3세들의 귀환이 시작되면서 그야말로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전국구 부촌’으로 자리매김하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