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청동기시대에 스페인 발렌시나를 지배했던 ‘상아 부인’의 상상도. 붉은 진사 염료를 바른 모습이다. 
2 스페인 발렌시나에서 발굴된 청동기시대 ‘상아 부인’의 무덤에서 가장 주목받은 부장품인 수정 단검. 사진 스페인 세비야대
1 청동기시대에 스페인 발렌시나를 지배했던 ‘상아 부인’의 상상도. 붉은 진사 염료를 바른 모습이다. 2 스페인 발렌시나에서 발굴된 청동기시대 ‘상아 부인’의 무덤에서 가장 주목받은 부장품인 수정 단검. 사진 스페인 세비야대

고대 사회에서 여성이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는 사실이 무덤을 통해 잇따라 드러났다. 5000년 전 스페인 무덤에서 숱한 귀중품과 같이 발굴된 유골이 여성으로 밝혀졌다. 청동기시대 이베리아반도를 지배했던 사람은 남성이 아니라 여성이었다는 말이다. 앞서 2000년 전 유라시아 초원 지대를 지배한 흉노제국에서도 여성이 영토 확장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는 사실이 새로 밝혀졌다.

스페인 세비야대 고고학과의 레오나르도 가르시아 산후안(Leonardo García Sanjuán) 교수와 마르타 신타스-폐냐(Marta Cintas-Peña) 교수 연구진은 7월 7일 국제 학술지 ‘사이언티픽 리포트’에 “2008년 스페인 남서부 발렌시나의 한 무덤에서 상아를 포함해 다양한 귀중품과 함께 발굴된 유골은 치아 단백질 분석 결과 여성으로 확인됐다”고 밝혔다. 연구진은 이 여성에게 ‘상아 부인(Ivory Lady)’이라는 별명을 붙였다.

3 스페인 발렌시나에서 나온 청동기시대 ‘상아 부인’의 유골. 4 유골 주위로 상아와 수정 단검, 상아 빗, 도자기 접시, 부싯돌 등 다양한 부장품이 있었다.
5 스페인 발렌시나에서 나온 청동기시대 ‘상아 부인’의 무덤에서는 부장품이 두 개층에서 나왔다. 6 유골을 흙으로 덮고 다시 그 위에 수정 단검, 장식한 상아, 도자기 접시, 부싯돌, 타조 알껍데기 등 다양한 부장품을 넣었다. 사진 스페인 세비야대
3 스페인 발렌시나에서 나온 청동기시대 ‘상아 부인’의 유골. 4 유골 주위로 상아와 수정 단검, 상아 빗, 도자기 접시, 부싯돌 등 다양한 부장품이 있었다. 5 스페인 발렌시나에서 나온 청동기시대 ‘상아 부인’의 무덤에서는 부장품이 두 개층에서 나왔다. 6 유골을 흙으로 덮고 다시 그 위에 수정 단검, 장식한 상아, 도자기 접시, 부싯돌, 타조 알껍데기 등 다양한 부장품을 넣었다. 사진 스페인 세비야대

상아, 수정 단검과 같이 묻힌 유골

당시 무덤은 모두 여러 사람이 같이 묻혔지만, 이번에 분석한 무덤만 혼자 묻혀 있었다. 무덤에서는 코끼리 엄니와 함께 고급 부싯돌, 타조 알껍데기, 호박(湖泊), 수정 단검 등 많은 귀중품이 쏟아졌다. 유골의 나이는 17~25세로 추정됐다. 처음 발굴진은 4000~5000년 전 청동기시대에 이베리아반도를 지배하던 젊은 귀족 남성의 무덤이라고 생각했다.

산후안 교수 연구진은 치아 법랑질에 있는 아멜로제닌 단백질을 분석했다. 이 단백질은 DNA보다 훨씬 단단하며, 남녀에 따라 달라 유골의 성별을 판별하는 기준으로 쓰인다. 어금니와 앞니를 분석한 결과 X염색체에 있는 아멜로제닌 유전자 AMELX를 발견했다. 남성만 갖고 있는 Y염색체에서는 AMELY 아멜로제닌 유전자가 있다. 유골 주인이 XX 성염색체를 가진 여성이라는 말이다.

연구진은 상아 부인이 귀족의 후예가 아니라 자신의 노력으로 사회적 지위를 얻었다고 추정했다. 주변 아기 무덤에는 별다른 부장품이 없었다. 당시 사회에서는 부의 대물림이 흔하지 않았고 사회적 지위가 출생에 따라 결정되지 않았다는 의미다. 연구진은 상아 부인이 평생 이룬 공로와 업적이 화려한 무덤을 만들었다고 밝혔다.

무덤 부장품 중 가장 주목할 만한 것은 아프리카코끼리의 엄니인 상아였다. 연구진은 뼈의 동위원소를 통해 상아 부인이 무덤이 있는 지역에서 주로 살았지만, 다른 지역으로도 여행을 다녔다면 그 역시 사회적 지위를 보여주는 증거라고 밝혔다.

덴마크 국립박물관의 사만다 스콧 라이터(Samantha Scott Reiter)는 이날 ‘사이언스’에 “여행 능력은 권력과 매우 밀접한 관련이 있다”고 말했다. 상아 부인의 몸 근처에서는 포도주, 대마초와 수은 성분의 염료인 진사(辰砂)도 나와 종교의식에도 관여했음을 보여준다고 연구진은 밝혔다. 이 역시 지배계급임을 보여주는 증거다.

유럽의 뉴욕을 지배한 젊은 여성

상아 부인의 무덤이 나온 발렌시나는 청동기시대 이베리아반도에서 가장 번성한 지역으로 꼽힌다. 스페인 바르셀로나 자유대의 로베르토 리시(Roberto Risch) 교수는 ‘사이언스’에 “오늘날 세비야 근처에 있는 발렌시나는 기원전 3200년에서 2200년 사이 청동기시대가 절정에 달했을 때 450헥타르(4.5㎢)가 넘는 면적을 자랑했다”며 “당시에는 ‘유럽의 뉴욕’ 같은 도시였을 것”이라고 말했다. 청동기시대 유럽의 뉴욕을 지배한 사람은 젊은 여성이었다는 말이다.

상아 부인의 무덤에서 남쪽으로 100m 떨어진 곳에도 비슷한 호화로운 무덤이 발굴됐다. 이 무덤은 상아 부인보다 2~3세대 뒤에 만든 것인데, 무덤에 묻힌 20명 중 15명은 20~35세 여성으로 확인됐다. 연구진은 상아 부인의 후손으로 추정했다. 여성들은 모두 화려한 옷을 입었고, 뼈에서 수은 수치가 매우 높게 나왔다. 이는 상아 부인처럼 이들도 종교의식에서 진사에 노출됐을 가능성을 보여준다.

연구진은 이 지역에서 같은 시기에 상아 부인만큼 지위를 가졌던 남성의 유골은 발굴되지 않았다고 밝혔다. 

산후안 교수는 “이번 발견은 청동기시대 이베리아 사회에서 여성이 이전에 알려진 것보다 훨씬 더 중요한 역할을 했을 수 있음을 시사한다”며 “우리가 거의 알지 못하는 매우 복잡한 사회에서 여성의 정치적, 사회적 역할이 무엇이었는지 밝힐 새로운 연구의 장이 열렸다”고 말했다.

흉노제국도 여성이 영토 확장 주도

앞서 고대 아시아의 유목민 사회에서도 지금까지 생각과 달리 여성이 중요한 역할을 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정충원 서울대 생명과학부 교수 연구진은 지난 4월 국제 학술지 ‘사이언스 어드밴스’에 “흉노(匈奴·Xiongnu)제국의 서쪽 변방 무덤들에서 발굴한 유골 18구의 유전자를 통해 당시 다양한 민족이 용광로처럼 섞였으며, 특히 귀족 여성의 지위가 상당히 높았던 것으로 확인됐다”고 밝혔다. 흉노는 기원전 209년 묵돌 선우가 오늘날 몽골 초원에서 여러 부족을 통합해 세운 제국이다. 서기 100년 무렵 중국 한나라에 멸망되기까지 300년 동안 유라시아 동부의 초원 지대를 지배했다. 중국의 진시황(秦始皇)이 만리장성을 쌓아 막으려 했던 적이 바로 흉노다.

정충원 서울대 교수는 “흉노족이 결혼을 통해 이질적인 집단을 통합하고 제국을 확장했음을 알 수 있었다”고 밝혔다. 흉노의 서쪽 변방이었던 타힐링 훗거르에서 나온 귀족 여성의 무덤은 다른 곳보다 훨씬 깊어, 공들여 조성됐음을 알 수 있었다. 무덤의 주인은 흉노제국의 황금빛 해와 달 문양이 새겨진 정교한 관에 묻혔다.

흉노제국의 서쪽 변방 무덤의 주인 중 앞서 정 교수가 2020년 밝힌 흉노족 황실 유전자와 연계된 사람은 여성뿐이었다. 그렇다고 여성이 단순히 정략결혼의 도구였던 것만은 아니었다. 타힐링 훗거르의 여성 무덤에서 말 6마리와 전차도 나와 생전 권력이 강력했음을 입증했다.

논문 공동 제1 저자인 브라이언 밀러(Bryan Miller) 미국 미시간대 교수는 “여성들은 국경 지대에서 흉노제국의 대리인으로서 막강한 권력을 쥐고 있었다”며 “이들은 흉노의 전통을 유지하면서 대초원 지대의 권력 집단과 실크로드 교역망을 이루는 데 참여했다”고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