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제일의 상권은 원래 마포였다
광흥창역 일대는 창내역-서강역이라는 명칭으로 불리다가 용산선 기차역인 서강역(오늘날 경의선 서강역)과 혼선을 피하고자 광흥창역으로 개명되었다. 하지만 역명이 바뀌고 근 30년이 지났음에도 여전히 인근 주민에게는 서강이라는 명칭이 더 익숙하다. 서강동주민센터와 서강초등학교, 서강대교가 다 광흥창역 주변에서 이어진다. 한편 아이러니하게도 경의선 서강대역이 있는 곳은 오늘날 서강동이 아닌 노고산동이다. 이러한 이유로 광흥창역의 명칭은 ‘광흥창역(서강)’이기도 하다. 이처럼 지명은 시대가 흘러 공식적인 명칭이 바뀌더라도 사람들의 생활에 깊이 남아 유지되기도 한다.
한편 이러한 지명과 관련하여 오늘날의 서울을 살펴보면 의아해지는 것도 많다. ‘서강(西江)’이라는 지명의 ‘강(江)’이 어디인가 하는 점이다. 오늘날 서강의 지명으로 남은 서강대역은 서강 지역에 있는 대학의 의미이니 원래의 서강과 상관없이 대학 이름을 따른 것이고, 원래의 서강역인 광흥창역도 한강 옆에 있어 광흥창이 설치되었다는 것인데, 광흥창이 원래 있던 와우산 아래서 따져봐도 한강까지는 약 800m, 오늘날 광흥창역에서 따져봐도 한강까지 약 500m나 떨어져 있다. 이것은 오늘날 우리가 보는 서울과 과거의 서울이 달랐기 때문이다.
우선 ‘서강’은 과거 한강의 서쪽을 지칭하는 명칭이다. 오늘날 기준에서 보면 동쪽으로 경기도 양평군 양수리부터 김포를 거쳐 서해까지의 물길 중 한강 하구에서 임진강과 합류되는 지점까지가 전부 한강이다. 임진강 합류 지점부터 서해까지의 구간은 한강에서 제외하여 조강(祖江)이라 한다. 따라서 한강의 물길을 통틀어 한강이라 하지만 근대 이전에는 같은 물줄기를 나누어 서쪽을 서강이라 했고 가운데를 용산강, 동쪽을 동강(동호)이라 했다. 동쪽의 동강은 오늘날에도 동호대교, 구 동호공업고등학교(현 서울방송고등학교)에 지명이 남아 있다. 강이지만 동호대교 일대에서 강폭이 넓어져 동쪽 호수라는 명칭으로 불린 것이다.
서강의 경우 근대 이전에는 한강 인근이었던 나루가 연결된 곳이지만 지금은 500m 이상 거리가 떨어져 있다. 이는 한강이 예전과 다른 모습, 즉 예전의 한강은 지금의 한강 변보다 더 안쪽으로 물길이 광흥창 인근까지 들어와 있는 곳이었기 때문이다. 즉 오늘날 광흥창역에서 서강대교로 이어지는 길 쪽에 밤섬과 여의섬이 모두 강의 북쪽으로 연결된 하중도였던 시절에 한강의 물길은 지금보다 더 안쪽(북쪽)이었다. 1960년대 정부의 여의도 개발 때 밤섬을 폭파하여 여의도 제방 준설에 사용되어 여의도는 오늘날과 같이 영등포에 붙게 되었고 밤섬은 폭파 이후 섬이 없어졌다가 다시 한강에 자연적으로 회복된 형태로 남게 된 것이다.
한편 조선시대까지 서울(한양) 최대의 상권은 마포였다. 마포가 서울 제일의 상권이 된 것은 역시 한강에서 서울로 들어오는 물류의 중심지였기 때문이다. 마포는 한강을 따라 수운을 통해 세곡을 서울로 운반시킨 조선 최대의 물류 중심지였다. 1910년 당시 한성의 쌀 소비량은 연 25만 석이 넘었는데 이 중 3분의 2는 철도로 운반되고 3분의 1은 한강을 통해 운반되었는데 마포의 물동량이 가장 많았다고 한다. 그 때문에 마포에는 쌀을 보관하는 창고와 미곡 상점이 많았다. 쌀이 많이 모여있으니, 장사꾼도 많고 숙박 시설인 객주도 많았다. 쌀과 사람이 많이 모이니 자연스럽게 술집도 많았다. 조선 후기 마포에만 술집이 600~700곳이 있었다 하니 가히 조선 최대의 상권이라 할 만했다.
일제 강점기 이후 상권 중심 용산·종로로 이동
그러나 일제가 조선을 강점하면서 총칼을 앞세운 일본 상인들의 조선 공략도 시작되었다. 당시 일제는 서울과 의주를 연결하는 철도의 중심을 조선 최대의 상권인 마포가 아니라 용산에 건설했다. 일본 제국주의 군사기지가 용산에 있었기 때문이다. 더불어 철도를 중심으로 한 교통망을 건설하고 이를 중심으로 신흥 상권을 만들어 간 것이다. 결국 마포를 중심으로 한 경강 상권은 급격히 위축되었고 마포를 근거로 하는 조선인 객주와 상인들의 세는 약해졌다. 하지만 일제 강점기에도 마포는 조선인 중심의 상권이 여전히 명맥을 잇고 있었고 경성 다른 지역, 예컨대 용산이나 종로 일대에 비해 조선인이 압도적으로 많았다. 해방과 6·25전쟁 이후 마포는 마포대로 대로변 좌우까지도 무허가 건물이 빼곡한 상대적으로 낙후된 채 남아 있었으나 1979년 지미 카터 대통령 방한 당시 대대적으로 정비되기도 했다. 카터 대통령의 이동 일정에 서울시청에서 여의도로 가는 동선이 있었고 외신을 통해 마포대로 좌우의 낙후된 건물들이 전 세계로 나가는 것을 우려하여 이 지역 일대를 대규모로 개발한 것이다(서울시 도시계획 이야기 참조).
오늘날 마포는 서울에서 열 손가락 안에 드는 크고 중요한 상권이다. 마포 상권은 마포대교 북단에서 좌측으로 뻗은 이면 길 식당들 중심의 일부 지역 그리고 반대쪽에서 공덕오거리까지 이어진 서울가든호텔 뒤쪽 먹자 상권이 있다. 넓은 의미에서 마포는 마포역 서북쪽으로 광흥창, 서강, 상수, 합정과 홍대까지 이어진다. 모두 과거의 물길과 연결된 곳이다.
아울러 1986년 아시안게임과 1988년 서울올림픽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마포 일대 도시재개발이 대대적으로 이뤄졌다. 이 시기에 지어진 아파트들이 마포 삼성 각 단지로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다. 즉 여의도 개발과 카터 대통령 방한을 기점으로 마포는 주요 상업지역이 되었고, 아시안게임과 올림픽을 기점으로 핵심 아파트 지역이 되었다. 도심과 여의도, 강남을 서울의 3핵 중심으로 하는 도시계획의 과정에서 마포는 아파트 외에 오피스텔도 밀집된 곳이기도 하다. 이후 아현동 일대 재개발까지 이어지면서 오늘날에는 여의도와 도심 일대 직장을 둔 젊은 직장인들의 ‘최애 주거지’로서 기능하고 있다. 또한 그러한 수요를 바탕으로 아파트 가격도 높게 형성되어 있기도 하다.
지금은 물류가 근대 이전과 크게 달라졌지만, 다른 의미에서 상권은 오늘날에도 근근이 이어진다. 오늘날 마포에서부터 북쪽으로 광흥창, 경의선 숲길의 서강을 거쳐 합정동까지 이르는 지역이 지금도 서울에서 가장 큰 상권의 하나가 된 것이 그 증거다. 홍대, 합정동에서 아래쪽으로 한강 개발의 역사와 그 이후 밤섬의 회복 그리고 근대 이전 마포에서 광흥창, 서강으로 이어지는 모습을 보면 개발에 의해 상권이 바뀌기도 하지만, 상권이 바뀌더라도 지명은 남아서 이어지고, 또한 상권은 다시 과거와 연결하여 살아남기도 그리고 다시 쇠퇴하기도 한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과거로부터 현재까지 이어지는 지명을 통해서도 우리가 사는 지역, 우리가 소비하는 상권의 변화무쌍함을 되새겨 볼 수 있다는 점이 새롭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