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고려대 심리학, 독일 베를린자유대 심리학 석·박사, 전 베를린자유대 전임강사, 전 명지대 교수, ‘에디톨로지’ ‘남자의 물건’ ‘가끔은 격하게 외로워야 한다’ ‘노는 만큼 성공한다’ 저자 사진 채승우 객원기자
한때 입담 좋은 TV 패널이자, 베스트셀러 작가로 인기 가도를 달리던 대학 교수가 있었다. 어느날 ‘그리스인 조르바’를 읽던 그는 자유에 고무된 나머지 교수직을 버리고 그림 공부하겠다며 일본으로 떠나버린다. 귀국 후엔 여수의 외딴섬에 파묻혀 책을 쓰더니, 최근 10년간 집필한 신간을 들고 뭍으로 나왔다. 독일의 종합예술학교 바우하우스(Bauhaus)와 창조의 기원을 다룬 책을 낸 문화심리학자 김정운의 이야기다.
7월 21일 서울 신사동에서 만난 그는 진지하게 “독일 바우하우스 학자들도 이런 책은 못 쓸 것”이라고 자평했다. 외롭지 않았냐는 질문엔 “타인의 시선이 없을 때 비로소 사람은 가장 창조적 존재가 된다”는 답이 돌아왔다. 마침 이번 신간 제목이 ‘창조적 시선’이다. 그는 어쩌다 1919년부터 1933년까지 지구 반대편에 존재했던 바우하우스에 빠지게 된 걸까. 다음은 일문일답.

무려 1000쪽에 달하는 신간이다.
“인체공학적으로 베고 자기 좋은 두께다(웃음). 원래 1500쪽이었는데, 출판사에서 말렸다. 분권도 안 했다. 미학적 목적을 위해서였다. 이 책은 ‘장식용’으로 봐도 좋다. 집에 이런 책 하나 두면 얼마나 우아한가. 이제는 책을 지식 전달의 수단으로만 보지 말고 미학적 수단으로 봐야 한다. 벌써 1만 부 가까이 팔렸다. 곧 5쇄에 들어간다.”
어떤 사람들이 이 책을 읽었으면 하나.
“공부하면서 여행하고 싶은 사람이다. 제대로 된 여행은 공부하는 여행이다. 즐거움은 공부할 때 얻어지는 거니까. 나도 바우하우스를 주제로 독일을 여행했다. 그 행복감이 말도 못 한다. 직접 여행하고 공부한 결과를 기록으로 남긴 게 이 책이다. 나처럼 창조적인 여행을 하고 싶어 하는 사람이라면 일독을 권한다.”
부제가 ‘인류 최초의 창조 학교 바우하우스의 이야기’다. 어쩌다 바우하우스로 책을 썼나.
“시작은 ‘왜 삼성은 애플처럼 못 만들까’라는 질문이었다. 어째서 스티브 잡스는 아이폰을 만들 수 있었을까. 그 기원을 따져보니, 애플 디자인의 뿌리가 바로 바우하우스였다. 잡스가 그렇게 흉내 내고 싶어 했던 독일 가전 회사 브라운의 디자인 대부분은 디터 람스의 작품이다. 애플 디자인 책임자였던 조너선 아이브도 디터 람스의 디자인을 흉내 낸 걸로 널리 알려졌다. 그런데 디터 람스가 나온 독일 울름조형대학은 바우하우스 마지막 졸업생이었던 막스 빌 등이 바우하우스 정신을 잇기 위해 설립한 학교였다.”
바우하우스가 특별한 이유는.
“색을 듣고 소리를 그릴 수 있는 일명 ‘공감각’은 천재들이 지닌 능력이었다. 그런데 바우하우스에서 ‘감각의 교차 편집’이라고 하는 창조적인 교육법을 도입해 학생들을 가르쳤다. 즉, 학생들의 창조성을 극대화하기 위해 교육과정을 통해 공감각을 구현하려고 한 곳이 바우하우스였다.”
삼성도 애플처럼 스마트폰을 만들지 않나.
“삼성과 애플 모두 스마트폰을 만든다. 하지만 애플이 만드는 것은 스마트폰이라는 ‘메타언어(개념들 사이의 관계를 설명하는 개념)’이자 ‘지식 혁명의 도구’다. 이전까지 인간은 자판을 통해 컴퓨터와 상호작용해 왔다. 그런데 ‘마우스’가 등장했다. 마우스를 클릭하면, 나하고 전혀 다른 세계가 펼쳐진다. 클릭의 전제는 GUI(Graphical User Interface)다. 이걸 가장 먼저 구현한 게 애플의 리사(Lisa) 컴퓨터다. 여기서 한 발짝 더 나아간 게 아이폰의 ‘터치’다. 촉각으로 일으키는 시각과 청각의 변화다. 바우하우스에서 시작된 감각의 교차 편집이 스마트폰의 터치로 완성된 것이다. 잡스가 내건 모토가 ‘기술과 예술의 통합’이다. 감각의 교차 편집으로 예술적 경험이 스마트폰(기술)에서 구현된 셈이다.”
그게 지식 혁명과 무슨 관련이 있나.
“그동안 우리는 ‘택소노미(taxonomy·분류학)’라 불리는 연역법, 귀납법의 ‘트리(tree) 구조적 사고’를 해왔다. 그런데 이제는 마우스를 클릭하거나 손가락으로 터치하는 작은 행동으로 경계를 뛰어넘는 생각을 할 수 있게 됐다. 전혀 다른 영역의 지식과 정보를 연결하고 편집하는 일명 ‘네트워크적 사고’가 가능해졌다는 뜻이다. 원래 이것은 창조력의 중요한 요소이자 천재들의 영역이었다. 이 엄청난 지식 혁명을 가능케 한 도구가 컴퓨터에서는 마우스, 스마트폰에서는 터치다. 그럼 이 모든 게 어디서 시작됐느냐. 바로 바우하우스다.”
삼성이 애플을 따라잡을 수 있을까.
“쉽지 않다. 왜? 애플 뒤에는 100여 년 동안 (바우하우스 때부터) 축적된 서구 사회의 미학적 유산이 숨겨져 있어서다. 한국은 압축 성장으로 달려왔다. 기능적으로는 삼성이 더 뛰어날 수 있다. 나도 삼성의 노트 시리즈를 애용한다. 삼성이 개발한 ‘S펜’은 기능적으로 데이터를 축적하는 데 훌륭한 도구다. 하지만 지식 혁명과 관련해선 별로 할 얘기가 없다. 그럼, 애플이 다른 이유는 무엇이냐. 기원을 따라 올라가면, 감각의 교차 편집이라고 하는 바우하우스의 엄청난 교육 실험이 있었다.”
삼성은 어떻게 해야 하나.
“문화적 축적이 더 필요하다. 지금 K팝과 봉준호 감독의 영화가 세계에서 인정받고 있다. 이처럼 한국에서 나타나는 다양한 방식의 문화적 실험들이 언젠가 우리의 뛰어난 기술과 만났을 때 새로운 가능성이 열릴 수도 있겠다.”
창의성은 어디에서 오는가.
“편집의 소재가 많아야 한다. 앞서 얘기한 것처럼 K팝과 영화 등 한국의 문화 영역이 잘나가는 배경이다. 과거 미국의 외국 유학생 수를 보면 중국인이 제일 많았다. 그다음이 인도와 한국이었다. 그런데 인구 대비 유학생 수로 따지면 한국이 압도적으로 높았다. 비록 빈약한 문화적 유산을 물려받았지만, 한국의 유학생들이 전 세계에 흩어져서 다양한 콘텐츠를 수용하고 축적했다. 미국이 왜 전 세계를 압도하는 나라인가? 다양한 민족이 섞여 있어서다. 중국이 미국을 절대 따라잡을 수 없는 이유다. 중국이 다민족이민정책을 유지하면 모를까.”
과거에도 마찬가지였나.
“‘창의성(creativity)’이라는 단어가 오스트리아 빈에서 탄생했다고 본다. 과거 오스트리아의 합스부르크 왕조가 망한 뒤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1867~1918년)이 있었다. 다양한 민족이 섞인 나라였다. 어느 정도였냐면 유대인을 처음으로 사회 구성원이자 빈의 시민으로 받아줬다. 1900년대 초가 되면 빈 대학생의 20%가 유대인이었다. 그때부터 노벨상 수상자가 나오기 시작했고, 학문적 성과도 대단했다. 일례로 당시 지크문트 프로이트가 무의식이란 세계를 창조했다. 문화적 다원성이 보장되지 않으면 창의성이 나오기 어렵다.”
개인도 마찬가지겠다.
“맞다. 문화적 관심사가 많아야 한다. 청년들에게 이렇게 조언하고 싶다. 자신이 좋아하는, 다양한 것에 관심을 두고, 많은 것을 경험하라. 자신의 주체적 사고를 갖고 세상을 다양하게 편집해야 한다. 그래야 남들과 달라지고, 경쟁력이 생긴다. 그런 의미에서 ‘슈퍼 갑(甲)’이 돼야 한다. 슈퍼 갑의 조건은 뭐냐. 사람들이 나를 찾아야 한다. 그러려면 자신의 주제를 알아야 한다.”
다음 계획은.
“프란츠 슈베르트의 ‘겨울 나그네’ 24곡을 그림으로 그리고, 내 언어로 해석한 책을 내놓으려고 한다. 올해 연말쯤 만나볼 수 있을 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