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구글, 아마존, 메타(페이스북 지주회사), 마이크로소프트(MS) 등 독과점화(化)된 빅테크들을 견제하기 위해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이 등판시킨 리나 칸(Lina Khan) 연방거래위원회(FTC) 위원장이 난조에 빠졌다. 거래 금액이 700억달러(약 90조1600억원)에 이르는 MS의 액티비전 블리자드 인수합병(M&A)을 중단시켜 달라는 FTC의 가처분 신청을 캘리포니아 항소법원이 7월 11일(이하 현지시각) 기각했기 때문이다. “MS의 블리자드 인수가 콘솔, 구독 서비스, 클라우드 게임 시장에서 경쟁을 감소시킬 수 있다”는 FTC의 주장을 연방법원이 인정하지 않은 것이다. FTC는 메타가 가상현실(VR) 업체 위딘을 인수하려는 거래에 대해서도 ‘시장 경쟁 저하 행위’라는 이유로 소송을 냈지만, 지난 5월 법원에서 기각됐다. 플랫폼 독점을 종식하기 위해 칸 위원장이 추진했던 ‘빅테크 반독점 패키지 법안(플랫폼 독점 종식 법안)’은 올해 초 의회에서 폐기됐다. 월스트리트저널(WSJ) 등 미국 주요 언론들은 빅테크를 겨냥한 FTC의 싸움이 패배로 가고 있다면서 냉소적인 반응을 보였다.
그러나 칸 위원장은 전선을 확대하고 있다. 생성 인공지능(AI) 챗GPT로 규제의 칼날을 돌렸다. FTC는 7월 13일 오픈AI에 “챗GPT가 허위 정보를 만들어 소비자가 피해를 보았는지 여부를 조사할 것”이라는 내용의 공문을 보냈다. 구체적으로는 △오픈AI가 챗GPT를 학습시키는 데 활용한 데이터 출처와 취득 방식 △실존 인물에 대한 정보 관련 소비자 불만 접수 사례와 대응 결과 등을 기술한 자료를 제출하라고 요구했다.
FTC의 조사는 최근 오픈AI에 대한 집단소송이 일어난 것과 관련 있다는 해석이 나온다.
챗GPT를 개발하는 과정에서 인터넷상의 정보를 무단으로 사용하고 사생활을 침해했다는 게 집단소송의 주요 요지다. 인터넷 이용자들이 개인적으로 인터넷에 올린 글을 오픈AI가 허락 없이 이용해 자사 이익을 추구했다는 점이 입증된다면, 소비자 권리가 침해됐다는 결론이 나올 수도 있다. 워싱턴포스트(WP)는 “FTC의 이번 조사는 오픈AI가 지난 2015년 미국에서 사업을 시작한 이래 가장 강력한 규제”라고 평가했다.
바이든 정부, 반독점 정책 방향 전환 모색
코너에 몰린 칸 위원장이 이런 초강수(超强手)를 둔 것은 빅테크 규제에 대한 바이든 정부의 강한 의지를 반영하는 것이란 해석이 나온다. 바이든 대통령은 1월 11일 월스트리트저널(WSJ) 기고문을 통해 “일부 빅테크는 미국인의 가장 개인적인 데이터를 수집·공유·착취하고, 여성 및 소수자의 시민권을 침해한다”면서 초당적인 협조를 주문한 바 있다. 빅테크를 구체적으로 거명하지는 않았지만 구글, 아마존 등을 겨냥했다는 게 대체적 시각이다.
바이든 정부는 전통적으로 ‘소비자 후생 극대화’에 초점이 맞춰져 있었던 반독점 정책의 방향성을 거대 기업의 정치·사회·경제적 영향력을 줄이는 쪽으로 바꾸려 하고 있다. 소비자 후생 극대화에 초점을 맞추면 ‘규모의 경제’를 명분 삼아 경쟁 회사를 인수해 시장을 장악하는 빅테크의 확장을 막을 수 없기 때문이다. 기존 정책 방향으로는 구글이 검색엔진 시장 대부분을 차지해도 이용자가 무료로 서비스를 사용할 수 있다면, 아마존이 시장을 지배해도 소비자가 최저가로 물건을 구매할 수 있다면, 규제 대상이 아니다.
바이든 대통령이 FTC 위원장에 ‘아마존 킬러’로 스타덤에 오른 리나 칸, 법무부 반독점국장에 ‘구글의 적’으로 불렸던 변호사 출신 조너선 캔터(Jonathan Kanter)를 임명하는 등 반독점 기구 수장을 ‘반(反)빅테크 진영’으로 채운 것은 반독점 정책을 혁명적으로 전환하겠다는 의지를 나타낸 것으로 평가됐다.
바이든 대통령의 국가경제위원회 기술·경쟁 정책 특별자문으로 임명된 팀 우(Tim Wu) 컬럼비아대 교수는 2018년 11월 펴낸 ‘빅니스(The Cures of Bigness)’에서 거대 기업과 정치권력의 결탁을 비판한 바 있다.
빅테크 M&A 합병 심사 기준 개정 추진
이 때문에 최근의 소송 패배에도 불구하고 빅테크의 문어발 확장을 막기 위한 바이든 정부 반독점 당국의 싸움은 계속될 전망이다. 7월 19일 뉴욕타임스(NYT)에 따르면, FTC와 법무부는 이날 ‘합병 가이드라인’ 초안을 공개했다. 플랫폼 산업 발전 등으로 달라진 M&A의 경쟁과 시장 지배력에 미치는 영향을 재구조화하기 위한 새로운 기준이다.
이번에 제시된 가이드라인은 한 회사가 다른 회사를 잇달아 인수할 경우 개별 M&A 한 건만이 아닌 전체 거래를 두고 시장 지배력 변화 등을 평가해야 한다는 내용이 담겼다. M&A가 기업 간 구인 경쟁에 미칠 영향을 고려해야 한다는 내용도 들어가 있다.
미국 법조계에서는 M&A로 규모를 확장하는 빅테크 전략에 제동을 걸기 위한 조치로 평가한다.
FTC와 법무부 반독점국은 챗GPT 등 AI에 대한 규제 의지도 강조하고 있다. 의회 분위기도 유리하게 변하고 있다. 지난 6월 미국 상원에서 AI가 통신품위법 230조에 해당하지 않는다는 법안이 발의된 것이다. 이용자가 올린 콘텐츠에 대해 인터넷 사업자에 면책권을 주는 통신품위법 230조는 구글 등 빅테크들이 각종 혐오·비방 콘텐츠에도 법적 책임을 지지 않고 사업을 확장하게 만들어 줬다. 생성 AI가 만들어 낸 가짜 뉴스가 미칠 파장을 감안하면, AI를 통해 이윤을 창출할 기업의 책임을 명백하게 규정해야 한다는 논의가 시작된 것이다. FTC 등 반독점 당국의 오픈AI 조사에 힘을 실어주는 요인이라 할 수 있다.
공화당 하원 장악 등 의회 지형 ‘변수’
리나 칸이 취임했을 당시와 비교해 의회 지형이 격변했다는 점은 변수다. 칸 위원장이 취임한 2021년 6월 미국 의회는 상·하원 모두 민주당이 장악한 ‘블루 웨이브’ 상태였다. 취임 당시 상원 인준 표결에서 69 대 28로 압도적인 지지를 받은 배경이었다. 그러나 2023년 7월 현재 상원은 민주당이 간신히 우위를 유지하고 있지만, 하원은 공화당이 다수 의석을 차지하고 있다.
실제로 7월 13일 하원 법사위원회에 불려 간 칸 위원장은 4시간 동안 여야 의원들에게 “시장 논리를 저해하고 있다”고 공격받았다. 공화당은 소송 패배 등을 언급하며 “비즈니스를 파괴하는 괴물” “정부 자원을 낭비했다”고 공격했다. 독점법과 소비자보호법 집행 기관인 FTC가 오픈AI를 조사할 권한이 있느냐는 지적도 나왔다.
리나 칸은 누구?…아마존 저격
논문으로 ‘反빅테크 스타’ 등극

한국의 공정거래법과 유사한 미국의 반독점 규제는 연방거래위원회(FTC)와 법무부 반독점국을 양대 축으로 집행된다. 기업 인수합병(M&A) 심사, 소비자 보호, 경쟁 촉진 정책 등은 FTC가 담합 및 시장 지배력 남용 등 형사처벌 등이 수반되는 규제는 법무부 반독점국이 담당하고 있다.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이 2021년 당시 32세였던 리나 칸 컬럼비아대 부교수를 FTC 위원장에 임명한 배경은 반독점 당국이 빅테크의 문어발 확장을 방관했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FTC 통계에 따르면, 2010년부터 2019년까지 600여 건의 테크 기업 M&A가 승인됐다. 트럼프 정부는 말할 것도 없고 민주당이었던 오바마 정부도 빅테크 규제에 손을 놓았다. 빅테크가 IT(정보통신) 기술에 기반한 미국 경제 혁신의 상징으로 여겨졌기 때문이다.
리나 칸은 예일대 로스쿨 재학 중이었던 2017년 ‘아마존 반독점의 패러독스’라는 논문으로 반빅테크 진영의 스타로 떠올랐다. 이 논문에서 칸은 “가격이 낮아진다는 이유로 아마존을 규제하지 않으면, 확장된 지배력으로 소상공인, 저임금 노동자가 플랫폼에 종속돼 경쟁이 제한될 것”이라고 주장했다. 최저가 등을 내세우는 빅테크의 수익 포기 전략은 시장 장악을 위한 미끼라는 점을 논문을 통해 입증한 것이다. 이 논문은 온라인 발표 후 15만 명이 열람하는 등 화제를 모았다. 로스쿨 졸업 후 그는 로힛 초프라(Rohit Chopra) FTC 위원의 법률고문(legal fellow)을 맡았다.
파키스탄계 이민자인 칸은 1989년 영국 런던에서 태어나 11세에 미국으로 이민했다. 매사추세츠주에 있는 인문학 명문 윌리엄스대를 졸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