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연세대 법학 학·석사, 서울시립대 법학 박사, ‘중앙은행과 화폐의 헌법적 문제’ ‘돈의 불장난’ ‘국회란 무엇인가’ 저자
돈의 가장 기본적인 특성은 표면에 새겨넣은 액면가대로 시장가격이 결정된다는 것이다. 하지만 17세기 말 영국에서는 돈이 자신의 가장 기본적인 특성을 잃고 있었다. 그 이전 세기부터 국왕은 더 많은 시뇨리지, 즉 화폐 주조 차익(명목 가액-소재 가치)을 얻기 위해 은화에 포함된 은의 중량을 속였고, 백성은 은화의 표면을 깎아내는 화폐 훼손 행위로 이에 대응했다.
우리 형법 제207조에서는 화폐를 위조 또는 변조한 행위를 무기 또는 2년 이상의 징역으로 처벌하고 있다. 여기서 ‘위조’는 권한 없는 자가 화폐를 ‘만드는 행위’를 말하고, ‘변조’는 기존 화폐의 ‘가치를 변질시키는 행위’를 말한다. 하지만 종이 화폐인 한국은행권의 ‘변조’가 가능할까. 볼펜으로 1000원권에 0을 하나 써넣으면 1만원권으로 변할까. 1000원권을 절반으로 찢으면 500원으로 변할까. 사실 형법상 ‘화폐 변조죄’는 시대착오적 규정이다. 여기서 말하는 변조는 17세기 영국에서 만연했던 은화의 잘라내기, 깎아내기, 긁어내기를 의미하기 때문이다. 현대 화폐는 소재 가치가 없는 명목화폐이기 때문에 변조, 즉 화폐의 동일성을 유지하면서 가치를 변질시키는 것이 불가능하다.

철학자 존 로크
1694년 영국 경제는 심각한 문제에 봉착했다. 사람들이 물건을 사고팔면서 은화의 액면가를 무시하고 은화를 저울로 달아서 거래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역사학자들은 이것을 ‘은의 위기’라고 부른다. 영국 정부는 이에 대처하기 위해 새로운 형태의 은화를 발행하기로 했다. 하지만 ‘이전 수준의 함량을 유지하는 것이 옳은지’ 아니면 ‘더 낮은 수준으로 바꾸는 것이 옳은지’에 대해 확신하지 못했다. 후자의 대안은 중상주의자들이 선호했다. 이들은 주화의 낮은 가치가 낮은 대외 환율을 형성하고, 자국 상품의 상대적 생산 비용을 줄임으로써 영국 상품의 수출을 늘릴 것이라고 주장했다. 하지만 화폐 논쟁의 반대편에는 철학자 존 로크(John Locke)가 우뚝 서 있었다.
로크는 당대 최고의 철학자이자 정치이론가였다. 그의 사상은 계몽주의와 자유주의의 토대가 되었다. 로크는 경험적 증거를 사용하여 자신의 주장을 논증한 사람으로서 철학에 과학적 방법론을 도입한 사람이었다.
로크는 경제학자로도 유명하다. 1691년 발표한 ‘이자율 하락과 화폐가치 상승에 대한 몇 가지 고려 사항’에서는 정부의 인위적 금리 규제의 문제점을 비판하고 있다. 이 글에서 로크가 주장한 화폐수량설은 현대적 중앙은행이 금과옥조로 모시고 있는 어빙 피셔의 그것보다 360년 앞선 것이었다.
로크는 ‘정부에 대한 두 편의 논문(시민정부이론)’을 통해 국가의 역할은 국민의 권리를 보호하는 것이고, ‘재산권’은 국민의 핵심적 권리라고 주장했다. 로크는 사람들이 자신의 노동을 물질세계에 투입함으로써 재산권이 발생한다고 믿었다. 예를 들어, 사과나무에 매달린 사과는 아무 소용이 없다. 오직 농부가 그 사과를 따냄으로써, 즉 물질세계에 노동을 투입함으로써 비로소 ‘가치’가 발생하게 된다. 로크에게 화폐는 이러한 가치를 구체화하는 방법이자 재산권을 보장하는 수단이었다. 따라서 로크는 ‘국가가 경제를 마음대로 통제할 수 있다’는 중상주의적 사고에 반발했다.
로크는 사유재산을 신성시하고 부의 축적을 정치적으로 정당화했다. 이러한 로크의 생각은 이후 미국 헌법에도 중대한 영향을 미쳤다. 미국 수정헌법 제5조의 ‘정당한 법적 절차에 의하지 아니하고는…누구도 재산을 박탈당하지 아니한다’는 규정은 로크의 영향을 받은 것이다. 이러한 로크의 생각은 오늘날 중앙은행의 설립 목적에도 그대로 남아 있다. 미국 연방준비제도(Fed·연준), 유럽중앙은행의 설립 목적인 ‘물가 안정’ 또는 ‘화폐(가치)의 보호’라는 문구가 바로 그것이다.
리디노미네이션
물론 틈나는 대로 화폐가치 훼손을 위해 발음도 어려운 ‘리디노미네이션’을 추진하는 중앙은행도 존재한다. 리디노미네이션이란 ‘다시’를 의미하는 리(re)와 ‘화폐의 명목 가액’을 의미하는 디노미네이션(denomination)의 합성어다. 쉽게 말해 화폐의 명목 가액을 다시 정하는 것을 말한다. 예를 들어, 1만원의 맨 뒷자리 0을 2개 탈락시켜서 100원으로 만드는 것이다.
리디노미네이션은 극도의 인플레이션이 발생해서 기존 화폐로는 일상적 거래가 불가능한 국가에서 궁여지책으로 채택하는 극약처방이다. 역사상 가장 유명한 리디노미네이션은 1946년 헝가리에서 실시했는데 신구 화폐 교환 비율이 4×1029 대 1이었다. 1경×4000억인데 감이 오지 않는다. 비교적 최근에는 짐바브웨, 베네수엘라 등이 이러한 방법을 사용한 적이 있다. 참고로 미국 연준은 1913년 설립 이래 단 한 차례도 리디노미네이션을 거론한 적이 없다.
로크에 따르면, 정부는 돈의 가치를 희석해도 안 되고, 기존 주화를 질 나쁜 새 주화와 교환하도록 강요해서도 안 되며, 주화를 깎아내는 도둑질을 방치해서도 안 된다. 계몽주의의 합리적·과학적·물질적 관점에 따르면, 주화의 가치는 주권자(국왕)의 인장이 아니라 물리적 특성, 즉 귀금속 함량에 의해 결정돼야 한다. 왜냐하면 국왕의 스탬프(도장)는 상징이나 기호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돈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로크의 대답은 ‘미리 정해진 금속의 무게’였다. 따라서 로크에 따르면 화폐가치는 귀금속 함량에 의해 측정돼야 한다.
로크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12인치가 모여서 1피트가 된다. 1피트를 12개가 아닌 15개로 나눈다고 해서 그 길이가 늘어나는 것은 아니다.”
은과 옥쇄의 투쟁
17세기 영국의 주화 논쟁 당시 재무장관 윌리엄 론데스는 은화의 함량을 낮추는 방안을 지지했지만, 결국 로크가 승리했다. 영국 정부는 새로 발행하는 은화의 함량을 이전 수준으로 복원했다. 그리고 이번에는 주화 훼손을 방지하기 위해 주화의 가장자리에 톱니 모양의 홈을 만들었다. 만유인력의 법칙을 발견한 물리학자 아이작 뉴턴의 작품이다.
우리나라의 현행 500원권(100원권)은 구리와 니켈의 합금으로 만들어지는데, 그 소재 가치는 50원에도 훨씬 못 미친다. 그런데도 500원짜리 동전의 테두리에는 깔쭉깔쭉한 톱니가 새겨져 있다. 사람들이 동전의 테두리를 깎아낼 유인이 전혀 없는데도 1600년대 로열 민트(영국 조폐국) 방식을 그대로 따라하고 있는 것이다. 신흥국 중앙은행의 시계는 17세기 금본위제에 머물러 있는 것 같다.
로크의 승리 이후 돈의 가치는 금속의 무게에 단단히 묶여버렸다. 하지만 이로 인해 예상치 못한 결과가 발생했다. 사람들은 은 함량이 높은 새 주화를 집 안에 비축하고 은 함량이 낮은 옛 주화를 시중에 유통한 것이다. ‘악화가 양화를 구축한다’는 ‘그레셤의 법칙’이 현실에서 완벽하게 실현된 것이다. 여기서 ‘좋은 돈(良貨)’은 주화의 무게나 외형이 온전한 돈, 즉 품질이 우수한 돈을 가리킨다.
로크의 승리 이후 엄격한 통화 기준이 채택됐지만 새로 발행한 은화의 퇴장 현상이 심해지면서 결국 재난적 수준의 디플레이션(물가 하락)이 발생했다. 디플레이션은 인플레이션(물가 상승)과 반대되는 현상으로서 물건의 가치가 하락하고 화폐의 가치가 상승하는 현상을 말한다. 이러한 화폐 부족 현상이 초래한 디플레이션은 심각한 경기침체, 즉 생산과 소비의 감소를 불러왔다. 로크의 생각과 달리 국왕의 인장은 고유한 가치가 있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