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론부터 말하면 주요국에서 인플레이션(물가 상승)에 대한 승리를 선언하기에는 이르다. 여전히 근원 인플레이션이 꺾이지 않았고 서비스 부문 소비지출이 강력하며 노동시장이 경색돼 있기 때문이다. 지난 7월 미국 인플레이션 압력이 대폭 완화됐다는 지표가 발표되자, 드디어 통화정책 기조가 바뀌는 것 아니냐는 기대감에 금융시장이 환호를 보냈다. 하지만 미국 연방공개시장위원회(FOMC)는 7월 말 연방기금금리(FFR) 유도 목표 범위를 다시 25bp(1bp=0.01%포인트) 인상했다. 공급망 병목현상이 해소되고 에너지 가격이 하락하면서 인플레이션은 완화됐으나 변동성이 높은 에너지와 식품을 제외한 근원 물가 상승률, 즉 기저 인플레이션은 충분히 완화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중앙은행이 기조를 바꾸는 근거가 되는 것이 바로 근원 인플레이션이다.
서방국 중앙은행들은 어려운 결정을 앞두고 있다. 근원 인플레이션이 꺾일 때까지 금리를 계속 인상할 것인가? 아니면 축적된 금리 인상의 효과가 시차를 두고 나타날 때까지 기다릴 것인가? 추가 긴축에 나서면 은행권, 금융·부동산 시장이 위험해질 수 있다. 신흥국의 경우 상황이 더 복잡하다. 인도와 브라질 등 중앙은행은 소비자물가지수(CPI) 상승률이 안정 목표치로 떨어지자 금리 인상을 중단했다. 하지만 서방국이 긴축을 계속하면 금리 격차가 벌어져, 이들 신흥국에서는 자본이 유출되고 통화가치가 하락한다. 그럼에도 인플레이션 압력이 완화되는 만큼이들 신흥국은 연내 완화적 기조로 전환해 통화정책의 초점을 인플레이션에서 경제성장으로 바꿀 수 있다.
물가 급등 주 요인 해소, 중앙은행들 공격적 대응
2020년 시작된 팬데믹(pandemic·감염병 대유행)발 공급망 경색은 2021년 내구재 공급이 치솟는 수요를 따라잡지 못해 심화했다. 이로 인해 2021~2022년 내구재 인플레이션율이 급등했다. 다행히도 최근 공급망 압력이 크게 완화되고 소비 대상이 서비스로 옮겨가 내구재 인플레이션율이 하락 중이다. 2022년 인플레이션율을 끌어올린 또 다른 주범은 원자재다. 우크라이나·러시아 전쟁과 잇따른 서방의 대러 제재로 국제 원유는 2022년 상반기 40% 급등했고, 천연가스는 2022년 1~8월 131% 폭등했다. 오랫동안 값싼 러시아산 에너지를 애용해 온 유럽은 대체 공급원을 찾는 과정에서 에너지 인플레이션율이 더 무섭게 치솟았다. 우크라이나와 러시아는 주요 곡물 생산국이기도 해서, 글로벌 식품 물가도 요동쳤다. 하지만 에너지와 식량 인플레이션율은 2022년에 정점을 찍고 하락 중이다. 특히 에너지 가격이 무섭게 상승했던 만큼 식량 가격보다 빠르게 하락하고 있다.
2022년 초 대다수 국가에서 인플레이션이 우크라이나·러시아 전쟁 이전보다 훨씬 광범위하게 나타나자, 각국 중앙은행들이 즉각적, 공격적 대응에 나섰다. 미국 연방준비제도(Fed·연준)는 2022년 3월부터 지금까지 정책 금리를 무려 525bp 인상했는데, 이는 1982년 이후 가장 가파른 긴축 속도다. 영국 중앙은행(BOE)도 2021년 12월부터 지금까지 기준금리를 515bp 인상했고, 유럽중앙은행(ECB) 기준금리도 2008년 이후 최고 수준이다. 아시아 중앙은행들도 이보다는 느린 속도지만 금리를 인상했다.
긴축정책이 효과를 내기 시작했다. 수요 증가세가 완화됐고, 독일은 2023년 1분기에 기술적 경기침체에 빠졌으며, 미국과 프랑스 경제성장세도 둔화했다. 상대적으로 높은 성장률을 자랑하는 인도 경제도 2022-2023 회계연도 하반기에 성장세가 둔화됐다. 수요증가세가 둔화하면서 CPI 상승률이 2022년 정점을 찍고 계속 하락하고 있다(그림 1).
근원 인플레, 주요국 중앙은행 골칫거리
미국과 유럽은 공격적 긴축에도 불구하고 노동시장이 여전히 경색돼 있어, ‘임금-물가 악순환’ 우려가 지속되고 있다. 이로 인해 강력한 소비지출이 지속되면 물가 상승 압력이 지속될 수 있다. 따라서 노동시장 경색이 풀리지 않으면 인플레이션은 완화되기 힘들다. 둘째, 보복 수요가 폭발하면서 소비가 재화로부터 서비스로 옮겨가며, 서비스 인플레이션이 가속화되고 있고, 이는 다시 근원 인플레이션 상방 압력으로 작용한다(그림 2). 인도와 브라질 등 서방에 비해 인플레이션이 빠르게 완화된 국가들에서도 근원 인플레이션은 좀체 꺾이지 않고 있다. 따라서 근원 인플레이션이 안정 목표치에 이르기 전까지 안심할 수 없는 실정이다.
마지막으로 신흥국·개발도상국들은 대외 리스크에 더 민감하다. 서방국의 통화정책 긴축이 지속되면 금리 격차가 벌어져, 신흥국·개발도상국에서 자본이 유출되고 통화가치가 절하된다. 그렇게 되면 수입 물가가 상승하고 외환보유고를 헐어 환율 안정화에 나서거나 튀르키예(옛 터키)처럼 추가 금리 인상이 필요할 수도 있다.
경고음 커지는 금리 인상 리스크
현시점에서 추가 금리 인상은 무시할 수 없는 리스크를 수반한다. 우선 금리가 상승하면 은행 대차대조표상 자산의 시가 평가 가치가 하락한다. 실리콘밸리은행(SVB) 등 미국 지방은행들의 연쇄 파산을 촉발한 근본적 원인이 바로 이것이다. 또 주택담보대출 금리 상승으로 주택 시장이 하방 압력을 받고 있으며, 이미 악화된 가계 재정이 더 심한 압박을 받고 있다. BOE는 금리 인상의 여파로 약 200만 가구의 주택담보대출 월간 이자 비용이 200~499파운드(약 33만~82만원) 증가할 것으로 예상했다. 또 원격 및 하이브리드 근무 확산으로 사무실 공간 수요가 줄어 상업용 부동산이 타격을 받았고, 이런 자산에 대거 투자한 은행과 금융 서비스 기관들의 재정 건전성 우려가 불거지고 있다.
금리가 상승하면 자본 조달 비용이 상승해 정부 재정도 위험해진다. 팬데믹 기간 세수가 줄고, 공중보건 비용, 가계와 기업 지원금 지출이 늘어 정부 부채가 눈덩이처럼 불었다. 문제는 부채는 쌓이는데 이자 비용도 증가하는 것이다. 미국 의회예산국(CBO)은 공공 부채 이자율이 2022년 2.2%에서 2024년 2.9%에 이를 것으로 예상했다. 특히 부채는 많은데 경제성장률이 낮고 팬데믹으로 구조적 결함이 증폭된 국가는 문제가 더 심각하다. 최근 이집트와 파키스탄이 국제기관에 손을 벌렸고, 스리랑카는 디폴트에 직면했다.
미국과 유럽, 연내 금리 인하 없다
연준은 지난 7월 금리 인상을 마지막으로 숨 고르기에 들어갈 것으로 보이지만, 연내 완화 기조로 전환할 가능성은 거의 없다. 미국 경제도 급격한 금리 인상 주기를 잘 견디고 있어, 서둘러 기조를 전환할 이유가 없다. 딜로이트 이코노미스트들은 미국이 2023~2024년 경기침체를 피할 것이라는 시나리오를 제시한 바 있다. 하지만 2022년 2.1%를 기록했던 국내총생산(GDP) 성장률은 올해 1.4%로 둔화한 후 내년 1.3%까지 떨어질 것으로 전망했다. 이대로라면, 연준이 2024년 하반기까지 완화적 통화정책 기조로 전환할 가능성이 거의 없다. 실제로 제롬 파월 연준 의장은 8월 25일 ‘잭슨홀 심포지엄’ 연설에서 “물가 상승률이 목표 수준으로 계속 하락하고 있다고 확신할 때까지 긴축적 수준으로 통화정책을 유지할 것”이라고 말했다.
ECB는 노동시장 경색으로 내년까지 유로존 근원 인플레이션율이 계속 상승할 것으로 전망하며, 지난 7월 기준금리를 25bp 인상했고, 근원 인플레이션이 완화되지 않으면 연내 추가 금리 인상이 가능하다는 입장을 밝혔다. 크리스틴 라가르드 ECB 총재는 인플레이션이 높은 수준에서 고착화될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오는 상황에서 안정 목표치를 2%로 고수하겠다는 입장을 확인했다. 그는 “우리는 게임을 하고 있고 게임에는 규칙이 있으며 중간에 그 규칙을 바꿔서는 안 된다”며, 안정 목표치를 상향하면 인플레이션 통제를 유지하는 열쇠인 기대 인플레이션이 높아질 수 있다고 경고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