막강한 기축통화 지위를 유지하던 달러가 흔들리고 있다. 작년 3월 국제통화기금(IMF)이 내놓은 ‘달러 지배력의 은밀한 침식: 비전통적 준비 통화 부상’이란 제목의 보고서에 따르면, 세계 외환보유액 가운데 달러 자산 비중은 최고 73%에서 지난해 약 58%까지 쪼그라든 것으로 나타났다. 원인은 복합적이다. 우선 우크라이나·러시아 전쟁에 따른 서방 제재로 세계 금융 시스템에서 러시아가 배제됐다. 미국과 경쟁하고 있는 중국은 ‘탈(脫)달러’를 추진하며 다른 나라 중앙은행들이 위안화를 더 많이 채택하도록 치열한 외교전을 펼치고 있다. 실제로 아르헨티나는 올해 4월부터 중국에서 상품을 수입할 때 위안화로 결제하고 있다. 여기에 러시아에 대한 금융 제재가 원자재 시장의 달러 지배력을 약화시킨 영향도 있다. 가령 인도는 제재를 피할 목적으로 아랍에미리트(UAE) 디르함화나 러시아 루블화로 러시아산 원유를 구매하겠다고 발표한 바 있다. 물론 달러의 지위가 흔들림 없이 유지될 것이란 전망도 있다. 영란은행(BOE) 산하 싱크탱크인 공적통화금융기구포럼(OMFIF)이 최근 전 세계 75개 중앙은행을 대상으로 한 연례 설문 조사에 따르면, 전체 외환보유액 중 달러가 차지하는 비중은 현재 58%에서 10년 후 54%까지만 줄어들 것으로 집계됐다. OMFIF 관계자는 “달러가 지난 10년간 감소 추세를 보였지만, 향후에는 큰 추세 변동이 없을 것”이라고 설명했다. 세계적 경제 석학인 필자는 달러가 기축통화의 지위를 잃게 될 것이란 전망에도 역사적 사례를 볼 때 지금의 지정학적 변수가 달러 패권의 종말을 가져오기는 어렵다고 내다봤다. 대신 달러의 기축통화 지위는 앞으로 미국이 급증하는 부채를 어떻게 관리하고 현명한 경제·정치적 판단을 어떻게 하는지 등 발행국의 선택에 달려있다고 강조한다.
사진 셔터스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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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경제와 금융시장에서 달러가 지배력을 잃게 될까. 많은 전문가는 분명 그렇게 생각하고 있다. 러시아는 당연히 그것이 사실이길 바라고 있다. 미국의 은행 시스템에서 차단되고 ① 은행 간 국제 결제망(SWIFT·스위프트) 회원 자격이 정지된 상태이기 때문이다. 세계 각국이 위안화로 거래하도록 장려하는 중국 역시 달러의 세력 약화를 돕고자 하는 것이 분명하다. ② 루이스 이나시우 룰라 다 시우바 브라질 대통령의 경우 브릭스(BRICS·브라질, 러시아, 인도, 중국, 남아프리카공화국)가 달러의 대안으로 공동 통화를 만들 것을 촉구한 바 있다.

배리 아이켄그린 
캘리포니아대 버클리 
캠퍼스 경제학과 교수
예일대 경제학 박사, 현 
전미경제연구소 연구위원, ‘공공 부채의 방어’ 저자
배리 아이켄그린 캘리포니아대 버클리 캠퍼스 경제학과 교수
예일대 경제학 박사, 현 전미경제연구소 연구위원, ‘공공 부채의 방어’ 저자

러시아가 달러 사용에서 멀어지기 시작한 것은 2014년 크림반도를 불법 병합한 뒤에 이어진 미국의 제재 때문이었다. 일각에선 미국의 달러 ‘무기화’를 목격한 다른 국가들이 크렘린궁의 사례를 따를 것이라고 경고했다. 실제로 중국의 위안화 국제화 촉진 정책은 미·중 간 긴장뿐 아니라 국제적으로 세력을 과시하려는 중국의 열망을 반영하고 있다. 중국의 경제적 자급자족에 대한 다짐은 다른 정책에서도 드러난다.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대치 중인 두 국가의 거대 경제 중 하나만 화폐 패권을 누리고 있는 현재 상황에서 달러의 독보적인 우위는 지속되기 어려울 것이다. 마찬가지로 룰라 대통령이 제기한 공동 통화 논의는 브릭스 국가들의 힘과 영향력이 부정할 수 없을 만큼 커졌으며 미국의 동의와 상관없이 브릭스 국가들이 최고 통화 반열에 오를 자격이 있다는 주장을 반영한다.

그렇다면 이러한 지정학적 변화가 달러 패권의 종말을 가져올까. 지난 20세기의 역사는 ‘그렇지 않다’고 말한다. 역사에 따르면, 기축통화였던 화폐가 그 지위를 잃어버릴 수는 있다. 그러나 그 가능성은 통제할 수 없는 지정학적 상황뿐만 아니라 발행국의 결정에 달려 있다.

20세기 기축통화의 역사는 영국 파운드화가 상당 부분 써 내려갔다. 영국은 제1차 세계대전 이후 경제적으로나 재정적으로 약화한 상태였다. 숙련된 인력을 잃었고, 전쟁 자금을 조달하기 위해 자산을 매각했으며, 다른 국가와의 치열한 경쟁에 직면했다. 또 중요한 것은 영국이 전쟁 전 수준의 여섯 배에 달하는 국내총생산(GDP)의 130%에 달하는 공공 부채를 떠안았다는 점이다. 이로 인해 영국이 부채 가치를 유지할 수 있을지, 아니면 독일, 프랑스, 이탈리아의 경우처럼 부채가 불어날지에 대한 의문이 제기됐다.

1920년대 초에 달러가 경쟁자로 부상했지만, 스털링(영국 파운드화)의 국제적 지위는 계속 유지됐다. 윈스턴 처칠 당시 영국 재무장관은 정치권의 광범위한 지지에 힘입어 스털링의 지위를 유지하는 데 주력하기로 했다. 이에 물가를 전쟁 전 수준으로 낮추면서 금과 달러에 대한 환율을 회복시켰다. 일정 부분 공공 지출을 제한하기도 했다. 

이러한 정책은 영국의 경쟁력에 부정적 영향을 줬고 결국 생산량과 고용 측면에서 대가를 지불해야 했다. 그러나 이러한 대가는 세계경제에서 파운드화의 역할을 재정립하기 위한 것으로 받아들여졌으며, 이러한 목표는 금융 지도자들과 제국주의자들 모두의 이익과 부합했다. 결과적으로 영국이 자국 주도 통화 지역인 ‘스털링 지역’의 중심축이던 격동의 1930년대에도 파운드화의 패권은 지속됐다.

하지만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영국은 더 큰 빚을 지게 됐다. 또한 완전고용을 최우선 과제로 삼고 있었기 때문에 파운드화에 대한 정책이 매우 달라졌다. 수요 부양과 완전고용을 대외 균형과 조화시키기 위해 1949년 파운드화 평가절하가 단행됐다. 다른 중앙은행과 정부에 의한 무질서한 파운드화 잔고 청산을 방지하기 위해 환율 통제와 상업적 위협 등의 방법도 사용됐다. 이러한 조치는 국제 통화 지위 유지와 정반대되는 것이었다. 파운드화와 달러 간 경쟁이 계속되고 있다는 교과서적인 견해와는 달리, 메이리스 아바로 같은 학자들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이미 파운드화에서 벗어나려는 움직임이 활발히 진행되고 있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이 시점에서 지정학적 요인이 개입했다. ③ 1956년 영국이 수에즈 운하를 장악하기 위해 이집트를 침공하고 스털링화가 폭락하자 드와이트 아이젠하워 당시 미국 대통령은 영국이 군대를 철수할 때까지 지원을 거부했다. 이에 따라 스털링의 세계적 위상은 완전히 추락했다. 하지만 이러한 지정학적 사건은 이미 기정사실화돼 있던 스털링의 쇠퇴와 몰락을 확인시켜 줬을 뿐이다.

따라서 역사가 주는 근본적인 교훈은 현존하는 국제 통화 발행국에 그 지위를 유지하거나 떨어뜨릴 수 있는 선택권이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달러의 세력 유지 여부는 단순히 미국과 러시아, 중국, 브릭스 간 관계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니다. 미국이 급증하는 부채를 관리하고, 비생산적인 부채 한도 협상을 피하며, 더욱 슬기로운 경제·정치적 결정을 할 수 있느냐에 따라 결정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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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ip

전 세계 200여 개국 1만1000개 이상 금융기관이 안전하게 결제 주문을 주고받기 위해 쓰는 전산망이다. 스위프트에서 제외되면 사실상 달러나 유로화 등으로 해당 금융기관과 입금, 출금 등의 금융 서비스를 진행할 수 없다. 

이 때문에 가장 강력한 금융 제재로 꼽히는 스위프트 퇴출은 세계 금융과 자본시장에서의 퇴출과 같은 의미로 받아들여진다. 2022년 러시아에 앞서 스위프트에서 퇴출된 국가는 이란이다. 2012년 당시 이란은 핵 개발로 스위프트에서 퇴출, 석유 수출 등 무역에 난항을 겪은 바 있다.

올해 8월 남아공 요하네스버그에서 열린 브릭스 정상회의 중 룰라 브라질 대통령은 브릭스달러라는 공동 통화를 만들어 신흥국 사이 무역과 투자에 사용하자고 제안했다. 달러를 사용하지 않는 국가들이 달러로 거래하도록 강요당해서는 안 된다는 취지였다. 다만 개최국인 남아공이 “브릭스 결제 시스템은 스위프트를 대체할 수 없다”며 사실상 브릭스 공동 통화를 거절했다. 정상회의의 공식 의제에도 포함되지 않았다.

일명 ‘수에즈 위기’로 불리는 이 사건은 1956년 가말 압델 나세르 당시 이집트 대통령이 각종 사회간접자본(SOC) 확충에 필요한 재원 마련을 위해 수에즈 운하 국유화를 선언하면서 발생했다. 

당시 수에즈 운하 지분을 갖고 있던 영국과 프랑스는 이에 반발, 이스라엘을 끌어들여 이집트를 공습하고 운하를 점령했다. 하지만 미국의 압박과 소련의 핵 공격 위협으로 3국의 연합작전은 실패로 끝났고, 모두 철수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