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 셔터스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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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 미국의 통화인 달러는 국가적 아이콘이자 문화의 상징일 뿐만 아니라 거의 모든 국제 거래에 사용되는 중요한 결제 수단이다. 1783년 영국과 식민지 반군이 프랑스 파리에서 만나 평화조약을 체결하기 이전까지 지구상에 미국이라는 나라가 없었다. 1607년 버지니아를 시작으로 거의 130년에 걸쳐 북아메리카 대서양 연안에 띄엄띄엄 만들어진 13개 식민지가 있었을 뿐이다. 이러한 13개 식민지는 설립 초기부터 심각한 통화 문제에 직면했다.
신상준 한국은행 
이코노미스트
연세대 법학 학·석사, 
서울시립대 법학 박사, 
‘중앙은행과 화폐의 헌법적 문제’ ‘돈의 불장난’ 
‘국회란 무엇인가’ 저자
신상준 한국은행 이코노미스트
연세대 법학 학·석사, 서울시립대 법학 박사, ‘중앙은행과 화폐의 헌법적 문제’ ‘돈의 불장난’ ‘국회란 무엇인가’ 저자

8비트 달러와 8비트 컴퓨터

일부 정착민이 유럽에서 주화를 들여왔지만, 일상적 거래에 사용하기에는 터무니없이 부족한 수준이었다. 돈이 충분하지 않은 식민지 주민들은 물물교환을 하거나 왐펌(wampum), 못, 담배 같은 상품화폐를 사용했다. 왐펌은 인디언 부족이 조개껍데기를 가공해 만든 아름다운 목걸이로서 우리나라의 자개처럼 형형색색 아름다운 빛을 낸다. 이렇듯 식민지의 가장 중요한 문제는 화폐, 즉 금화와 은화가 부족하다는 것이었다. 공식 화폐는 영국의 스털링 파운드였지만 식민지에서 사용할 수 있는 영국 주화가 거의 없었다. 그나마 식민지에 남아있는 주화는 상태가 좋지 않았다. 가죽 부대에 주화를 넣고 흔들어서 소량의 금가루를 만들어 내거나 주화의 가장자리를 잘라내는 일이 관행처럼 벌어졌기 때문이다. 시간이 흐르면서 서인도 제도와 무역으로 인해 스페인, 포르투갈, 프랑스 주화가 식민지에 유입됐다. 그중 가장 유명한 것은 스페인 달러(Thaler)로서 17세기와 18세기 대부분의 기간 식민지의 비공식 국가 통화로 사용됐다. 독특한 디자인과 일관된 은 함량으로 인해 스페인 달러는 식민지 주민들이 가장 신뢰할 수 있는 주화였다. 식민지인들은 잔돈(소액권)을 만들기 위해 스페인 달러를 8비트(bit·조각)로 잘랐다. 200년 뒤 애플이 최초로 8비트 퍼스널 컴퓨터(PC)를 만들어 냈듯이, 식민지인들은 최초로 8비트 주화를 만들어 낸 것이다. 

북미 식민지의 화폐 부족은 본국과 불평등한 무역 구조로 인해 더욱 심화했다. 식민지는 영국에 농산물, 목재, 모피를 수출하고 영국의 금화와 은화를 수출 대금으로 받았다. 하지만 식민지에 유입된 영국 주화는 식민지에서 수입하는 공산품, 산업 자재, 사치품 등의 대가로 빠르게 영국으로 되돌아갔다. 1652년 매사추세츠 식민지는 만성적인 무역적자가 초래하는 화폐 부족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독자적으로 조폐국을 설립했다. 하지만 곧 영국에 의해 강제로 폐쇄됐다.

고대 유럽 은화. 사진 셔터스톡
고대 유럽 은화. 사진 셔터스톡

엘살바도르의 비트코인

당시 북미 식민지의 화폐적 상황은 오늘날 엘살바도르의 그것과 유사한 면이 많다. 중미 최빈국 중 하나인 엘살바도르는 만성적 초인플레이션(화폐 가치가 폭락하며 물가가 계속 오르는 현상)으로 인해 1892년부터 100년 이상 사용하던 자국 통화 콜론(colon)을 포기하고 2001년부터 미 달러를 법정통화로 사용하게 됐다. 하지만 엘살바도르의 달러화(dollarization)는 또 다른 취약성을 드러냈다. 국내총생산에서 해외 거주 국민의 본국 송금액이 차지하는 비중이 20%에 이르지만, 국민의 70%가 은행을 사용하지 못하기 때문에 달러의 유통성이 매우 제한적이었다. 게다가 2020년 코로나19 사태로 인해, 해외에서 송금하는 달러 금액이 감소하고 무역수지 적자 폭이 커지면서, 달러 부족으로 인한 경기침체가 가속화했다. 2021년 9월 7일 젊고 청렴한 부켈레 대통령은 비트코인을 법정통화로 지정하고, 전 국민에게 30달러 상당의 비트코인이 들어있는 전자지갑(Chivo Wallet)을 무료로 제공한 바 있다. 하지만 이 실험의 성공 여부는 아직 미지수다.

영국인의 관점에서 볼 때 식민지가 자체 주화를 발행하는 것은 불경스럽고 위험한 일이었다. 당시 유럽에서는 주화 발행이 주권자(sovereign)인 국왕의 전권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주화 발행은 국가적 독립성을 과시하는 행위이기도 했다. 영국의 금지 조치에도 불구하고 매사추세츠 식민지는 여러 해 동안 몰래 주화를 발행했다. 하지만 모든 주화에는 발행 연도가 1652년으로 찍혀 있다. 주조연도를 이런 식으로 표시한 이유는 영국이 불법 주화에 대해 알게 되더라도 과거에 만들어진 주화라고 주장하려고 했기 때문이다.

전쟁과 금융 혁신

태양왕 루이 14세가 프랑스의 국왕으로 즉위하면서 유럽 대륙은 전운에 휩싸였다. 유럽에서 시작된 전쟁은 전 세계로 번져나갔고 북미 대륙에서도 프랑스와 영국의 식민지 간 전쟁이 벌어졌다. 1690년 매사추세츠 식민지는 프랑스령 캐나다 원정에 나섰으나 실패하고 돌아왔다. 그리고 군인들의 급여 문제로 골머리를 앓게 된다. 현지에서 약탈한 귀금속이나 새로운 토지를 배분해 줄 계획이었으나 무산된 것이다. 결국 매사추세츠 정부는 신용어음(bill of credit)을 발행해서 문제를 해결하기로 했다. 신용어음이란 미래의 약정된 기일에 액면가에 해당하는 은화를 지불하겠다는 내용이 담긴 채무 증서를 말한다. 이후 다른 식민지들도 매사추세츠의 예에 따라 신용어음을 발행하기 시작했다. 엘살바도르가 전자신호(비트코인)를 통화로 선택했듯이 13개 식민지는 종이(신용어음)를 통화로 지정한 것이다. 신용어음은 정부 부채 관리 수단으로도 사용됐다. 식민지 정부는 신용어음(정부 부채)을 발행해 유통하고 나서, 이것을 세금 납부 수단으로 수취한 다음, 수취한 신용어음을 소각하는 방식으로 정부 부채를 관리했다. 하지만 식민지 정부가 너무 많은 신용어음을 발행하거나 세금 징수를 통해 신용어음을 회수하지 못하는 경우, 증가한 통화량이 인플레이션(물가 상승)을 유발했다. 특히 북부와 남부 식민지에서 이런 일이 빈번했다. 중부 식민지와 달리 이곳에서는 전쟁이 자주 벌어졌기 때문이다.

식민지 화폐의 가치 하락은 영국 채권자들에게 해로웠다. 이들의 상당수가 신용어음을 매개로 거래했기 때문이다. 식민지 채무자가 만기에 대출 원금을 모두 갚더라도 신용어음의 화폐 가치가 낮아졌기 때문에 영국 채권자의 구매력이 하락하게 된다. 영국 의회는 영국 상인들을 보호하기 위해 식민지에서 발행되는 신용어음을 규제하기 시작했다. 여러 차례 통화법(currency act)을 만들어서 식민지 정부가 발행한 신용어음의 법화성을 박탈한 것이다. 이러한 금지는 영국과 식민지 사이에 정치적 긴장을 조성했으며, 미국 혁명이 도래하는 주요 요인으로 작용한다. 1775년 혁명전쟁이 일어나자, 반란 식민지들은 군비를 충당하기 위해 다시 신용어음을 발행했다.

벤저민 프랭클린의 ‘겸손한 탐구’

당시 신용어음은 오늘날 비트코인만큼이나 혁신적인 것이었다. 1729년 벤저민 프랭클린은 자신의 논문 ‘종이 화폐의 본질과 필요성에 대한 겸손한 탐구(A Modest Enquiry Into the Nature and Necessity of a Paper-Currency)’를 통해 다음과 같이 종이를 옹호한다. 

“풍부한 통화는 이 지역(식민지)의 무역과 부를 발전시키고 주민 수를 늘리는 데 크게 기여할 것이다. 이렇게 되면 영국은 이곳에서 그들의 상품에 대한 훨씬 더 큰 관심과 수요를 불러일으킬 수 있을 것이다. 이곳에서 신민의 재산이 증가하면 본국의 국왕은 더욱더 강력해질 것이다. 이곳에서 종이돈을 만드는 일에 반대하는 것은 영국에 이익이 되지 않는다. 필요(부족함)에 대한 판단은 바로 우리(식민지인) 자신이 해야 한다. 우리들 스스로 그 편리함을 찾아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