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근혜 전 대통령 탄핵에 결정적 역할을 했던 미르·K스포츠재단은 삼성과 현대차, SK 등 국내 대기업을 포함해 40개 기업이 총 774억원(K스포츠재단 288억원, 미르재단 486억원)을 출연해 만들어졌다. 하지만 스포츠 지원을 위해 만들어졌다는 애초 설립 목적과 달리, 박 전 대통령의 비선 실세 최서원(개명 전 최순실)씨의 사익 추구를 위한 재단으로 알려지면서 K스포츠재단과 미르재단은 결국 박 전 대통령 탄핵 사건의 발판이 됐다.

박 전 대통령 탄핵 후 재단은 더 비참한 최후를 맞았다. 2017년 3월 박 전 대통령이 탄핵되자 담당 부처였던 문화체육관광부(문체부)가 두 재단의 설립 허가를 취소한 것이다. 박 전 대통령의 1심 선고 전인 2018년 4월 K스포츠재단 잔여재산이 국고로 귀속됐다. 반면 K스포츠재단은 문체부의 설립 허가 취소 처분에 대해 취소 소송을 제기하는 등 불복하면서 현재까지 청산 절차가 진행 중이다. 작년 11월쯤에는 기금을 냈던 기업들을 상대로 출연금 반환 채무에 대해 채무부존재 확인 소송을 제기해 법정 다툼에 들어가게 됐다.

첫 시동은 KT가 걸었다. 2019년 11월 KT가 K스포츠재단을 상대로 부당이득금을 반환하라며 소송을 낸 것이다. 이 소송은 1심에 이어 항소심에서도 KT의 승리로 결론 났다. 대법원도 지난해 5월 심리불속행 기각 판결하며 사건은 K스포츠재단이 KT에 출연금을 돌려줘야 한다는 취지로 막을 내렸다. 법무법인 화우가 대리한 이 사건은 두 재단에 기금을 냈던 여러 사건 중 첫 대법원 판단으로, 현재 1심이 진행 중인 다수 사건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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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요로 돈 냈다’ 대법서 무죄⋯‘동기 착오’ 찾아낸 화우

사건은 지난 2018년으로 올라간다. K스포츠재단이 그해 8월 각 기업에 출연한 기금을 돌려받을 것인지 묻는 공문을 보냈다. 박 전 대통령이 1심에서 징역 24년을 선고받았는데, 재판부가 미르·K스포츠재단 출연금 관련 강요 혐의를 유죄로 인정했기 때문이다. 이때 기금을 출연했던 기업들은 출연 행위를 취소하고 출연금 반환을 요청한다고 K스포츠재단에 회신 공문을 보냈다. ‘사기나 강박에 의한 의사표시는 취소할 수 있다’는 민법 제110조 제1항에 근거해서다.

하지만 이듬해 9월 대법원이 박 전 대통령의 미르·K스포츠재단 관련 강요 혐의를 최종 무죄로 판단하면서 상황이 바뀌었다. KT가 출연금을 반환받으려면 K스포츠재단에 대한 출연 행위가 무효이거나 취소 사유가 명백히 있어야 한다. 박 전 대통령의 강요죄가 대법원에서 무죄 판결을 받으면서 ‘강박’을 원인으로 출연 행위를 취소할 수 있는지에 대해 다툼이 있게 된 것이다.

화우는 민법 109조 1항을 내세웠다. 이 조항은 ‘의사표시는 법률행위 내용의 중요 부분에 착오가 있는 때는 취소할 수 있다’고 규정한다. KT가 출연 의사를 드러낼 수 있었던 동기 자체에 착오가 있었기 때문에 출연 행위를 취소해야 한다는 것이다. K스포츠재단에 의해 착오가 유발됐고, 그 책임 소재가 K스포츠재단에 있다는 설명이다. 최유나(사법연수원 37기) 변호사는 “탄핵결정문 검토 결과, 강박보다 착오의 인정 가능성이 커 보였다”고 설명했다.

“동기 착오” vs “중과실”…법정 싸움 본격 시작

화우가 주장의 근거로 제시한 건 출연 기업들이 받았던 K스포츠재단의 제공 자료였다. K스포츠재단 설립 추진계획서 등에 따르면 이 재단의 설립 목적은 ‘체육을 통한 건강한 사회 구현’ 등이었다. 

최 변호사는 “실제로 K스포츠재단이 최서원씨의 사익 추구를 위한 것이었음에도 해당 자료에는 내용이 전혀 없었고, 안종범 전 수석과 전경련도 이를 묵비(默祕)했다”며 “KT가 동기 착오에 빠질 수밖에 없었던 이유를 설명하기 위함”이라고 했다.

반면 K스포츠재단 측은 “KT의 동기 착오가 없었다”며 맞섰다. KT가 단지 청와대의 추진 사업이라는 점 때문에 기금을 출연한 것으로, KT의 착오와 출연 행위 사이의 인과관계가 인정되지 않는다고 주장했다. 이어 K스포츠재단 측은 KT의 중과실도 지적했다. KT가 K스포츠재단 설립 목적이나 사업 내용 등에 관해 충분한 검토 과정을 거치지 않고 출연했기 때문에 KT의 중과실에 해당한다는 것이다.

화우는 즉각 반박에 나섰다. 우선 청와대 관심 사항이라는 동기가 있더라도 인과관계가 유지된다는 주장과 함께 KT의 의사결정 과정을 강조했다. 내부 경영위원회 의사결정 과정을 보면, K스포츠재단의 설립 목적과 사업 내용, 정관 등을 토대로 ‘건전한 체육 발전’을 위해 설립되는 재단이라고 보고 출연을 결정했다는 점을 근거로 제시한 것이다. 또 재단 설립 과정에 범죄가 개입되면서 설립 자체가 취소되는 위법성이 확인된 사안으로, 이를 알았다면 출연하지 않았을 것이라는 주장도 덧붙였다.

화우 주장 인정…“출연금 반환, 법질서 회복 사례”

이 사건을 심리한 서울중앙지법 민사합의25부(당시 이관용 부장판사)는 KT의 주장을 받아들였다. 재판부는 “KT가 출연 행위에 이르게 된 동기의 착오는 최서원, 안종범 등에 의해 유발된 착오”라며 “출연 행위에 관한 중요 착오에 해당하므로 KT는 출연 행위를 취소할 수 있다”고 판시했다. 안 전 수석과 전경련 담당자들이 범죄가 가담됐다는 사실을 묵비한 점, KT 내부 의결 과정에서 정관과 계획서에 적시된 내용만을 안건으로 다룬 점 등에 근거해서다.

법원은 또 KT의 착오와 출연 행위 사이 인과관계가 없다는 K스포츠재단의 주장도 기각했다. 재판부는 “재단 설립이 청와대와 대통령의 관심 사안이라는 동기가 있었더라도, 설립에 관해 불법성을 압도·무시할 정도의 증거가 없는 이상 인과관계가 단절됐다고 보긴 어렵다”고 지적했다. 

K스포츠재단의 항소와 상고로 진행된 상급심에서도 1심 판단이 그대로 인정되면서, 판결은 확정됐다. 이에 따라 KT는 출연한 7억원을 돌려받게 됐다.

이 판결에는 크게 두 가지 의미가 담겨 있다. 국가기관의 불법행위로 재산 피해를 본 출연 기업들이 자금을 회수했다는 게 첫 번째 의미다. 최 변호사는 “이 사건에서 기금이 국고에 귀속됐다면 청와대 등이 권력을 불법으로 행사해서 재산을 부당하게 갈취한 행위를 용인하는 꼴”이라며 “국가기관이 국민의 재산권을 침해하는 모양새가 됐을 것”이라고 했다. 이어 “하지만 불법적인 출연금을 피해자들에게 반환하라는 판결을 해 법질서가 회복될 수 있었다”고 했다.

아울러 남은 소송들에 영향을 주고 있다는 점도 의미다. 이 소송이 제기될 초기엔 미르재단의 기금이 국고에 그대로 귀속되면서 K스포츠재단에 낸 돈을 받을 수 있을지 의문이었다. 더군다나 강요죄가 무죄로 판단되며 KT 외에 다른 기업들은 주저했던 것으로 전해졌다. 최 변호사는 “기업에 돌려줘야 하는지에 대해서도 사회적 합의가 이뤄지지 않았었는데, 판결 이후 ‘돌려줘야 한다’는 일관된 판례가 계속됐다”며 “법원의 순기능”이라고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