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00년은 인류사에서 혁명적 번영의 시기다. 그 이전 인류는 문맹, 가난, 노동과 단명의 굴레를 벗어나지 못했다. 18세기 후반과 19세기에 걸쳐 당대 최고의 지성은 미래에 대해 절망과 희망을 엇갈리게 예견했다. 인류는 절망의 예견을 통해서 긴장했고, 희망의 사상으로부터 용기를 얻어 결국 번영의 시대를 일궈냈다. 그 여정에서 인류의 위대함을 되새기고 교훈을 얻고자 한다.
영국의 토머스 맬서스(Thomas Malthus)는 1798년 ‘인구론’에서 인류의 삶은 식량의 여유가 생기면 출산율이 증가하고 이로 인해 다시 기아에 허덕이는 빈곤의 쳇바퀴를 빠져나갈 수 없다는 절망적인 예측을 했다. 그러나 이를 극복하는 지혜는 이미 100년 전 싹트고 있었다. 1689년 영국의 윌리엄 3세는 의회와 권력을 나누는 권리장전에 동의했다. 의회는 사유재산권을 보호하고 기회의 평등을 보장하는 포용적인 제도를 추구했다. 이러한 포용적 제도 아래서 도덕에 기반한 경제사상이 꽃을 피웠다.
영국의 도덕 철학자 애덤 스미스(Adam Smith)는 1759년 ‘도덕감정론’과 1776년 ‘국부론’에서 인간 개개인의 이기적인 경제활동에도 불구하고 인간이 연민을 가지고 타인을 이해하려 할 때 도덕성을 가지게 되며 이 도덕심이 사회 전체의 이익과 조화를 이룬다고 했다. 이는 개인의 이기적 경제활동이 의도하지 않은 이타적인 공공의 선(善)과 집단의 부(富)가 됨을 깨우쳐 상인과 기업가에게 용기를 갖게 했다.
미국 건국의 아버지인 벤저민 프랭클린 (Benjamin Franklin)은 1756년 여름 스코틀랜드 세인트앤드루대학에서 전기를 발견한 공로로 명예박사 학위를 받았다. 이 여행에서 애덤 스미스와 당대의 철학자 데이비드 흄(David Hume)을 만나 공공의 선의 경제를 깊이 논했다. 이 만남은 분명 미국 번영의 씨앗이 됐다. ‘국부론’을 탐독한 카를 마르크스와 프리드리히 엥겔스는 인류사의 명저 ‘공산당 선언’과 ‘자본론’을 출간했다. 자본가와 노동자로 계급이 구분되는 산업사회에서는 두 계급 간 투쟁은 피할 수 없으며 이는 결국 공산혁명으로 사회가 붕괴할 것이라는 절망적 예견을 했다. 그러나 산업화한 국가에서는 투표권을 확대해 권력을 분산시키고, 복지 정책을 통해 계급 간 불평등과 갈등을 완화해 공산혁명을 막을 수 있었다. 또한 마르크스의 예견과 달리 산업 기술의 빠른 변화는 인적 자본의 중요성을 깨닫게 해 전 세계는 공교육을 보편화하는 데 전력했다.
소수의 특권층이 토지의 대부분을 소유한 국가에서는 지주들이 공교육을 극렬히 반대했다. 교육은 농민의 생산성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여겼다. 우리나라도 1948년 정부 수립 후 제1대 농림부 장관인 조봉암에 의해 농지개혁법이 입법화되어 소수 대지주의 토지를 실제 농사를 짓는 농민에게 유리한 조건으로 분배했다. 이를 통해 농업 생산성이 향상됐고 잉여 농산물을 정부에서 매입하는 양곡 매입법을 추가로 입법화해 농민의 삶을 향상시켰다. 6·25 전쟁 전 행한 토지 분배는 남한의 공산화를 막는 데 기여했을 뿐 아니라, 토지개혁을 통한 사유재산의 힘이 교육 기회를 촉진해 이후 산업사회 수요에 대응할 수 있었다.
1997년 우리나라 국가 부도의 위기 가운데 국제통화기금(IMF)의 급격한 강제 조치는 그 이후 한국의 장기적 성장을 심각하게 훼손했다. 미국은 1985년 플라자 합의를 통해 달러 대비 엔화 절상을 강제해 엔화는 30% 이상 절상됐고 그 후 일본은 지금까지 수십 년간 지속적인 경기 침체를 겪고 있다. 우리는 이제 어떠한 절망적 상황에서도 국민의 합의를 기반으로 한 독자적인 외교정책과 장기적 국익을 위한 경제정책을 절대 포기하지 않는 결연한 지도력을 교훈으로 새겨야 한다. 그간 인류사 최고 지성들이 예견한 절망 속에서 인류는 긴장하고 겸손했으며 결국 공생의 선한 의지와 지혜로 이를 극복하고 번영했음을 기억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