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라스 폰 트리에 감독의 2003년 영화 ‘도그빌 (Dogville)’은 1930년대 미국 콜로라도 로키산맥의 작은 마을을 배경으로 한다. 도그빌은 도로로 연결되어 있지만 험준한 산 지대를 제외하면 갈 곳이 없는 외딴 마을이다. 마을의 15명 남짓한 주민은 대공황의 빈곤함 속에서도 성실하게 삶을 살아가는 선량한 사람들로 묘사된다. 영화의 이야기는 대도시 갱단을 피해 도망치다 우연히 마을로 들어온 그레이스의 등장으로 시작한다. 주민들은 난처한 상황에 놓인 그레이스를 숨겨 주기로 합의하며, 그 이름이 의미하는 ‘은혜 (grace)’와 같은 관대함과 선의를 베푼다.
그러나 얼마 후 그레이스의 수배 포스터가 마을에 붙으면서 도그빌 주민들의 내면에 감춰져 있던 광기가 드러나기 시작한다. 주민들은 그녀의 결백함을 알면서도, 지명 수배자를 숨겨주는 위험의 대가로 혹독한 노동을 요구한다. 그레이스는 하루 종일 각 집을 돌며 할당된 시간 동안 일을 해야 하면서 더 이상 공동체의 일원이 아닌 노예 취급을 받는다. 남성들은 마을 외에는 도망갈 곳 없는 그레이스의 약점을 이용해 그녀를 성적으로 착취하기까지 이른다.
도그빌 주민들의 치명적인 문제는 그레이스에게 가하는 자신들의 행동이 정당하다고 확신하는 교만과 위선에 있다. 주민들은 탈출 시도에 실패한 그레이스에게 무거운 쇠사슬로 만든 개 목걸이를 채우면서 미안한 표정을 짓는다. 마을을 지키기 위해 어쩔 수 없는 선택이라고 설명하면서, 불편함은 없는지 묻는 이중성을 보인다. 영화는 도그빌의 집단적 위선과 광기 그리고 그레이스의 복수까지 이어지는 이야기 전개를 통해 인간 본성에 대한 무한한 낙관주의, 즉 휴머니즘은 과연 유효한가에 대한 질문을 던진다.

코넬대 건축대학원 석사, 서울대 건축학과 출강, 전 헤르조그 앤드 드 뫼롱 스위스 바젤 사무소 건축가
집단을 조명하기 위한 공간 장치
덴마크 출신의 감독은 영화의 엔딩 크레디트장면에서 데이비드 보위의 노래, ‘젊은 미국인(Young Americans)’을 배경으로, 가난하고 비참한 실제 미국 시민의 사진들을 화면 가득 채웠다. 이렇게 잔혹한 우화에서 갑자기 다큐멘터리로 변화하는 엔딩 장면은 미국 사회 내부의 윤리성과 국제사회에서의 미국의 태도에 대해 비판적인 메시지를 던지면서 개봉 당시 많은 논쟁을 일으켰다. 공교롭게도 영화가 개봉한 2003년은 미국의 주도하에 이라크 전쟁이 시작된 해다.
영화는 개개인이 아닌 전체로서의 공동체 집단을 효과적으로 조명하는 것이 필요했다. 폰 트리에 감독은 도그빌을 위한 획기적인 공간 장치를 고안했다. 마을은 총 여덟 채의 건축물로 구성되어 있으며 주택과 상점, 마을 회관에서 서로 다른 직업을 가진 주민들이 생활하고 있다. 감독은 여기에서 마을의 풍경을 이루는 모든 건축물의 벽을 과감히 삭제했다. 각 영역의 경계가 바닥에 분필로 그은 선으로만 남게 했다.
건축의 벽은 기능과 사용자에 따라 공간을 물리적으로 구획하고, 시각적으로 분리하는 요소다. 이러한 벽이 사라지면서, 카메라의 시선에는 보이지 않는 경계 속에서 활동하는 모든 마을 주민의 모습이 한눈에 조명된다. 연극 같은 세팅 속에서 각 주민의 행동은 더 이상 개인적인 것이 아닌 집단적인 움직임으로 읽힌다. 한 가정의 침실에서 남성이 그레이스를 범할 때, 카메라는 집 밖으로 나와 마을 전체를 응시한다. 주민들은 각자의 영역에서 일상을 보내면서 한쪽에서 벌어지고 있는 섬뜩한 일에 대해서는 무감각하다. 이러한 모습은 도그빌 집단의 위선적인 자기 정당화와 옳지 않은 행동에 대한 인정 거부를 효과적으로 상징한다.

집단의 상호 교류를 위해 펼쳐진 단일 공간
영화에서 ‘벽이 없는 집합 공간’은 도그빌 주민 개개인을 하나의 집단으로 통합하는 데 활용됐다. 여기에서 각 구성원을 선한 의지와 타인에 대한 존중을 지닌 사람들로 치환한다면, 동일한 건축 형식은 긍정적인 집단 풍경을 형성하는 데 기여할 수 있다. 이 개념은 2010년에 개관한 스위스 로잔 연방 공과대학의 ‘롤렉스 러닝 센터(Rolex Learning Center)’에서 구체화됐다. 이 건축물은 대학 캠퍼스의 중앙에 위치하며 학생, 교직원과 일반인 모두가 이용할 수 있는 교류 학습 공간으로 사용된다. 2만2000㎡의 면적에는 식당, 도서관, 강당, 작업 공간, 카페테리아, 사무실 등의 시설이 마련되어 있다.
건축물 내부에서 일본 건축가 듀오인 ‘사나(SANAA)’는 모든 벽을 제거하고 각 영역이 물리적 경계 없이 펼쳐진 공간을 설계했다. 이러한 구성은 학습 과정에서의 사회적 상호작용을 강조하며, 학생들 간의 연대와 협업 기회를 극대화하기 위해 고안됐다. 이용자는 연속적으로 개방된 공간 사이를 이동하거나 한 영역에 머무르면서 항상 다른 활동 영역에 있는 사람들과 시각적으로 교류하고 소통할 수 있다. 또한, 벽이 없는 열린 공간은 한 활동 영역이 다른 영역으로 이어지는 다양한 순환 경로를 조성하여 이용자들 간의 우연한 만남을 촉진한다.
물결치는 지형이 형성하는 연속적인 관계성
그러나 시각적 장벽 없이 다양한 활동 영역을 개방하는 개념은 벽을 대신해 각 영역을 구획하고 음향 간섭을 최소화할 수 있는 대안을 요구했다. 이 건물은 166m 길이의 사각형 평면과 3.3m의 실내 높이를 가진 얇은 판 형태로 디자인됐다. 건축가는 사각형의 한가운데에 주 출입구를 배치하고, 네 변을 들어 올려 캠퍼스의 모든 방향에서 건물 내부로의 접근을 가능케 했다.
건축물을 구성하는 얇은 판은 ‘하늘을 나는 양탄자’처럼 유연하게 물결치며, 그 내부에 언덕과 계곡의 지형을 조성한다. 바닥에서 완만한 경사를 따라 형성되는 높이 변화는 벽이 없이도 각 활동 영역을 정의하고 음향적으로 분리할 수 있도록 한다. 내부 지형의 가장 높은 영역에는 레스토랑이 있고, 제네바 호수와 알프스의 아름다운 경관을 제공한다.
굽이치는 지형은 개방된 내부 공간의 이용자들이 한곳에 머물지 않고 유연하게 움직이게 한다. 건축물의 판을 관통하는 14개의 구멍은 자연 채광과 안뜰로의 조망을 제공하면서, 연속적인 동선의 흐름을 강조한다. 내부에서 가장 흥미로운 점은 언덕 지형 때문에 전체 공간을 한눈에 볼 수 없다는 점이다. 이로써 이용자는 연속성을 유지하면서도, 현재 위치의 공간 그리고 그곳의 타인과 온전히 관계를 맺는다. 건축가는 전체 공간의 주요 개념이 인간의 자유에 대한 존중이라고 설명했다. 끊임없이 개인과 개인을 연결하는 ‘롤렉스 러닝 센터’의 전제 조건은 영화 ‘도그빌’과는 대조적이다. 건축에서 ‘열린 집합 공간’의 형식은 타인의 자유를 소중히 여기며 세계와 적극적으로 관계하는 인간상에 대한 낙관적인 신뢰를 바탕에 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