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월 14일 일본 가나가와현 가마쿠라시 가마쿠라코코마에역(鎌倉高校前駅). 
만화 ‘슬램덩크’와 영화 ‘바닷마을 다이어리’ 배경지로 유명해 한국인·중국인에게 인기다. 사진 박소정 기자
10월 14일 일본 가나가와현 가마쿠라시 가마쿠라코코마에역(鎌倉高校前駅). 만화 ‘슬램덩크’와 영화 ‘바닷마을 다이어리’ 배경지로 유명해 한국인·중국인에게 인기다. 사진 박소정 기자

10월 13일 일본 도쿄도 긴자(銀座) 세이코 시계탑 앞에는 뉴욕 거리를 방불케 할 만큼 서양인이 북적였다. 긴자는 유명 백화점과 명품 매장이 즐비한 도쿄 대표 번화가다. 전 세계 사람이 일본을 찾아 돈을 쓰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상징적인 풍경이다. 긴자에서 마주친 미국인 마리아(27)는 “엔화가 저렴한 것이 여행지로 일본을 선택하는 데 영향을 미쳤다”면서 “미국에서 호텔 1박이 200달러라면, 이곳은 비슷한 호텔이 90달러 수준”이라고 말했다.

이튿날 만화 ‘슬램덩크’와 영화 ‘바닷마을 다이어리’의 배경지로 낡은 전차와 바다 배경이 유명한 가마쿠라(鎌倉)도 관광객이 가득 메우고 있었다. 특유의 평화롭고 한적한 분위기의 사진 한 장으로 잘 알려진 이곳이지만, 실상은 그런 사진을 남기려는 한국인으로 시끌벅적했다. “언니, 여기에 서야 사진에 사람들이 없어 보여.” 또렷한 한국어가 자주 들렸고, 그 옆에는 ‘규칙을 지켜 즐거운 여행을’이라고 한국어로 적힌 안내 표지판이 세워져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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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국인 북적이는 도쿄⋯정작 일본인은 지갑 닫았다

10월 초 찾은 일본에선 엔화 가치가 장중 달러당 150엔까지 떨어져, 대서특필하고 있었다. 한 달이 흐른 11월 초·중순, 엔화 가치는 미 국채 금리의 가파른 상승세를 맞닥뜨리며 더 떨어졌다. 11월 1일 도쿄 외환시장에서 엔·달러 환율은 151.17엔까지 상승(엔화 가치 하락)했고, 최근에도 150엔을 오르내리고 있다. 엔화에 대한 원화 환율도 11월 6일 2008년 1월 이후 15년 9개월여 만에 최저치인 100엔당 867원으로 떨어졌다. 엔화 가치 추락을 맞는 일본 경제의 속살은 어떨까.

긴자와 가마쿠라가 보여주듯 일본 경제는 엔저로 인한 관광 호황의 수혜를 누리고 있다. 일본 재무부에 따르면, 지난 8월 일본 여행 수지는 2582억엔(약 2조3238억원) 흑자를 냈다. 1996년 8월 이후 최대 규모다. 같은 달 경상수지 흑자 규모가 2조2797억엔(약 20조5173억원)이었던 것을 감안하면 10분의 1 이상을 여행 수지가 책임졌다. 외국인의 인바운드(inbound) 소비가 전기 대비 1.2% 성장한 2분기 ‘GDP(국내총생산) 서프라이즈’에 상당한 영향을 미쳤다. 

하지만 일본 자국민의 소비, 즉 내수 성적은 처참하다. 엔화 약세 현상이 수입 물가 상승을 부추기면서, 일본 국민은 최근 고물가를 절감(切感)하고 있다. 점점 더 지갑을 닫는 추세다.

일본 총무성 통계국에 따르면, 2인 이상 가구의 8월 실질 소비 지출은 전년 동월 대비 2.5% 감소했다. 지난해 11월 이후 2월(1.6% 증가)을 제외하고 현재까지 모두 ‘마이너스’ 다. 지난 7월엔 감소 폭이 5%에 달했다.

일본 경제에 밝은 한 전문가는 “일본의 현 20~50대는 자신이 살아오는 동안 물가가 높다는 걸 거의 경험해 본 적이 없는 세대”라며 “그런 사람들이 최근 1~2년간 물가의 가파른 오름세를 처음으로 겪는 데다 임금은 가격의 속도만큼 안 오르니 내수가 활성화되기 굉장히 어려운 상황”이라고 말했다.

일본 서민들이 현재 가장 강하게 고물가를 경험하고 있는 분야는 식품이다. 일본 대표 서민 음식 우동을 파는 한 유명 체인점의 가케우동(かけうどん) 소(小)자 한 그릇이 2020년 초 150엔이었는데, 지금은 290엔이다. 3년여 만에 약 두 배가 됐다. 공항에도 입국하는 외국인은 북적이지만, 출국하는 일본인은 별로 눈에 띄지 않았다. 지난 8월 출국한 일본인은 약 120만1200명으로 2019년 8월보다 40% 정도 줄었다. 일본에 입국한 외국인 215만6900명의 절반 수준이다.

10월 31일 일본 도쿄 시내에 있는 전광판에 달러 대비 엔화 환율이 표시돼 있다. 1달러당 150엔을 웃돈다. 사진 로이터연합
10월 31일 일본 도쿄 시내에 있는 전광판에 달러 대비 엔화 환율이 표시돼 있다. 1달러당 150엔을 웃돈다. 사진 로이터연합

도요타 훨훨 날지만⋯日 산업 99.7% 中企는 불이익

소비뿐 아니라 기업 경영 측면에서도 엔저의 명암은 뚜렷하다. 지난 2분기 일본 도요타자동차는 일본 기업 중 사상 처음으로 분기 영업이익 1조엔(약 9조원)을 넘어서는 기록을 썼다. 영업이익이 전년 동기 대비 155.6% 급증했다. 자동차가 많이 팔린 결과이지만, ‘엔저의 마법’ 효과도 적지 않다. 달러, 유로화 등으로 표시된 해외 영업 실적이 엔화로 계산되는 과정에서 더욱 증폭됐다. 도요타로 대표되는 일본 대기업들은 호황을 누리는 분위기다. 일본은행(BOJ)이 발표한 지난 9월 단기경제관측조사(단칸)에 따르면, 제조 대기업 업황 판단 지수는 전 분기 대비 4포인트 상승한 9로, 2분기 연속 상승했다. 단칸지수는 한국은행이 매달 발표하는 기업경기실사지수(BIS)의 일본 버전으로, 0을 웃돌고 전월보다 상승하면 경기를 낙관하는 기업이 많아졌다는 뜻이다. 음식·숙박 서비스가 포함된 비제조 대기업 역시 6분기 연속 오른 27을 기록해, 1991년 12월 이후 가장 높은 수준을 보였다. 하지만 일본의 모든 산업이 도요타처럼 마냥 엔저 수혜를 누리는 것은 아니다. 일본의 GDP 대비 수출액 비중은 20% 정도로, 우리나라(1분기 기준 43.8%)에 비해 확연히 낮은 편이다. 이마저도 대기업에 대부분 의존하고 있다.

일본 중소기업이 전체 기업에서 차지하는 비율이 99.7%라는 점을 고려하면, 일본 기업의 상당수는 엔저 혜택을 누리지 못하고 있다는 얘기다. 일본 내각부는 “지난 10년간 중소기업의 수출은 성장하지 않았고, 대기업에 비해 해외에서 벌 수 있는 힘은 한정적”이라고 평가했다.

엔저로 인한 중소기업의 어려움은 가중되는 분위기다. 한국의 중소기업진흥공단에 해당하는 일본 중소기업정비기구(中小企業基盤整備機構)의 지난해 12월 설문 조사에 따르면, ‘엔저에 대한 불이익이 더 크다’라고 답변한 중소기업이 50.6%를 차지했고, ‘이익이 크다’는 답변은 4.5%에 불과했다. 비교적 최근인 지난 6월 일본 상양산업연구소(常陽産業研究所)가 실시한 설문 조사에서도 답변은 비슷했다.

이런 상황은 일본의 무역수지 추이로 증명된다. 일본 재무성에 따르면, 지난 8월 무역수지는 9305억엔(약 8조3745억원) 적자로 집계됐다. 6월과 9월 각각 430억엔(약 3870억원), 624억엔(약 5616억원) ‘반짝’ 흑자를 기록했으나 이를 제외하곤 2021년 9월 이후 계속 적자 추세를 이어온 것이다.

일자리 현장에서도 적잖이 어려움을 토로하고 있다. 일본 건설 업계 관계자는 “예전에는 일본의 선진 건축 기술을 배우러 베트남이나 미얀마에서 일자리를 찾아 오는 사람이 많았는데, 지금은 외국인 인력이 많이 줄어들었다”고 했다. 일본 대학생 사이에서는 ‘일본에서 일할 바에 호주·캐나다·뉴질랜드 등으로 나가서 돈을 버는 게 이득’이라는 인식이 퍼지며 ‘워킹 홀리데이’ 열풍도 불고 있다.

엔저 선순환 고리 끊는 ‘임금’…日 정부 안간힘

일련의 부작용은 ‘임금 인상’이 제대로 뒷받침되지 않는 구조 때문에 더 부각된다. 일본의 소비자물가는 지난해 9월부터 올해 8월까지 12개월 연속으로 3%대 상승했지만, 임금 상승이 아닌 엔화 약세와 글로벌 원자재 가격 상승 같은 외부 요인이 작용한 결과였다.

일본 후생노동성 발표에 따르면, 일본 노동자의 임금이 지난 9월 급등하는 등 긍정적 조짐이 감지되긴 했다. 하지만 여전히 물가를 감안한 실질임금은 18개월 연속 감소세를 기록하는 등 ‘착시효과’에 불과하다는 평가가 잇따른다.

일본 정부는 ‘임금 인상→소비 촉진 및 물가 상승→기업 실적 개선→추가 임금 인상’으로 이어지는 선순환 구조를 구축하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다. 일본 정부는 최근 17조엔(약 153조원) 규모의 경기 부양책을 통해, 가계 소비력을 늘리기 위한 감세 정책과 중소기업 임금 인상 촉진을 위한 예산을 책정했다고 발표했다. 우에다 가즈오 BOJ 총재는 “내년 봄 춘투(춘계 노사 협상)가 중요한 포인트가 될 것”이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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엔야스(円安) 

‘엔저’란 말은 일본에서 ‘엔야스(円安)’라고 불린다. ‘값싸다’라는 뜻의 야스(安)를 혼용해서다. 엔화 가치가 1달러당 150엔으로 떨어진 올가을 일본에선 ‘좋은 엔야스’인지, ‘나쁜 엔야스’인지에 대한 논쟁이 이어지고 있다. 

좋은 엔야스는 관광·수출 호조 등 일본 입장에서 누릴 긍정적 효과를, 나쁜 엔야스는 수입 물가 급등으로 인한 소비 침체 등의 부작용을 일컫는다. 엔야스의 긍정·부정 영향은 일본은행(BOJ)의 완화적 통화정책 전환 여부와도 연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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日 BOJ ‘금리 정상화’ 선언 언제쯤…내년 봄 ‘출구 전략’ 가동 임박

우에다 가즈오
(植田和男) 
일본은행(BOJ) 총재. 
사진 연합뉴스
우에다 가즈오 (植田和男) 일본은행(BOJ) 총재. 사진 연합뉴스

‘엔저 시대’를 살아온 일본인은 그 명암을 논하면서, 이런 엔저를 부추긴 지난 10여 년간의 금융 완화 정책이 언제 끝날지에 대해 논의하고 있다. 중앙은행인 일본은행(BOJ)은 국채와 위험 자산 매입 확대, 수익률곡선제어(YCC) 정책 도입, 금리 조절 등 다양한 정책 수단을 동원해 금융 완화 정책을 지속해 온 바 있다. 시장에서 예상하는 BOJ의 통화정책 정상화의 순서는 YCC 해제→마이너스 금리 정상화→오버슈트 커미트먼트(Overshoot Commitment·소비자물가 상승률 2% 상회 시까지 본원통화 확대 공급)의 폐지다.

엔화 가치는 10월 들어 달러당 150엔으로 떨어지더니, 한 달째 회복하지 못하고 있다. 11월 들어선 152엔에 육박하면서 오히려 엔저가 심화하는 양상이다. 1990년 이후 33년 만의 최저 수준에 근접한 것이다. 폭락한 엔홧값은 원화와 비교해서도 힘을 쓰지 못하고 있다. 원·엔 재정 환율은 11월 6일 100엔당 867원으로 주저앉으며, 2008년 이후 최저치를 기록했다.

10월 30~31일 BOJ의 통화정책 회의 결과가 최근의 이런 흐름에 ‘기폭제’ 역할을 했다. BOJ는 기존 통화정책의 틀은 유지하면서도, YCC 정책을 조정하는 결정을 내렸다. 단기금리를 -0.1%로 유지하고, 장기금리(10년물 국채)는 기존 상한선인 1%를 일정 수준 넘어서도 용인하기로 한 것이다. 이는 지난 7월 이후 3개월 만의 YCC 정책 수정이었다. 다소 긴축적인 방향으로의 움직임이었다.

하지만 시장의 기대는 달랐다. 시장은 애초 이번 정책 회의에서 BOJ가 좀 더 진전된 수정을 할 것으로 내다봤었다. 대폭적인 금리 상한선 상향 조정, 나아가 사실상 ‘YCC 정책의 폐지’ 정도가 선언될 것이라고 기대한 것이다. 결국 시장에선 이번 발표가 ‘미세한 수준의 수정에 그쳤다’고 평가했고, 엔화를 투매하며 실망감을 표출했다.

정책 결정 회의 이후 이어진 우에다 가즈오 BOJ 총재의 발언에도 급격한 긴축 선언은 없었다. 그는 11월 6일 일본 나고야에서 열린 지역 비즈니스 리더 회의 연설에서 “10년물 국채 금리가 1%를 급격하게 넘을 것이라고는 예상하지 말아 달라”며 “지난주 발표한 새로운 YCC 정책으로도 대규모 채권 매입을 이어갈 수 있다”고 말했다. 10년물 국채 금리가 1%를 크게 뛰어넘을 경우 해당 국채를 매입하는 방식으로 금리를 떨어뜨리는 개입을 할 수 있다는 것이다. 금융 완화 기조를 이어갈 것임을 재확인한 셈이다.

그러나 물가 전망을 수정하는 방식으로 금융 완화 정책을 종료하기 위한 명분을 쌓았다는 해석도 나왔다. BOJ는 2024년 일본의 소비자물가 상승률을 2.8%(중앙값)로 전망했다. 3개월 전 예측한 1.9%에 비해 대폭 올려 잡은 것이다. ‘2% 물가 목표 달성’이 가시화되고 있다는 점을 시사한 것이다. 우에다 총재는 “물가 목표치 달성 정확도가 조금씩 높아지고 있다”며 “임금 상승이 물가 상승으로 이어지는 선순환이 강해져 소비자물가의 기조적인 상승률이 2%대로 서서히 높아질 것”이라고 발언했다.

물가 목표 달성에 대한 긍정적인 입장이 연일 선명해지는 것이다. 블룸버그는 “우에다 총재 발언이 물가 목표 달성에 있어 더욱 자신감을 드러내는 방향으로 바뀌고 있다”며 “이런 메시지는 때가 오면 일본 금융정책을 정상적으로 되돌리기 위한 길을 열어줄 것”이라고 해석했다.

시장에선 내년 3~4월쯤 BOJ가 금융 완화 정책에서 벗어나 긴축 기조로 전환하는 ‘출구 전략’을 본격적으로 구사하기 시작할 것이라고 내다본다. 애초 일본 경제 전문가들이 출구 전략 논의가 시작될 시기로 예상했던 내년 하반기 이후에 비해 수개월 정도 앞당겨진 것이다. 다만 그사이 엔저가 더욱 심해지면 BOJ의 계획표보다 더 빨리 출구 전략을 시작하라는 외부 압력이 커질 가능성도 있다. 강영숙 국제금융센터 선진경제부장은 “달러가 급격한 강세를 보이는 등 외부 요인이 돌출되면, BOJ의 태도에 영향을 미칠 것”이라며 “지금은 정책 전환을 위한 준비 단계라고 본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