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가탑. 사진 최갑수
석가탑. 사진 최갑수
어느새 세월이 많이 흘렀다. 단체 버스를 타고 수학여행을 왔던 까까머리 고등학생은 어느새 오십 중년이 되었다. 차를 몰아 경주 시내를 벗어나 불국사로 가는 길이다. 예나 지금이나 경상북도 경주 여행의 하이라이트는 불국사와 석굴암이 아닐까.
최갑수
시인, 여행작가,
‘우리는 사랑
아니면 여행이겠지’
‘밤의 공항에서’ 저자
최갑수 시인, 여행작가, ‘우리는 사랑 아니면 여행이겠지’ ‘밤의 공항에서’ 저자

다시 가는 수학여행

불국사 주차장에 차를 대고 불이문 지나 경내로 들어서자, 오솔길이 시작된다. 어느새 가을이 깊어 단풍이 짙다. 바람이 불 때마다 단풍잎이 말꼬리처럼 흔들린다. 숲길을 지나 만나는 불국사는 변한 것이 없다. 담임선생님과 반 친구들이 단체 사진을 찍었던 청운교와 백운교도, 친한 친구들과 어깨를 걸고 기념사진을 찍었던 석가탑, 다보탑도 그대로다. 대웅전 처마에 깃드는 가을 햇살의 질감이 잠자리 날개처럼 바스락거린다.

불국사에서도 가장 눈길을 잡는 곳이 다보탑과 석가탑이다. 두 탑 만으로도 책 한 권을 거뜬히 만들 정도로 이야기가 많다. 10원짜리 동전에도 나오는 다보탑은 우리나라 탑 중에서도 가장 독특하고 아름답다. 돌을 나무처럼 깎아 만들었다. 사각형의 받침돌 옆으로 계단이 놓여 있고 다시 5개의 기둥이 받치고 있다. 그 위에 팔각형, 다시 꼭대기는 원으로 돼 있다. 사각형에서 팔각형, 다시 원으로 변하는 것은 성불의 과정을 보여주는 것. 불교에서 원은 완성을 나타낸다. 

다보탑은 건축 당시의 모습과 똑같다고 볼 수는 없다. 원형을 알 수 없다. 일제 강점기 때 일본인들이 탑을 해체했다 복원했는데 돌들이 남았다고 한다. 부속품이 남았다는 것은 뭔가 잘못 맞췄다는 것이다. 반대편의 석가탑은 완벽한 균형미를 갖추고 있다. 4 대 2 대 2의 비율이다. 2층과 3층은 크기가 같지만, 탑 중간의 동판을 처마처럼 깎아 3층이 더 작아 보이도록 했다. 이런 기법은 비록 돌탑이지만 아름다운 처마의 곡선미를 느끼게 한다.

그 시절 수학여행 때는 불국사든, 석가탑이든, 다보탑이든 별 관심이 없었다. 친구들과 함께 답답한 교실을 벗어나 어디론가 여행을 왔다는 게 마냥 좋기만 했다. 그런데 지금은 혼자 찾은 이 탑들이 너무나 아름답게 보인다. 

살다 보면 나이가 하는 일이 있다는 걸 깨닫게 된다. 아름다움을 아는 것, 그 앞을 떠나기가 왠지 아쉬워 자꾸만 서성이고 맴돌게 되는 것도 나이가 하는 일 가운데 하나다. 나는 다보탑 앞을 한참 동안 서성이다가 석가탑을 오래도록 뱅뱅 맴돈다. 다행이다. 여행을 하면서, 글을 쓰면서 인생과 아름다움을 조금씩 알아가고 있으니까 말이다.

다보탑. 사진 최갑수
다보탑. 사진 최갑수

한국 최고의 아름다움

불국사 다음 코스는 석굴암. 석굴암은 1995년, 우리나라 문화재로는 최초로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불국사와 함께 지정됐다. 8세기 경덕왕 10년(751년), 그러니까 신라의 정토 신앙이 가장 왕성하던 때다. 재상 김대성이 불국사와 함께 만들었다. 불국사는 현생의 부모를 위해 지은 것이고, 석굴암은 전생의 부모를 위해 세웠다고. ‘삼국유사’는 전한다. 처음에는 석불사로 불렸다.

지금까지 세계 곳곳을 여행하며 수많은 유적, 예술품과 만났지만, 석굴암에서는 오직 석굴암에서만 느낄 수 있는 독특한 감정 그리고 감동과 만날 수 있었다. 석굴암에 들어서서 본존불과 마주하는 순간, ‘아, 이런 문화재가 있다는 건 우리나라의 축복이다!’ 하고 느끼게 된다. 본존불은 각고, 그러니까 뼈를 깎는 고통의 수행을 끝내고 마침에 깨달음에 닿은 표정이다. 눈은 반쯤 감겨 있는데, 시선은 아래를 지그시 향하고 있다. 해탈한 눈이다. 입술은 힘을 주어 다물고 있는 것이 느껴진다.

남산, 신라인의 마음이 새겨진 곳

두세 번 경주를 찾다 보면 걸음은 자연스럽게 남산을 향하게 된다. 골짜기 골짜기마다 기웃거리며 부처며 탑을 찾는다. 그러면서 거기에 신라인의 진심과 마음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나 역시 그랬다. 황룡사지와 대릉원 주위를 돌아다니다가, 감은사지를 지나 감포를 찾으며 경주에 빠지게 되고, 그렇게 여러 번 경주에 오가다가 어느 날 결국 남산엘 가게 됐다. 신발 뒤축이 닳도록 남산의 골짜기를 오르내리며 경주를 사랑하게 됐다.

남산은 신라 서라벌의 진산이다. 왕이 살았던 서라벌 궁성인 월성의 남쪽에 자리하고 있다고 해서 남산이라 불린다. 높이가 500m도 채 되지 않는 낮은 산이지만 깊이는 헤아릴 수 없이 깊다. 남산에 깃든 나정에서 박혁거세가 태어나며 신라의 역사가 시작됐고, 남산의 그늘 드리운 포석정에서 신라는 후백제 견훤의 공격을 받고 비참한 종말을 맞았다. 신라는 역사의 처음과 끝을 남산과 함께 한 것이다.

석조여래좌상에서 10분쯤 더 오르면 계곡 건너 왼편 선각육존불에 닿는다. 커다란 두 개의 바위에 여섯 불상을 음각했다. 석조여래좌상을 지나면 상선암에 닿는다. 바로 위에는 마애석가여래좌상이 앉아 있다. 삼릉골에서 가장 큰 불상이다. 높이가 7m에 달한다. 좌상을 지나 금송정터를 지나면 금오봉 정상의 바둑바위다. 신선들이 내려와 바둑을 두며 놀았단다. 경주 시내가 시원하게 내려다보인다. 여기까지가 삼릉 코스다.

친근하고 수더분한 미소의 부처들

걸어서 쉽게 만날 수 있는 곳이 남산 불곡 마애여래좌상과 남산 탑곡마애불상군이다. 불곡은 이름 그대로 ‘부처 골짜기’다. 골짜기를 따라 난 오솔길을 오르다 보면 바위 속 숨은 부처님이 어떤 신비로움처럼 불쑥 나타난다. 넓고 높은 커다란 바위에 깊이가 1m나 되는 석굴을 파고 그 속에 여래좌상을 조각했다. 그 높이는 1.5m 정도 되는데 두 손을 소맷자락 안에 넣고 참선하는 자세로 앉아 있다. 살짝 숙인 얼굴 가득 미소를 머금고 있는 모습이 꼭 할머니 같다고 해서 ‘할매 부처’로도 불린다. 남산에 있는 불상 중 가장 오래된 부처님이다. 

라오스와 미얀마, 부탄을 여행한 적이 있다. 그곳에서 모든 생활은 불교를 중심으로 이루어지고 있었다. 사람들은 이른 아침 스님들에게 공양을 한 다음에야 그들의 아침을 먹었고, 일을 마친 후에는 탑에 들러 향을 피운 후 집으로 돌아갔다. 신라인도 아마 그랬을 것이다. 밥을 먹고 일을 하는 모든 순간, 모든 일이 부처님의 자비로 이뤄진 것이라 생각하고 감사했을 것이다. 호미질하다가 허리를 펴고서는 남산을 바라보았을 것이다. 그 골짜기 어디에 있을 부처님의 얼굴을 떠올리며 어떤 소망을 빌었을 것이다. 그러니까 천불천탑의 남산, 이 거대한 화강암 덩어리는 그 자체로 하나의 부처이고 신라인의 마음인 것이다. 그러니 경주에 가거든 남산에 올라보길.

여행수첩

경주 명동쫄면. 사진 최갑수
경주 명동쫄면. 사진 최갑수

먹거리 경주의 먹을거리로는 쌈밥과 해장국이 유명하다. 쌈밥집은 대릉원 동편 골목 후문 쪽에 많이 있다. 이풍녀구로쌈밥, 삼포쌈밥이 유명하다. 상추와 배추, 호박 등과 다양한 양념장이 나온다. 경주역 부근 팔우정 로터리에는 해장국집 골목이 있다. 해초와 콩나물, 메밀묵을 넣고 시원하게 끓여낸다. 경주역에서 건널목 하나만 건너면 성동시장. 성동시장에서 가장 인기 있는 먹을거리는 우엉김밥이다. 김밥에 간장과 물엿을 넣고 푹 조려낸 우엉조림이 들어간 것이 특징인데, 부드럽고 달짝지근한 맛이 자꾸만 손이 가게 만든다. 명동쫄면은 유부를 가득 넣은 유부쫄면도 별미. 최부잣집 옆 골목의 교리김밥은 달걀지단을 듬뿍 넣은 김밥으로 유명하다.

한국의 노블레스 오블리주 계림 뒤편 교동에서 최부잣집이 있다. 면암 최익현, 구한말 의병장 신돌석, 의친왕 이강 등이 묵었다. 최부잣집의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확인할 수 있는 곳이 곳간이다. 정면 5칸, 측면 2칸 크기로 지어졌는데, 현존하는 목재 곳간 가운데 가장 크다. 쌀 800석을 보관할 수 있다고 한다. 최부자는 흉년 때 이 곳간을 열어 쌀을 나눠줌으로써 사방 100리 안에 굶어 죽는 사람이 없도록 해 자칫 부자로서 사기 쉬운 원성을 듣지 않았다고 한다. 최부잣집을 나오면 지난 2018년 복원된 월정교가 있다. 경주를 들른 젊은 연인들이 가장 많이 찾는 곳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