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맹 미술 관람자 시라토리 겐지. 사진 다다서재
전맹 미술 관람자 시라토리 겐지. 사진 다다서재

“눈이 보이지 않는 사람 곁에 있는 덕에 우리 눈의 해상도가 올라가고 수많은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다. 진정한 의미로 그림을 보여주는 사람은 우리가 아닌 시라토리인지도 몰랐다.” - ‘눈이 보이지 않는 친구와 예술을 보러 가다’ 중에서

눈이 보이지 않는데도 불구하고 매년 수십 번씩 미술관에 다니는 사람이 있다. 전맹 미술 관람자 시라토리 겐지. 시라토리와 함께 미술관에 가본 사람들은 입을 모아 증언한다. “시라토리랑 작품을 보면 정말 즐거워” 눈이 보이지 않는 사람이 미술 작품을 본다고? 어떻게?

김지수 
마인즈 커넥터
(Minds Connector)
전 조선비즈 문화전문기자, 
‘이어령의 마지막 수업’ 
‘위대한 대화’ 저자
김지수 마인즈 커넥터 (Minds Connector)
전 조선비즈 문화전문기자, ‘이어령의 마지막 수업’ ‘위대한 대화’ 저자

어릴 적부터 시라토리는 일상생활에 큰 불편을 느끼지 않았다. “큰일이구나, 딱해”라며 그를 동정하는 어른들이 더 이상해 보였다. 부족한 부분을 메꿔서 비장애인에 가까워져야 한다는 어른들의 선입견에 시간이 갈수록 의문이 생겼다. 성인이 되어 시라토리는 흰 지팡이로 주위를 탁탁 짚으면서 전철을 이용해 다녔다. 어느 밤에는 술을 마시다 취해버리는 바람에 집에 가는 길을 잃어버리기도 했다. 시라토리는 그 또한 큰일이라고 여기지 않았다.

대학 시절, 여자친구가 미술관에 데려가 ‘다빈치의 인체 해부도 특별전’을 그에게 말로 설명해 주었다. 이런 세계가 있다니, 시라토리는 가슴이 설렜다. 골격, 근육, 인체의 구조는 안마사 자격을 지닌 시라토리도 잘 알았다. 어느 날, 그는 직접 미술관에 전화를 걸었다. “나는 전맹이지만 작품을 보고 싶습니다. 누군가 안내를 해주면서 작품을 설명해 주었으면 합니다.” 줄기찬 그의 요청에 마침내 미술관의 문이 열렸다. 고흐 전시회를 처음 안내한 미술관 직원이 시라토리에게 허리 숙여 고맙다고 인사했다.

인상파 작품전에서 미술관 직원은 처음엔 “호수가 있습니다”라고 설명했다가 정정했다. “죄송해요. 노란 점이 있는 걸 보니 호수가 아니라 들판이네요. 지금까지 들판을 호수라고 믿고 있었어요.” 눈이 보이지 않는 사람 곁에 있으면 평소에 사용하던 뇌의 취사선택 기능이 꺼지고, 우리의 시선은 작품 위를 자유롭고 섬세하게 헤맨다. 이를테면 시라토리는 안내자 눈의 해상도를 높여주고 작품과 관계가 깊어지도록 해주는 장치였다. 서로 몸의 기능이 확장되고 연결되는 것은 놀라운 발견이었다.

‘눈이 보이지 않는 친구와 예술을 보러 가다’는 아름답고 혁신적인 책이다. ‘장애인 서사는 어둡거나 계몽적일 것이다’라는 편견을 단변에 깨트린다. 시라토리를 만난 논픽션 작가 가와우치 아리오는 시각장애인 곁에서 그림을 ‘들려주면서’ 완전히 새로운 세계에 눈뜬다. 그림에 눈을 뜬 것은 전맹인 시라토리가 아니라 그림을 안내하던 가와우치였다. 의연함과 의외성으로 가득한 한 남자의 보폭에 맞춰 걷다 보면, 이 세계는 탈선의 루트로 가득한 즐거운 황야가 된다. ‘보이든 보이지 않든 상관없이, 누군가를 만나면 세계가 넓어진다’는 이 유니크한 ‘시선의 단독자(시라토리 겐조)’를, ‘눈이 보이지 않는 친구와 예술을 보러 가다’라는 책을 쓴 가와우치와 함께 이메일로 인터뷰했다. 다음은 일문일답.

‘눈이 보이지 않는 친구와 예술을 보러 가다’ 저자인 가와우치 아리오(맨 왼쪽)와 시라토리 겐지(왼쪽에서 두 번째). 사진 다다서재
‘눈이 보이지 않는 친구와 예술을 보러 가다’ 저자인 가와우치 아리오(맨 왼쪽)와 시라토리 겐지(왼쪽에서 두 번째). 사진 다다서재

문득 궁금하다. 시라토리에게 ‘큰일’은 무엇인가. 가와우치에게 ‘큰일’은 무엇인가.
시라토리 “‘눈이 보이지 않아서 큰일이야’라고 말하는 것은 쉬운 일이다. 그렇게 말하면 동시에 ‘눈이 보여도 큰일은 있지 않아?’라는 의문이 솟아난다. 나는 스스로 ‘큰일이야’라고 말하고 싶지 않다. ‘인생은 큰일투성이야’라고 말해버리면, 대부분의 일이 ‘큰일’이라는 범주에 들어갈지 모른다. 그와 반대로 ‘큰일은 아냐.’라고 단언하면 전부 일상다반사가 되지 않을까. 애초에 나는 시력의 유무를 기준으로는 뭐가 큰일인지 모르기도 한다. 그런 나도 성범죄나 자연재해 피해는 ‘큰일이네’라고 느끼는데, 그들의 힘듦을 많이 들었기 때문이겠지.”

가와우치 “나에게 쉬운 일을 시라토리는 못 한다는 것을 알고 나도 모르게 ‘큰일이겠다’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시라토리에게서 당사자가 그렇게 여기지 않으면 큰일이 아니라는 것도 배웠다. 나에게 큰일이란 다른 사람과 장단, 페이스를 맞추는 거다. 회사원은 내게 정말 ‘큰일’이었다. 프리랜서로 일하는 지금은 그다지 큰일이 없다.”

눈이 보이지 않는 사람 곁에서 내 눈의 해상도가 높아지는 경험은 정말 신비로웠다. 내가 그를 안내하는 게 아니라 그가 나에게 그림을 안내하는 것 같았다. 시라토리에게는 ‘전맹’임에도 어떤 초능력이 있는 것은 아닐까.

가와우치 “시라토리가 지닌 독특한 분위기와 말에도 힘이 있다고 생각한다. 그게 초능력이라기보다는 서로 다른 능력을 가진 사람들이 서로 보완하면서 각자의 능력을 끌어낸 거다. 눈이 보이지 않는 사람 곁에 있다 보니 꼼꼼히 작품을 관찰하게 됐다. 여느 때 같으면 놓쳤을 세부 묘사에도 눈길이 머무르고, 배경에 관해서도 생각해 봤다.”


색과 빛에 대한 묘사가 얼마나 전해지는지 알 수 없지만, 가와우치는 눈과 말을 사용해 그림의 윤곽을 묘사했다. “한 여성이 강아지를 안고 있는데 강아지의 뒤통수를 유독 자세히 보네요. 개한테 이가 있는지 보는 건가. 여성은 슬퍼하면서 고개를 숙인 것 같기도 하다.” 


말로 표현하면서 점점 생각의 문이 열렸다. 다른 점이라고는 시라토리라는 존재밖에는 없었다. 시라토리는 많은 걸 바라지 않았다. 어떤 방인가? 작품은 몇 점이나 있나? 그 뒤에는 ‘응응’ 하고 맞장구를 치고 가끔 질문할 뿐이었다.

우리가 전자파나 미생물을 본 적 없으면서도 개념으로 이해하는 것처럼 시라토리도 저녁노을과 사과는 붉은색이라고 이해했다. 시라토리의 대화형 감상법은 MoMA에서 고안한 방법과 매우 비슷했다. 함께 작품에 관한 간략한 묘사를 거듭하는 것, 의견을 하나로 정리하지 않고 답이 나오지 않거나 모순이 있어도 그 자리에서 공유하는 것. 가상의 시라토리를 상상하면서 혼자 감상해도 훨씬 꼼꼼하게 작품을 감상할 수 있다고 했다. 그것은 도움을 주는 쪽과 받는 쪽이라는 관계를 뒤집는 새로운 경험이다. 그가 아는 세계는 우리가 모르는 세계 그 자체니까.


시라토리는 어떻게 ‘전맹자인데 미술 관람을 하고 싶다’는 요청을 거절당하면서도 계속할 수 있었나.
시라토리 “상대방이 곤란해하거나 거부하는 경험은 어린 시절부터 겪어왔다. 전맹인 내게는 지금도 일상에서 자주 일어나는 일이다. 미술관의 거절은 애초에 예상을 벗어난 일이 아니었다. 게다가 다행히 전화기 너머 직원은 매우 당황했지만 거절한다는 느낌을 주진 않았다.”

눈은 가늘게 뜨고 흰 지팡이를 들고 있는, 시라토리는 약간 마법사처럼 보이기도 하고, 초월자 같은 느낌이 든다. 때 묻지 않은, 찌들지 않은 느낌이랄까. 본인이 어떻게 보일지 생각하나.
시라토리 “애초에 나는 타인에게 내가 어떻게 보이는가보다 ‘지금 내가 어떤 사람이고 싶은가’에 관심이 많았다. 그렇기 때문에 독자가 나를 ‘초월자 같다’라고 생각해도 ‘그것도 좋네’라고 생각할 뿐 딱히 어떻게 보였으면 좋겠다고 바라지 않다.”

가와우치 “시라토리가 때 묻지 않은 느낌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지만, 시끄러운 세상사나 주위 사람들의 분위기에 별로 휩쓸리지 않는 사람 같긴 하다. 예를 들어 시라토리는 일과 관련한 정말 대수롭지 않은 대화에서도 자신이 싫은 건 싫다고 분명하게 의사를 밝히는데, 그만큼 그가 강한 사람이라는 증거다. 내면에 ‘자기의 상’이 뚜렷하게 있는 사람이다.”

시라토리! 마사지사, 전맹 미술 관람자, 사진가 등 여러 ‘부캐’로 사는 게 즐거운가.
시라토리 “현재 나는 ‘전맹 미술 감상자·사진가’로 활동하고 있다. 더 이상 마사지사는 아니다. 올해는 ‘전맹 미술 감상자’로 약 20곳에서 감상회 진행을 맡았고, ‘사진가’로는 한 예술제에 참가한 정도다. 나는 오래전부터 흘러가는 대로 운에 맡기면서 인생을 살아왔다. 

나의 다양한 현재는 누군가 혹은 무언가의 덕분이라고 생각한다. 봄에는 가와우치가 감독을 맡은 다큐멘터리 영화 ‘눈이 보이지 않는 시라토리, 예술을 보러 가다’의 무대 인사를 다니느라 바빴다. 내가 스스로 무언가를 쟁취했다고는 전혀 생각하지 않는다. 흘러가는 대로 그때그때 좋아 보이는 길을 선택하고 있다.”

가와우치는 시라토리에게 어떤 새로운 점을 배웠나.
가와우치 “다큐멘터리를 촬영하면서 시라토리 집을 방문했다. 혼자 있을 때는 불을 켜지 않는구나, 요리는 이런 식으로 하는구나⋯. 예상치 못한 곳에 예상치 못한 물건이 놓여 있는 걸 보고, 눈이 보이는 사람에게 편리한 배치와 보이지 않는 사람에게 편리한 배치란 다르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시라토리는 몇 년 전까지는 방에 불을 켜고 지냈다. 전맹이지만 보통의 생활인처럼 살고 있다는 느낌을 갖기 위해서. 하지만 얼마 전부터 ‘전맹이 불을 켜지 않는 건 당연하잖아’라고 생각하기 시작했다고.


나는 두 분의 대화를 통해 ‘본다’는 행위는 매우 다층적이며, 우리의 시각과 기억, 뇌의 정보 능력은 제각각 맹점이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두 분에게 ‘본다’ ‘시선’ ‘시야’ 이런 것의 실체는 무엇인가.
시라토리 “‘본다’의 의미는 계속 변한다고 생각한다. 나는 집에서 차를 마실 때는 잔을 들고 입으로 마시는 신체의 움직임을 본다. 그때의 시각은 나에게 없어도 괜찮다.”

가와우치 “나는 시라토리에게서 ‘호수로 보이는 들판’에 관한 이야기를 듣고 우리의 ‘본다’는 행위가 불완전하기 그지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 뒤로는 보는 것에 대한 과신을 멈추고 ‘공간 속의 경험’ 그 자체를 즐겨보기로 했다. 몸으로 느끼는 정보가 시각 정보보다 더 생생하고 진실하다. 온라인 회의로는 화면 너머에 있는 사람의 분위기와 인품을 알기 어려운 것도 그 때문이다.”

미술 관람에는 ‘적당히 무지한 상태가 필요하다’는 말이 신선했다. 문화재 관람에 있어서 한국은 ‘아는 만큼 보이고 보인 만큼 사랑하게 된다’라는 관념이 퍼져있었다. 시라토리는 ‘안다’보다 ‘모른다’에서 더 많은 잠재력을 보는가.
시라토리 “‘무지한 상태’로 미술 작품을 감상하는 것의 핵심은 중립적인 자세로 마주할 수 있다는 거다. 그렇다고 해서 무지한 편이 더 좋다고 단정하고 싶지는 않다. ‘안다’와 ‘모른다’ 중 어느 쪽에 잠재력이 많을까 하는 논의 역시 ‘전맹자’인 나에게는 성립할 수 없는 질문이다.”

장애는 사회와 관계에서 만들어진다는 것도 완전히 새로운 발상이었다. 시라토리 스스로가 빨래를 잘 못 개고 마사지를 못하는 장애인이 처음엔 이상했다는 고백도 진솔하게 들렸다. 장애인은 태어나는 게 아니라 ‘사회화’된다는 걸 자각하게 된 계기가 있는지.
시라토리 “십대 후반이 돼 한 가지 모순에 관해 생각하게 됐다. ‘장애의 유무와 상관없이 모두 평범하게 대해주면 좋겠다’라는 주장과 ‘장애가 있으니까 특별히 생각해 주면 좋겠다’라는 주장. 그 무렵부터 의학(학문)이 말하는 ‘장애’ 그리고 행정 정책이 말하는 ‘장애인’을 각각의 맥락에서 생각할 수 있게 됐다. 그리고 스물두 살쯤에는 ‘장애인은 만들어진다’라는 결론에 도달했던 것 같다.”

시라토리, 다빈치의 ‘인체 해부도’와 고흐의 ‘별이 빛나는 밤에’를 보았을 때 어땠나. 
시라토리 “다빈치의 인체 해부도가 기억에 남는 건 당시 내가 좋아하는 사람과 함께 전시를 보았기 때문이다. 그다음에 가본 고흐의 전시회도 농부의 소묘 등이 인상에 남았는데, 그 또한 친구가 ‘그런 걸 좋아해’라고 말했기 때문이다.”

우리 인생에는 각자 미지의 황야가 존재한다는 말도 참 좋았다. 아슬아슬한 탈선이라면 가령 어떤 것일까.
가와우치 “떠오른 것을 해보자는 사고방식으로 시라토리의 스타일과 일맥상통한다. 나는 시라토리를 주인공으로 다큐멘터리를 제작했고, 현재 일본의 33개 극장에서 상영 중이다. 극장용 영화를 만든 것도, 배급하는 것도 모두 처음 해보는 일이었다. 그야말로 안전지대에서 빠져나가 도전하는 날들이 이어졌다. 일본에서는 예전에 중증 장애가 있는 사람이 휠체어로 버스에 타는 것조차 ‘민폐야’라는 말을 들었다. 하지만 지금은 전보다 훨씬 평범한 일이 됐다. 그런 변화 역시 버스에 타고 싶다고 처음 손을 든 사람들 덕분이다. 우리도 일상에서 ‘이건 안 되겠지.’라며 삼가는 경우가 있는데, 용기를 내어 한 발 탈선했을 때 세상도 변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