멀리 캅카스산맥이 보이는 카헤티의 포도밭. 사진 김상미
멀리 캅카스산맥이 보이는 카헤티의 포도밭. 사진 김상미

비행기가 조지아의 수도인 트빌리시에 접근하자 창밖으로 장엄하게 뻗은 캅카스(코카서스)산맥이 눈에 들어왔다. 저 산 어딘가에 프로메테우스가 묶여 있을까. 프로메테우스가 정말로 인간에게 불을 전해줬는지는 알 수 없지만, 조지아에서 인류가 최초로 와인을 만든 것만은 사실이다. 지금껏 발견된 유물 가운데 가장 오래된 와인 용기가 바로 조지아에서 발견된 기원전 6000년쯤의 토기이기 때문이다. 크베브리(Qvevri)라고 부르는 이 토기는 지금도 조지아에서 와인을 만들 때 사용되고 있다. 크베브리에서 만든 와인에서는 과연 태고의 맛이 느껴질까. 설레는 마음은 장시간 비행의 피로도 잊게 했다.

김상미
와인 칼럼니스트
김상미 와인 칼럼니스트

트빌리시 시내를 내려다보는 언덕에는 거대한 ‘조지아의 어머니’ 동상이 한 손에는 칼, 한 손에는 와인 잔을 들고 서 있다. 와인 잔은 조지아가 와인의 요람임을, 칼은 나라가 위기에 처하면 여인도 무기를 든다는 강인한 의지를 표현한다. 동서양의 교역로 한중간에 위치한 조지아는 늘 외세의 침략에 시달렸다. 특히 소련은 조지아를 연방국의 와인 공급처로 삼고 저렴한 와인의 대량생산을 강요했기에 조지아 와인은 유구한 역사에도 불구하고 서방에 널리 알려지지 못했다. 소련으로부터 독립한 지 30년이 지난 지금 조지아는 전 세계가 가장 주목하는 와인 산지로 떠오르고 있다. 무엇보다 크베브리 와인은 어느 나라도 흉내낼 수 없는 독창적인 맛으로 애호가들의 입맛을 사로잡고 있다.

크베브리는 달걀처럼 둥근 모양에 바닥이 뾰족한 토기다. 크기는 다양하지만, 형태는 균일하다. 말로만 듣던 크베브리를 직접 보기 위해 다음 날 조지아 동쪽 끝에 위치한 카헤티(Kakheti)로 향했다. 카헤티는 조지아 포도밭의 70%가 집중되어 있는 지역이다. 크베브리가 보관된 곳을 조지아에서는 마라니(Marani)라고 부른다. 마라니에 들어서자 크베브리는 보이지 않고 바닥에 동그란 구멍만 가득했다. 우리가 김칫독을 땅에 묻듯 조지아에서도 크베브리를 땅에 묻어 사용한다. 한 번 묻은 크베브리는 지진이 일어나거나 세척할 때 손상되지 않는 한 영구히 사용하므로 100년 넘게 쓰는 것도 많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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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의 힘으로 만들어지는 크베브리 와인

크베브리 와인은 만드는 방식이 독특하다. 일반적으로 화이트 와인은 포도를 압착해 즙만 발효하고 레드 와인은 색과 타닌을 빼내기 위해 포도 껍질을 담근 채 발효하지만, 크베브리에서는 모든 와인이 껍질과 함께 발효된다. 그래서 발효 중인 크베브리를 보면 입구에 포도 껍질이 가득하다. 발효가 끝나면 일반 와인은 찌꺼기를 제거하고 숙성 용기로 옮겨야 하지만 크베브리는 그럴 필요가 없다. 크베브리 바닥으로 찌꺼기가 저절로 가라앉기 때문이다. 포도씨가 제일 먼저 내려앉고 그 위로 포도 껍질이 맨 위에는 효모 앙금이 덮인다. 효모 앙금은 와인이 숙성되는 동안 껍질과 씨에서 추가적으로 쓴맛이 추출되는 것을 막아준다. 이 상태로 레드 와인은 3~4개월, 화이트 와인은 6개월의 숙성을 거친다. 인간의 개입 없이 자연의 힘으로만 만들어지니 크베브리 와인이야말로 진정한 ‘신의 물방울’인 셈이다.

니코 피로스마니 작품 ‘포도 수확 잔치’. 사진 위키갤러리
니코 피로스마니 작품 ‘포도 수확 잔치’. 사진 위키갤러리

크베브리 와인의 매력은 레드 와인보다 화이트 와인에서 잘 드러난다. 조지아 와인이 처음이라면 품종별로 맛보기를 추천한다. 르카치텔리(Rkatsiteli)는 조지아에서 가장 많이 재배되는 청포도 품종이다. 복숭아와 모과 같은 과일 향과 함께 마른 허브 향이 느껴지고 꿀 향이 감미롭다. 므츠바네(Mtsvane)는 르카치텔리보다 과일 향이 더 풍부하고 질감이 부드러워 마시기 편한 스타일이다. 르카치텔리가 탄탄한 질감이 특징이라면 므츠바네는 풍성한 아로마가 매력적이어서 두 품종을 블렌드하기도 한다. 레이블에 바지수바니(Vazisubani)나 치난달리(Tsinandali) 같은 지명이 적혀 있으면 르카치텔리 85%에 므츠바네 15%가 섞인 와인이다. 크베브리에서 만든 화이트 와인은 포도 껍질과 장시간 접촉 때문에 홍차처럼 오렌지빛을 띠고 레드 와인처럼 맛에서 타닌이 느껴진다. 조지아에서 이 와인을 킨칼리(Khinkali)라는 만두와 즐겼는데 맛이 기가 막혔다. 이제는 우리 왕만두와 즐겨 볼 생각이다.

조지아를 대표하는 레드 품종으로는 사페라비(Saperavi)가 있다. 이 품종은 특이하게 과육도 붉다. 그래서 사페라비 와인은 잉크처럼 색이 진한 것이 특징이다. 맛을 보면 블랙베리나 블루베리처럼 검은 베리류의 향이 가득하고 감초, 초콜릿, 담배 같은 아로마가 와인에 깊이를 더한다. 레이블에 킨즈마라울리(Kindzmarauli)가 적혀 있으면 세미-스위트 사페라비 와인이다. 과하지 않은 단맛이 타닌을 완화시켜 주기 때문에 레드 와인의 떫은맛을 싫어하는 사람에게 잘 맞는 스타일이다. 사페라비는 두툼한 스테이크나 갈비찜 같은 육류와 잘 어울리고 킨즈마라울리는 다크초콜릿과 즐기면 의외의 궁합을 맛볼 수 있다. 조지아 와인 중에는 레이블에 피로스마니(Pirosmani)가 적힌 것도 있다. 조지아의 국민 화가인 니코 피로스마니의 이름을 딴 이 와인들은 살짝 단맛이 나는 것이 특징이다. 레드는 주로 사페라비로 화이트는 르카치텔리로 만들지만, 다른 품종을 블렌드하기도 한다. 피로스마니는 생전에 조지아 사람이 와인을 만들고 즐기는 모습을 자주 그렸다. 가난한 화가였던 그가 사랑하는 여인에게 마음을 전하기 위해 전 재산을 털어 그녀의 집 앞을 꽃으로 뒤덮은 일은 훗날 ‘백만송이 장미’라는 러시아 가요의 모티브가 되기도 했다.

1 크베브리가 보관되어 있는 와인 셀러 마라니. 2 달콤한 디저트와 잘 어울리는 킨즈마라울리 와인. 사진 김상미
1 크베브리가 보관되어 있는 와인 셀러 마라니. 2 달콤한 디저트와 잘 어울리는 킨즈마라울리 와인. 사진 김상미

조지아 와인은 결코 화려하지 않다. 순수하고 깊은 맛이 피로스마니의 투박하지만 정겨운 작품과 무척 닮았다. 집으로 돌아와 조지아 여행을 마무리하며 ‘백만송이 장미’를 틀어 놓고 르카치텔리 크베브리 와인을 한 잔 기울였다. 와인의 쌉싸름한 맛과 은은한 꿀 향이 심수봉의 애절한 목소리와 어울려 묘하게 마음을 적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