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미용 의료 기기 업체인 루메니스(Lumenis)와 인모드(Inmode)는 이스라엘 강소기업으로 시작해 세계시장을 석권한 대표적 기업이다. 루메니스는 빛(레이저)을 이용해 피부 속 기름층을 녹이는 IPL(Intense Pulsed Light) 기기를 최초로 개발했고, 인모드는 고주파를 이용해 피부를 재생해 탄력을 개선하는 의료 기기로 시장을 선도한다.
미국 나스닥에 상장한 인모드의 시가 총액은 30억달러(약 3조8865억원)가 넘는다. 루메니스는 미용을 제외한 수술용 레이저 사업부만 2021년 미국 보스턴사이언티픽에 10억7000만달러(약 1조3862억원)에 매각해 화제가 됐다. 루메니스와 인모드처럼 글로벌 시장에 도전하는 국내 의료 기기 기업들이 있다. 의료 인공지능(AI) 업체인 에어스메디컬은 자기공명영상(MRI) 분석 솔루션을 개발해 지난 10월 미국 식품의약국(FDA)으로부터 시판 전 허가(510⒦ Clearance) 확대 승인을 받았다. 510⒦는 FDA가 의료 기기 안전성과 유효성을 검증하는 제도인데, 이번 승인으로 에어스메디컬의 솔루션을 모든 MRI 제조사에 적용할 수 있게 됐다. MRI 관련 AI 소프트웨어 가운데 모든 부위, 모든 제조사에 적용 가능한 제품은 이번이 처음이라는 것이 에어스메디컬의 설명이다.
MRI 촬영 비용은 한 번에 50만~80만원에 이를 정도로 비싸다. 장비가 새것일수록 촬영 시간이 짧고, 해상도가 높은 대신 가격이 비싸다. 그런데 AI가 도입되면서 이런 공식이 깨지고 있다. 구형 MRI도 AI로 분석하면 촬영 시간을 절반으로 단축하고, 영상 정확도를 높일 수 있기 때문이다. 에어스메디컬의 AI솔루션은 지난해 1월 한국 시장에 출시됐고 전세계 287개 병원에서 사용되고 있다. 에어스메디컬의 AI솔루션 촬영 건수는 11월 현재 100만 건을 넘었다.
미국 FDA 승인 ‘에어스메디컬’ 성공 스토리
2018년 창업한 에어스메디컬이 빠르게 성장할 수 있었던 배경에는 범부처전주기의료 기기연구개발사업단(이하 사업단)의 물밑 지원이 있었다. 의료 제품은 시장에 나오기까지 넘어야 할 산이 많다. 제품의 유효성은 물론이고, 사람에게 써도 안전한지 임상시험으로 입증해야 한다. 그런데 임상하려면 사람에게 써도 된다는 임상시험 계획을 식품의약품안전처(이하 식약처)로부터 승인받아야 한다.
에어스메디컬은 임상시험 계획을 세우는 일부터 난관에 부딪혔다. AI로 MRI를 분석하는 솔루션은 세상에 없던 새로운 제품이다 보니, 임상 계획은 물론이고 기준부터 만들어야 했다. 제품이 먼저냐 규제가 먼저냐, 닭이 먼저냐 달걀이 먼저냐 하는 문제에 봉착했다는 뜻이다. 기술 잠재력을 알아본 사업단이 해결사로 나섰다. 사업단은 2020년 김법민 단장을 필두로 에어스메디컬 전문 자문단을 꾸리고, 임상시험수탁기관(CRO)과 일대일 대면 컨설팅을 주선했다. 제품이 식약처 인허가를 받는 과정을 사전에 시뮬레이션하기 위해서였다. 그렇게 에어스메디컬의 AI솔루션인 스위프트엠알은 2021년 2월 우리나라 식약처에 품목 신고를 마쳤다. 스위프트엠알은 그해 10월 미국 FDA로부터 승인을 받았으며, CE MDR 심사를 마치고 곧 인증서를 받을 예정이다.
이밖에 사업단은 규제 기관 전담 데스크를 가동해 한국보건의료원과 연계한 ‘신의료기술평가’ 자문을 제공했고, 식약처 연구개발(R&D) 코디 프로그램 지원을 받을 수 있게 주선했다. 이혜성 에어스메디컬 공동 대표는 “사업단이 제품화와 사업화에 성공 할 수 있게 물심양면으로 지원해 줬다”며 “덕분에 잠재력 있는 기술을 완성된 제품으로 만들고, 임상시험까지 완료할 수 있었다”고 말했다.
이스라엘 강소기업 비결
이런 성공 사례가 이스라엘 의료 산업에서는 일상이다. 이스라엘 경제의 성공 비결은 ‘스타트업’에 대한 정부의 아낌없는 투자와 지원 그리고 규제 혁파를 꼽는다. 작년 기준 이스라엘의 헬스케어 분야 스타트업은 1600여 개가 넘는다. 나스닥에 상장된 이스라엘 스타트업은 100여 개로 미국, 중국에 이어 3위다. 이러다 보니 전 세계가 투자를 줄이는 팬데믹(pandemic·감염병 대유행) 기간에도 이스라엘 기업에 대한 외국인직접투자(FDI)는 늘었다. 이스라엘은 삼성 같은 글로벌 대기업이 단 한 곳도 없지만, 1인당 국내총생산(GDP)이 5만5358달러(약 7172만원)에 이른다. 한국의 1인당 GDP는 3만4983달러(약 4532만원)다.
산업을 육성하는 방법은 크게 세 가지로 나뉜다. 기술 개발의 밑거름이 되는 기초과학 R&D 자금 지원과 기초과학을 기술로 산업화하는 연구 지원, 마지막이 산업화에서 상업화에 이르는 규제 개혁이다. 사업단은 국산 의료 기기 산업 육성을 위해 각 부처가 의기투합해 만들었다. 과학기술정보통신부, 산업통상자원부, 보건복지부, 식약처가 2020년부터 2025년까지 1조원이 넘는 자금을 투입한다. 기초과학은 과기부가 중개 연구는 산업부에서 주도적으로 R&D를 지원한다. 복지부는 규제 혁파를 담당했다. 산업부의 적극적인 R&D 지원 덕분에 국내 의료 기기 산업의 기술은 빠르게 성장했다.
“韓 의료 기기, 규제개혁 엔진 달고 세계로”
그런데 산업화에서 상업화로 가는 ‘규제’ 길목을 넘기가 어려웠다. 김법민 단장은 “우수한 제품을 개발하긴 했는데, 이 제품을 사람들이 쓰게 하는 성공 사례를 만드는 것이 쉽지 않았다”고 말했다. 국산 의료 기기가 개발에 성공해 시장에 출시되는 비율은 15%, 성공하는 비율은 5%가 채 안 된다. 사업단은 복지부, 식약처와 손잡고 의료 기기 산업 규제의 틀을 만들고 효율화하는 작업에 집중하고 있다. 김 단장은 정부의 R&D 지원 사업의 역할이 ‘마중물’이라면 규제 개혁은 ‘추진 엔진’이라고 봤다. 의약품과 의료 기기는 ‘승자독식’이 작동하는 분야다. 의료 기기와 의약품은 사람들이 사용해서 ‘안전성’ 데이터를 쌓을수록 더 많이 쓰이고, 또 더 널리 쓰인다. 한국은 단일 보험 체계이기 때문에 건강보험 체계에 들어가야 사람들이 사용한다. 그래야 임상 데이터를 쌓아 나가면서 해외 진출이 가능한데, 그동안 그림의 떡이나 마찬가지였다.
김 단장은 “글로벌 시장에서 뒤지지 않는 굉장히 좋은 기술이 있는 한국 기업이 많다”며 “우리가 지혜를 모은다면 한국 의료 기기 산업이 이스라엘을 뛰어넘을 수 있다고 믿는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