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금리·고물가의 악재가 가계를 누르고 있다. 빌린 돈의 이자가 오르고 물가가 오르면, 월급쟁이는 쓸 수 있는 돈이 줄어들고, 자영업자는 매출이 줄고, 자영업자에게 재료를 공급하는 영세 중소업자는 폐업하게 된다. 올 9월까지 폐업한 기업 수가 지난해 같은 기간보다 60% 이상 증가했다. 올해는 처음으로 파산이 회생보다 많았다. 이익이 나지 않아 폐업하는 것이 아니라, 줄이고 버티며 몸을 갈아 넣어도 빚이 늘어나기 때문에 문을 닫는 것이다. 우리 사회에서 가장 취약한 계층인 자영업자와 영세 중소기업이 빠르게 무너지고 있다. 가계 대출 연체율이 지난해 대비 두 배 이상 늘었다. 그나마 숨통이었던 배달일과 건설 일용직도 막혀 있다. 중소기업에 제공되던 연구개발 자금도 바싹 마르다시피 감액됐다.
우리는 지난 25년간 10년 단위로 세 번의 경제 위기를 겪었다. 1997년 국제통화기금(IMF) 위기와 2008년 글로벌 금융 위기, 2019년 코로나19 위기다. IMF 위기는 소위 부자클럽이라는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억지 가입과 세계화를 부르짖은 당시 정부의 허세, 이를 부추기고 따른 관료의 책임이 크다. 그 위기의 해결 방안도 발등의 불을 끄기 위한 백기 투항이 전부였다. 그 결과 수십 년간 국민이 피땀 흘려 모은 산업자본이 헐값에 외국 자본으로 넘어갔고 이후 저성장의 늪에 빠졌다. 그 피해는 온전히 국민이 짊어졌다. 빈부 간 격차는 벌어지고, 가정이 파괴되고, 자살률이 증가하고, 인재가 더 이상 공대에 진학하지 않았다. 이후 두 번의 경제 위기는 나라 밖 원인이 크다. 지금 우려되는 서민 가계 부채발(發) 경제 위기는 내부 원인이 크다는 점에서 IMF 위기와 공통점이 있다. 그러나 대기업이 아니라 서민 가계의 도산으로 시작된다는 점에서는 차이가 있다. 경제 불평등이 커지면 사회 갈등이 심화하고 변화를 요구하는 시민의 힘이 강해진다. 국가 재정의 운영은 기업이나 가계의 재무 운영과는 달라야 한다. 국민의 경제적 불평등을 줄이고, 국가의 장기적인 성장을 도모하기 위한 재정 정책의 우선순위는 재정 전문 관료의 의사 결정이라기 보다는 국정 운영 최고 책임자의 의사 결정이다.
필자의 초등학교 3학년 때 경험은 인생에서 가장 큰 영향을 끼쳤다. 소풍을 가게 됐으나 집안 형편이 어려워 말을 꺼내지 못했다. 좁은 동네여서 소풍 소식을 알게 되신 어머니가 내 손을 잡고 읍내에서 가장 큰 가게에 데려가 과자와 음료수를 가방 가득 챙겨주셨다. 물론 외상이었다. 그 반만 해도 충분한데 굳이 가득 채워 주신 어머니께 이유를 물었다. 학교에 다니신 적이 없는 어머니는 “돈은 있다가도 없지만 내 자식이 한 번 상한 자존심은 평생 상처가 된다”라고 말씀하셨다. 그때 어머니가 외상으로 채워주신 소풍 가방은 돈은 유통의 수단임을 깨닫게 했다. 돈이 없다고 빈 소풍 가방으로 학교에 보내는 것은 합리적인 결정이 아니다. 인간적인 결정은 더욱 아니다. 외상으로라도 소풍 가방을 채워서 보내야 한다. 그래야 기를 펴게 되고 구김이 없게 돼 상처받은 인생으로 인한 사회적 손실을 줄일 수 있다. 영국 도덕철학자 애덤 스미스는 타인을 불쌍히 여기는 도덕심이 결국 국가의 부를 이룬다고 했다. 지도자의 가장 큰 덕목은 가난한 백성을 불쌍히 여기는 연민이다. 책임 의식을 새롭게 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