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멀리 보이는 수도원은 고요에 잠겨 있다. 바람이 불고 구름이 흩어진다. 웅덩이에 떨어지는 빗방울, 마른 가지에 쌓이는 눈송이. 수도사들은 발소리를 죽이고 그림자처럼 걷는다. 옷을 여미고 무릎 꿇는 소리, 책장을 넘기는 소리, 펜이 양피지를 긁어대는 소리, 성가를 부르고 기도하는 소리만 나직할 뿐, 평화가 충만한 그곳엔 어떤 죄악도 발붙일 수 없을 것 같다.

그러나 수도원에도 사람이 산다. 맛있는 걸 배불리 먹고 싶고 따뜻하게 입고 싶고, 사랑하고 사랑받고 싶은 욕망은 누르고 밟아도 사라지지 않는다. 더 많이 알고 싶고 더 높은 곳에 오르고 싶은 열망도 강렬해서 간절한 기도와 혹독한 수련으로도 몰아내기가 쉽지 않다. 끝내 탐욕과 갈등이 포화 상태에 이른 수도원엔 의문의 죽음이 줄을 잇는다. 악마의 짓이라며 수도사들은 의심과 불안과 공포에 휩싸인다.
신과 신의 사제가 세상을 지배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교황파와 세속의 통치는 황제에게 맡기고 사제는 수련에만 전념해야 한다는 청빈파의 반목이 깊어가자 화해를 모색하기 위해 여러 종파의 수도사들이 베네딕트 수도원으로 모여든다. 황금 십자가 목걸이, 크고 붉은 루비가 박힌 반지로 한껏 멋을 낸 수도원장이 윌리엄 수사와 제자 아드소를 반긴다.
프란체스코회 소속의 지혜로운 윌리엄은 수도원장의 부탁으로 사건의 비밀을 찾아 나선다. 젊고 잘생긴 수도사는 추락사했고 그리스어 번역사는 돼지 피에 빠져 죽었다. 밤마다 자기 몸을 채찍질하던 도서관 부사서는 욕조에서 익사했다. 윌리엄은 도서관장이 웃음을 죄악시한다는 것, 금서로 지정된 아리스토텔레스의 책이 그들의 죽음과 연관되어 있다는 것을 알아낸다.


한편, 스승을 도와 증거를 따라가던 수련생 아드소는 마을 소녀가 수도사에게 몸을 주고 식량을 얻어간다는 사실을 알고 놀란다. 수도사들은 현세에 기부하면 천국에서 백배의 보상을 받으리라 설교하며 헌금을 강요했다. 마을 사람들은 당장 먹을 게 없는데도 농작물과 가축을 수도원에 바쳐야 했고 수도사들이 배불리 먹고 버린 음식 쓰레기를 뒤져 주린 배를 채웠다.
비밀을 들킨 소녀도 당황했지만, 아드소를 보고 한눈에 반한 그녀는 그의 품을 파고든다. 아드소는 처음으로 육체적 사랑을 경험하고 혼란에 빠진다. 숭고한 신의 사랑 안에서는 왜 소녀가 준 설렘과 기쁨을 느낄 수 없었을까. 신은 왜 이렇게 아름다운 악을 창조하신 걸까. 죄는 왜 이토록 달콤한가.
늙고 눈먼 도서관장은 윌리엄이 장서관에 들어가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다. 수도원장도 수사 중지를 요구한다. 대신 교황청에서 온 종교재판관에게 사건을 맡긴다. 그러는 동안 의문의 시신들이 또 발견된다. 마침 헛간에서 화재가 발생하자 재판관은 실수로 불을 낸 살바토레 수사를 잡아 고문하고 그간의 모든 살인을 저질렀다는 허위 자백을 받아낸다. 마을 소녀도 마녀로 몰아 함께 화형을 명한다.
살바토레와 소녀가 살인과 무관한 걸 밝혀달라고 아드소는 스승에게 매달린다. 소녀를 제발 살려달라고 신 앞에 엎드려 눈물을 쏟는다. 그러나 신은 대답하지 않고 스승은 어쩔 수 없다며 고개를 젓는다. 재판관과 윌리엄은 오랜 악연으로 엮여 있었다. 이단으로 지목된 사람을 변호했다가 투옥되고 고문당한 그는 결국 주장을 철회했고 이단자로 몰린 남자는 화형당했다.
논리와 이성에 따른 사실조차 재판관은 지적 자만으로 매도했다. 허영심과 오만은 수도사에겐 용서받지 못할 죄악이었다. 그들은 이단이다, 재판관이 손가락을 세우면 그들은 이단자가 된다. 저 여자는 마녀다, 선언하면 그녀는 마녀가 된다. 재판관의 천명은 번복되지 않는다. 그의 말이 곧 법이고 교황의 선포이며 신의 뜻이었다.
믿음과 신념이 다른 사람에게 죽음을 선고할 권리가 인간에게 있을까. 윌리엄은 그런 의문을 소리 내어 말할 수 없었다. 재판관은 죄인들을 정화해야 한다며 살아 있는 사람의 몸에 불을 붙이고 비명을 듣는 걸 즐겼다. 교황청의 청빈을 주장하는 프란체스코회의 수도사들을 척결하고 싶어 하는 재판관에게 반기를 든다면 이번에야말로 윌리엄은 죽음을 면치 못할 터였다.
진실, 그 자체는 환영받지 못하고 세상을 구하지도 않는다. 오히려 적개심과 혐오, 두려움을 일으킨다. 믿음이 원하는 답을 주는 것도 아니다. 윌리엄은 한발 물러선다. 불의와 타협하는 건 아니다. 애써 꺼내놓은 진실이 다시 매장될 게 뻔하다면 서둘러선 안 된다. 인내심을 갖고 에둘러 길을 찾는 것도 지혜다.
화형대가 준비되는 동안 윌리엄과 아드소는 비밀 통로를 찾아 도서관에 들어간다. 귀한 장서들이 셀 수 없이 꽂혀 있는 서가를 보고 윌리엄은 감탄한다. 관장은 왜 이토록 귀한 책들을 혼자 독점하고 일반 수도사에게는 공개하지 않는 것일까. 무지가 인간을 위험에 빠뜨리듯 과도한 지적 욕망도 인간을 함정에 몰아넣는다. 그보다 더 위험한 것은 ‘내가 아는 게 최고’라는 편협하고 옹졸한 지식인의 통제다. 그 결과 젊은 수도사들이 책을 읽었다는 이유로 살해당했다.
“왜 웃음을 두려워하는 겁니까?” 윌리엄이 묻는다. “웃음은 두려움을 없애니까. 두려움 없는 신앙은 있을 수 없지. 악에 대한 두려움이 없다면 신은 필요하지 않거든.” 눈먼 도서관장이 말한다. 신과 함께 평생을 살아왔다는 그의 마음엔 웃음 한 조각도 남아 있지 않았다. 아집과 독선에 갇힌 그는 육체의 눈뿐 아니라 영혼의 눈까지 멀어버린 지 오래였다.
‘장미의 이름’은 움베르토 에코의 동명 소설을 각색한 영화다. 노년이 된 아드소가 과거를 회상하며 적어 내려가는 형식인 소설은 “지난날의 장미는 이제 그 이름뿐, 우리에게 남은 것은 그 덧없는 이름뿐”이란 인용문으로 끝을 맺는다.
인간은 욕망하고 싸운다. 수도원에 살든 속세에 살든 ‘내 믿음은 옳다, 네 신념은 틀렸다’며 하루도 쉬지 않고 다투고 죽이고 전쟁한다. 모든 것이 사라져도 이름이 남기에. 목숨 걸고 지키려 한 것이 장미라 믿기에. 돌아보면 바람 한 줄기, 한낱 어리석은 꿈이라 해도 헛되고 헛된 그 이름, 장미의 이름만이 우리가 사랑할 이유, 오늘도 힘내서 살아갈 이유일지도.